21세기 기술 사회는 역설적 상황에 직면해 있다. 한편으로는 개인이 전례 없는 창작 도구와 표현의 자유를 갖게 되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소수의 거대 기술 기업이 우리의 일상, 소통, 그리고 사고 방식까지 지배하고 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수백만 명의 크리에이터들이 활동하고 있지만, 이들의 창작 활동이 진정한 기술적 대안을 만들어내고 있는가라는 질문이 제기된다.
1960년대 대항문화가 기술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며 '기술의 인간화'를 추구했던 것처럼, 현재의 크리에이터 문화와 그 연장선상에 있는 다양한 문화운동들이 새로운 대항문화로 발전할 가능성은 있는 것일까? 아니면 이들은 기존 기술 체제에 포섭된 채 개별적 성공만을 추구하는 분산된 집단에 머물 것인가?
이 글은 현재의 문화운동들이 1960년대 대항문화의 유산을 어떻게 계승하고 있으며, 미래 기술에 실질적 영향을 미치기 위해 어떠한 철학과 조직화가 필요한지 탐구한다.
또한, 현대 크리에이터 문화를 중심으로 한 기술문화의 계보를 재구성함으로써, 우리가 현재 목격하고 있는 분산된 창작 활동들이 어떤 역사적 맥락 위에 놓여 있는지를 시각적으로 보여준다.
1960년대 대항문화는 단순한 반체제 운동이 아니라, 기술과 인간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재정의하려는 시도였다. 이 운동의 핵심에는 스튜어트 브랜드(Stewart Brand)의 『전지구 목록(Whole Earth Catalog)』이 제시한 "도구 철학(tool philosophy)"이 있었다.
"We are as gods and might as well get good at it." 전지구 목록에 실린 이 선언은 기술에 대한 근본적으로 새로운 관점을 제시했다. 기술은 소수의 전문가나 대기업이 독점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이 직접 활용할 수 있는 도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당시 지배적이던 중앙집권적 기술 체계에 대한 직접적 도전이었다.
브랜드의 철학에서 핵심적인 것은 개인 창조주의(Individual Creatorship)였다. 그는 개인이 신과 같은 창조적 능력을 갖고 있으며, 적절한 도구만 주어진다면 누구나 자신만의 세계를 창조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는 단순히 기술 접근성의 문제를 넘어서, 개인의 창조적 자율성과 책임을 강조하는 철학이었다. 개인은 더 이상 거대한 시스템의 수동적 수용자가 아니라, 자신의 환경과 도구를 선택하고 조합하는 능동적 창조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대항문화가 추구한 "기술의 인간화"는 두 가지 차원에서 이해될 수 있다. 첫째는 기술 접근의 민주화였다. 복잡하고 비싼 기술을 누구나 이해하고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둘째는 기술 개발 과정의 민주화였다. 기술이 소수 전문가의 실험실이 아닌 사용자 공동체의 참여를 통해 발전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철학은 당시로서는 급진적이었지만, 오늘날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많은 기술적 현실의 토대가 되었다. 개인용 컴퓨터, 인터넷, 오픈소스 소프트웨어, 그리고 크리에이터 플랫폼까지 모두 이러한 민주화 정신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대항문화와 기술발전의 관계를 설명한 대표적인 작가가 프레드 터너(Fred Turner)다. 그는 『대항문화에서 사이버문화로(From Counterculture to Cyberculture)』에서 1960년대 대항문화가 어떻게 실리콘밸리의 기술 문화로 전환되었는지를 추적했다. 그에 따르면, 브랜드와 같은 인물들은 히피 문화의 공동체적 이상과 기술적 혁신을 결합시켜 새로운 형태의 기술 문화를 창조했다.
