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습니다. 에펠탑, 자유의 여신상, 만리장성 같은 랜드마크를 찍고 다음 도시로 이동하는 '체크리스트 여행'의 시대가 저물고 있습니다. 대신 한 동네에 며칠씩 머물며 현지인처럼 살아보는 '로컬 여행'이 글로벌 트렌드로 자리 잡았습니다.
에어비앤비가 2024년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에어비앤비 이용자의 77%가 현지인처럼 살아보는 경험을 위해 에어비앤비를 선택했다고 밝혔습니다.* 또한 팬데믹 이후 'neighborhood travel', 'local experience', 'stay like a local'과 같은 검색어가 눈에 띄게 증가했습니다.
이런 변화는 단순한 유행이 아닙니다. 여행자들이 진정성(authenticity)을 추구하기 시작했다는 신호입니다. 관광지의 인위적인 경험보다 실제 사람들이 살아가는 동네의 일상을 엿보고 싶어 합니다. 아침에 동네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골목 서점을 둘러보고, 현지인이 가는 식당에서 저녁을 먹는 것. 이것이 새로운 여행의 정의가 되었습니다.
특히 MZ세대는 인스타그램에 올릴 '남들과 다른' 경험을 찾습니다. 유명 관광지의 똑같은 사진보다는, 숨겨진 벽화 골목이나 로컬 빵집의 독특한 인테리어가 더 매력적입니다. 최근 넷플릭스의 여행 프로그램들도 고급 호텔보다 지역 기반의 숙소와 음식, 골목 문화를 다루는 경우가 많아졌습니다.
한국도 예외가 아닙니다. 서울의 성수동, 을지로, 연남동은 이미 국내외 여행자들의 핫플레이스가 되었습니다. 경주 황남동의 한옥 카페거리, 전주 한옥마을의 골목상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들 동네는 그 어느 관광명소와 견줄 만큼 여행자의 관심을 끌고 있습니다. "한 동네가 도시를 먹여 살린다"는 말이 과장이 아닌 현실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전 세계가 동네 여행에 열광하고, 실제로 한국의 여러 동네들이 관광 명소가 되었는데, 정작 우리나라에는 '동네 여행'을 제대로 지원하는 정책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한국관광공사의 홍보물을 펼쳐보면 여전히 경복궁, 해운대, 설악산이 주인공입니다. 지역 관광재단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부산은 태종대와 광안대교를, 제주는 성산일출봉과 한라산을 홍보합니다. 점 단위 관광지를 연결한 코스 상품이 관광 마케팅의 주류입니다.
성수동에서 2박 3일 머물며 수제화 공방을 체험하고, 서울숲을 산책하고, 독립서점에서 책을 읽는 여행. 황남동 한옥에서 묵으며 대릉원 새벽안개를 보고, 동네 할머니가 운영하는 쌈밥집에서 밥을 먹고, 첨성대 야경을 즐기는 여행. 이런 '동네에서 살아보기' 여행 상품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더 심각한 것은 인프라입니다.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동네 여행지에서조차 2박 3일을 편안하게, 특히 가족 단위로 머물 숙소를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동네를 깊이 체험할 프로그램도, 이를 안내할 로컬 가이드도 부족합니다.
표면적으로는 관광산업의 관성 때문입니다. 한국 관광산업의 분석 단위는 여전히 정부가 지정하는 '관광지'입니다. 관광객 수, 관광 수입, 만족도 조사 모두 관광지 중심으로 이루어집니다. 동네 단위의 관광 통계는 아예 수집조차 되지 않습니다. 측정되지 않는 것은 관리되지 않고, 관리되지 않는 것은 정책이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더 근본적인 원인은 우리나라의 행정 체계에 있습니다. 동네 여행이 활성화되려면 읍면동 단위의 집중적인 투자와 자율적인 정책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한국의 행정 체계는 중앙정부-광역지자체-기초지자체로 이어지는 3단계 구조입니다. 읍면동은 기초지자체의 하부 행정 단위일 뿐, 독자적인 예산이나 정책 권한이 없습니다.
