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무감을 불러일으키는 도시들
우리가 어떤 도시를 여행하게 되는 이유 중 하나는 그 도시가 지닌 역사적 중요성 때문이다. 단순히 비즈니스 목적도 아니고, 재미만을 위한 여행도 아니다. 인류사에서 그 도시가 차지하는 위상 때문에 ‘한 번은 가봐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끼게 하는 도시들이 있다.
대표적인 예로는 아테네와 예루살렘 같은 문명 발상지들이 있다. 아테네는 민주주의 제도의 발원지로, 예루살렘은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가 모두 성지로 여기는 특별한 도시다. 개인적으로는 러시아 제국과 소비에트 연방의 정치 중심지였던 모스크바, 힌두교 최대 성지 중 하나인 바라나시, 그리고 고대 이집트 문명의 유산이 집약된 카이로 역시 이러한 ‘의무감의 도시’에 해당한다고 생각한다.
이제 한국으로 돌아와 보자. 서울은 외국인들이 꼭 방문해야 할 의미 있는 도시일까? 역사적 필연성을 지닌 도시인가?
서울의 의미에 대해 외국인들이 사용하는 표현은 대체로 진부하다. 관광 가이드북이나 여행 블로그 대부분이 ‘전통과 현대의 공존’이라는 문장을 반복한다. 경복궁과 고층 빌딩, 한옥마을과 트렌디한 카페의 대비 같은 이미지가 외국인들이 포착한 서울의 특징이다. 공공기관이 자주 사용하는 ‘천년고도’, ‘한강의 기적’ 같은 수사는 외국인에게 큰 공감을 얻지 못한다. 그렇다면 K-pop 팬들을 겨냥한 ‘K-pop 성지’라는 표현이 더 효과적인가?
사실 서울의 의미를 외국인의 시선에만 의존하는 데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 외국인의 서울 체험은 대부분 단기 관광에 국한되며, 그들이 경험하는 서울은 한국 드라마나 유튜브 속 이미지를 따라 구성된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한강 치맥’, ‘한복 대여’, ‘찜질방 체험’ 등은 실제 서울 시민의 일상이라기보다, 미디어에 의해 가공된 체험 요소다. 최근 외국인들이 “한국 사람처럼 살아보고 싶다”라고 말할 때, 그들이 꿈꾸는 서울의 일상은 현실이라기보다 드라마 장면에 가까운 경우가 많다.
결국 서울의 의미는 우리가 스스로 정의해야 한다. 외부의 시선만으로는 도시의 고유한 성격을 파악하기 어렵다. 다음은 서울이 지닌 역사적·문화적 특수성을 바탕으로 우리가 재정의해 볼 수 있는 네 가지 도시적 테마다.
서울은 다양한 종교가 공존하는 도시다. 중심부 몇 킬로미터 이내에 불교의 조계사, 가톨릭의 명동성당, 개신교의 정동교회, 이슬람의 서울중앙성원 등 주요 종교시설이 공존한다.
2021년 인구주택총조사에 따르면 서울의 종교 분포는 불교 15.5%, 개신교 17.4%, 가톨릭 6.8%로 나타났다(전국 기준). 서울시 자체 조사에서는 불교 17.9%, 개신교 23.3%, 가톨릭 8.2%라는 수치도 제시된 바 있다. 종교 분포가 다양함에도 불구하고, 서울에서는 종교 간 갈등이 비교적 적은 편이다.
서울은 현대 한국 민주주의 운동의 주요 무대였다. 1960년 4·19 혁명, 1987년 6월 항쟁, 2016–2017년 촛불집회에 이르기까지, 서울 도심은 수많은 시민 참여와 직접 행동의 현장이었다.
광화문광장, 명동성당, 대학로 일대는 단순한 장소를 넘어, 민주주의가 실천된 공간이자 기억의 장소다. 서울의 민주주의는 단지 제도적 절차가 아니라 거리의 행동을 통해 형성된 살아 있는 역사다.
서울은 전 세계 대도시 중 드물게 도심 내에 산이 많은 도시다. 북한산(836m), 관악산(632m), 북악산(342m), 인왕산(338m), 안산(296m), 남산(262m), 낙산(125m), 봉화산(160m) 등 크고 작은 산들이 도시 전역에 분포한다.
서울시 면적의 약 40%가 산지로 구성되어 있으며, 서울시가 관리하는 공식 등산로만 300개가 넘는다. 특히 청와대 뒤편에 위치한 북악산은 외국인 방문객들에게도 인기가 높다. 최근에는 CNN, Lonely Planet 등 해외 매체에서도 ‘도심 속 산책과 등산이 가능한 도시’로 서울을 소개하고 있다.
서울의 상업 생태계는 골목 기반의 자영업 밀집 지역을 중심으로 발달해 있다. 홍대, 이태원, 성수동, 경리단길 등 각 지역마다 고유한 골목 상권이 형성되어 있으며, 이는 서울 도시문화의 중요한 특징이기도 하다.
서울시 자료에 따르면 전체 상업시설의 약 60% 이상이 골목길을 기반으로 운영되고 있다. 이는 대형 쇼핑몰이나 체인 중심의 다른 글로벌 도시들과 차별되는 구조로, 자생적인 상권과 창의적인 소비문화가 동시에 발전해 온 배경이기도 하다.
서울은 ‘한류’, ‘전통과 현대’라는 외부의 틀을 넘어, 스스로의 의미를 탐색해야 할 시점에 와 있다. 다종교의 평화로운 공존, 시민의 직접 참여로 이룩된 민주주의, 도심 속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문화, 그리고 골목길에서 피어나는 창의적 상업 생태계.
이 네 가지 요소는 외부에서 아직 부각되지 못한, 서울이 가진 진짜 의미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