터너는 이 과정에서 대항문화의 정치적 급진성이 기술적 혁신으로 치환되었다고 분석한다. 체제에 대한 직접적 저항 대신, 기술을 통한 개인의 역량 강화와 네트워크 구축이 변화의 수단이 되었다. 이는 훗날 실리콘밸리식 기술적 해결주의(technological solutionism)의 기원이 되었지만, 동시에 개인이 거대한 기술 시스템에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이러한 전환은 양면적 결과를 낳았다. 한편으로는 개인의 기술적 역량을 크게 향상시켰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집단적 정치 행동을 개인적 기술 혁신으로 대체하는 경향을 만들어냈다. 현재 크리에이터 문화의 개인주의적 성향은 바로 이러한 역사적 전환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오늘날에도 기술에 저항하거나 인간화하려는 문화운동은 여전히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다. 오픈소스 운동, 해커 커뮤니티, 메이커 운동, 웹3 실험, 크리에이터 협동조합, 디지털 주권 운동 등은 모두 현대 기술 체제의 문제에 대응하며 독자적인 방식으로 실천을 이어가고 있다. 이들은 단순한 유행이나 개인 취향의 표현을 넘어서, 기술의 권력화에 맞서 새로운 사회적 질서를 실험하는 움직임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처럼 다양한 실천들을 제대로 이해하고 연결하기 위해서는, 이들이 어떤 역사적 흐름 속에서 등장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오늘날의 크리에이터 문화는 단절된 현재가 아니라, 기술을 인간화하려 했던 19세기 후반 이후의 문화운동들이 겹겹이 쌓이며 형성된 결과이기 때문이다.
아래의 도표는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현대 문화운동의 계보를 정리한 것이다. 미술공예운동, 대항문화, 해커 윤리, 오픈소스, 메이커 운동, 디지털 주권주의 등 다양한 흐름은 서로 교차하며 오늘날의 크리에이터 문화로 수렴되고 있다. 이 도표를 통해 우리는 현재의 문화운동을 일시적 현상이 아니라 장기적인 문화적 응전의 일환으로 해석할 수 있는 인식의 틀을 마련할 수 있다.
첫 번째 트랙은 1890년대 미술공예운동에서 시작된 ‘수공예 기반의 반산업 문화’로, 1960~70년대 대항문화와 DIY 문화, 그리고 디지털 플랫폼 창작자들로 이어진다. 이 트랙은 크리에이터 문화를 인간의 창조성과 자율성 회복이라는 문화사적 흐름 속에 배치한다.
두 번째 트랙은 1960년대 대항문화의 해커 정신과 정보 자유화 운동에서 출발한 ‘디지털 문화운동’이다. 이 흐름은 디지털 유토피아, 커먼즈, 디지털 주권 운동으로 이어지며, 기술 권력에 대한 비판적 감수성과 참여적 기술 문화를 형성해왔다. 특히 오픈소스 운동, 해커 문화, 메이커 운동은 모두 대항문화의 레거시(legacy)를 현대적으로 계승한 사례들이다. 이들은 기술을 소유가 아닌 공유의 기반으로 삼으며, 사용자 참여와 공동 창작을 통해 기술 민주화의 이상을 실현하려 했다.
세 번째 트랙은 2000년대 이후 1인 미디어와 플랫폼 기반의 ‘현대 크리에이터 경제’이다. 이 흐름은 점점 경제적 영역으로 확장되며 크리에이터의 직업화, 콘텐츠 기반 경제의 등장으로 이어졌다.
이 세 가지 흐름은 서로 중첩되며, 궁극적으로 오늘날의 ‘현대 크리에이터 문화’라는 교차 지점으로 수렴된다. 이처럼 크리에이터 문화는 단순한 트렌드가 아니라, 역사적 문화운동의 계보 속에서 기술을 인간화하려는 다양한 실천이 수렴된 결과로 이해할 수 있다.
현재의 기술 환경은 새로운 형태의 결집을 요구하고 있다. 소수의 빅테크 기업이 플랫폼, 알고리즘, 데이터를 독점하면서, 개인 창작자들은 이들의 정책 변화에 무력하게 노출되어 있다. 예를 들어, 유튜브의 수익화 정책 변경, 인스타그램의 알고리즘 조정, 애플과 구글의 앱스토어 정책 등은 수백만 크리에이터의 생계와 표현의 자유에 직접적 영향을 미치고 있다.
특히 표에서 보이듯, 크리에이터 문화는 본래부터 예술, 기술, 경제를 가로지르는 다층적 흐름 속에서 성장해 왔다. 그러나 현재의 분산 구조는 각 문화운동이 지녔던 통합적 비전을 약화시키고 있다. 따라서 이 흐름을 다시 결집하는 일은 단순한 연대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이러한 상황에서 개별 창작자들의 분산된 활동만으로는 기술의 발전 방향에 의미 있는 영향을 미치기 어렵다. 플랫폼 거버넌스, 데이터 소유권, 알고리즘 투명성, 창작자 권리 보호 등의 문제는 집단적 행동을 통해서만 해결할 수 있다.