기초지자체장의 입장을 생각해 보면 딜레마가 명확해집니다. 성수동에만 집중 투자하면 다른 동의 주민들이 반발합니다. 형평성의 논리 때문에 모든 동에 조금씩 나눠주는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어느 동네도 제대로 된 여행 인프라를 갖추지 못하게 됩니다.
중앙정부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국관광공사가 특정 동네만 집중 홍보할 수는 없습니다. 전국의 모든 지역을 아우르는 '한국 일주' 성격의 광역 상품을 만들 수밖에 없는 구조입니다. 지역 관광재단들도 시도 전체를 홍보해야 하는 의무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이런 구조적 한계는 통계에서도 드러납니다. 관광 통계는 시군구 단위와 관광지로만 집계됩니다. 자연 마을이나 동네에 몇 명이 왔는지, 얼마를 썼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데이터가 없으니 정책을 만들 근거도 없고, 예산을 배정할 명분도 없습니다. 악순환의 고리입니다.
해결책은 의외로 간단할 수 있습니다. 소상공인 지원 정책을 읍면동 단위로 이관하는 것입니다.
현재 소상공인 지원은 중소벤처기업부와 지자체가 나눠서 담당합니다. 그런데 동네 여행의 핵심 인프라는 대부분 소상공인들이 운영합니다. 카페, 식당, 게스트하우스, 공방, 서점 등이 모두 소상공인의 영역입니다. 만약 읍면동이 소상공인 지원 예산과 권한을 갖게 된다면, 자연스럽게 동네 여행 생태계를 조성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인삼자원이 풍부한 금산읍이 소상공인 지원금으로 '2박 3일 금산읍 살아보기' 프로그램을 만든다고 가정해 봅시다. 동네 카페들과 협력해 웰컴 드링크를 제공하고, 인삼 공방과 함께 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게스트하우스들과 연계해 숙박 패키지를 구성할 수 있습니다. 읍 주민센터가 이런 사업의 코디네이터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이미 일부 지자체에서는 동 단위 마을 만들기 사업을 통해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서울시의 '로컬 브랜드 상권' 사업, 부산의 '골목상권 활성화' 프로젝트 등이 좋은 예입니다. 문제는 이런 사업들이 여전히 시나 기초단체에 의해 기획되고 동은 실행만 한다는 점입니다. 기획부터 실행까지 동 단위에서 자율적으로 할 수 있어야 진짜 동네 여행이 가능해집니다.
물론 반론도 있을 것입니다. 읍면동의 행정 역량이 부족하다는 지적, 예산 낭비의 우려, 동네 간 격차 심화 문제 등입니다. 하지만 이미 성수동, 황남동, 연남동 같은 동네들은 민간의 자생적 노력만으로도 관광 명소가 되었습니다. 여기에 행정의 체계적 지원이 더해진다면 훨씬 더 많은 동네들이 매력적인 여행지로 거듭날 수 있습니다.
미스터리의 답은 명확합니다. 동네 여행이 대세가 되었는데도 정책이 따라가지 못하는 이유는 행정 체계의 구조적 한계 때문입니다. 읍면동에 권한과 예산이 없으니 동네 여행을 육성할 주체가 없는 것입니다.
이제는 발상을 전환할 때입니다. 관광지를 개발하는 관광 정책에서 벗어나, 동네를 선보이는 로컬 여행 정책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 첫걸음은 동네에 힘을 실어주는 것입니다. 소상공인 지원의 읍면동 이양은 작은 시작이지만, 한국 관광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큰 변화가 될 수 있습니다.
*"Airbnb Statistics 2024: Revenue, Rates & Growth Trends." iGMS, 20 Sept. 2024, https://www.igms.com/airbnb-statistic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