새로운 결집의 가능성은 이미 여러 영역에서 조심스럽게 나타나고 있다. 첫째, 웹3와 블록체인 기술을 통한 탈중앙화 플랫폼 구축 시도들이다. 이들은 크리에이터가 플랫폼을 직접 소유하고 통제할 수 있는 구조를 설계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Lens Protocol, Farcaster, Mirror.xyz와 같은 프로젝트들이 크리에이터 중심의 생태계를 지향한다.
둘째, 창작자 협동조합과 길드 형태의 조직화가 시작되고 있다. 독일의 유튜버 유니온, 미국의 작가 길드, 한국의 창작자 노조 실험 등은 개별 창작자들이 집단적 목소리를 내기 위한 초기적 시도다.
셋째, 오픈소스 커뮤니티와 크리에이터 문화 간의 연결이 강화되고 있다. 크리에이터들이 직접 개발에 참여하거나, 개발자들이 창작자 친화적 도구를 만드는 협업이 증가하고 있다. 이는 기술문화의 분화된 주체들이 서로를 재발견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결집은 여러 구조적, 문화적 장애물에 직면해 있다. 첫째, 현재의 크리에이터 문화는 개인주의적 성공 서사에 기반하고 있다. “인플루언서가 되어 부를 얻는다”는 내러티브는 협력이나 조직화보다는 개별적 경쟁을 부추기며, 공동의 문제 해결보다는 사적 브랜딩에 집중하도록 유도한다.
둘째, 기술적 복잡성이 참여 장벽으로 작용하고 있다. 1960년대와 달리 현재의 기술은 너무 복잡해져서 일반 시민이 이해하고 개입하기 어려운 수준에 이르렀다. 블록체인, 인공지능, 알고리즘 기반 플랫폼 설계는 전문 기술자 중심의 문화를 강화하고 있으며, 이것은 오히려 기술 민주화를 저해할 수 있다.
셋째, 기존 플랫폼의 편의성과 네트워크 효과는 매우 강력하다. 새로운 대안을 만드는 것보다 기존 플랫폼을 이용하는 것이 훨씬 쉽고 효과적이다. 이는 크리에이터들이 독립적 생태계로 이탈하기보다, 주어진 구조 안에서 최적화하려는 경향을 낳는다.
그렇다면 제2의 대항문화가 등장하려면 어떤 조건이 충족되어야 할까?
공통된 비전의 형성: 다양한 문화운동들이 공유할 수 있는 기술적·사회적 비전이 필요하다. 단순히 “빅테크 반대”를 넘어, 실현 가능한 대안 모델과 기술의 인간화 방향성이 제시되어야 한다.
조직적 인프라의 구축: 분산된 창작자들을 연결할 수 있는 새로운 형태의 중간 조직이 필요하다. 이는 전통적인 노동조합이나 기업이 아닌, 창작자 주도 네트워크, 협동조합, 자율 분산형 조직(DAO) 등의 실험적 형태가 될 수 있다.
기술적 대안의 실현: 기존 플랫폼에 대한 실질적 대안 기술이 개발되어야 한다. 그것은 단순히 이상적일 뿐 아니라, 사용자 경험과 네트워크 효과 면에서도 충분한 경쟁력을 가져야 한다.
문화적 서사의 전환: 현재의 크리에이터 문화는 ‘팔로워 수’, ‘조회수’, ‘수익’ 같은 성과 지표 중심의 경쟁 서사에 갇혀 있다. 이를 넘어서 집단적 역량 강화, 자립과 협업, 인간 해방이라는 새로운 문화적 서사가 확산되어야 한다. 즉, 소비에서 창작으로, 의존에서 자립으로, 성과에서 공동체로의 전환이 필요하다.
현재의 크리에이터 문화와 관련 문화운동들은 1960년대 대항문화의 유산을 계승하면서도 새로운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개인의 창작 역량은 전례 없이 강화되었지만, 동시에 기술 권력의 집중도 또한 심화되었다.
제2의 대항문화의 가능성은 이러한 모순을 어떻게 해결하느냐에 달려 있다. 분산된 개별 활동을 조직된 집단 행동으로 발전시킬 수 있다면, 현재의 문화운동들은 미래 기술의 발전 방향에 실질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역사적 주체가 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자동적으로 일어나지 않는다. 의식적인 조직화 노력, 명확한 비전, 그리고 무엇보다도 기술을 통한 인간 해방이라는 대항문화의 근본 정신을 현재적으로 재해석하는 작업이 요구된다. 제2의 대항문화는 가능하다. 하지만 그 가능성은 우리의 선택과 실천에 달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