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이 패션 수도로 불리는 파리, 뉴욕, 런던, 밀라노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을까? 이들 도시는 수 세기에 걸쳐 축적한 장인정신과 역사적 깊이를 바탕으로 글로벌 패션 트렌드를 주도한다. 반면 서울에는 동대문의 놀라운 생산력, 강남의 세련된 럭셔리 문화, 홍대의 창의적인 젊은 에너지 등 저마다 독특한 매력을 지닌 패션 지구들이 산재해 있다.
하지만 이러한 개별 요소들이 진정으로 하나의 유기적 생태계로 통합되어 세계적 패션 리더십을 발휘하고 있는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솔직히 말해, 서울은 아직 세계가 주목하는 통합된 패션 생태계로 완성되지 않았다.
파리, 뉴욕, 밀라노 같은 전통적 패션 도시들의 진정한 힘은 단순히 화려한 매장들이 모여있다는 점에 있지 않다. 이들이 가진 핵심 경쟁력은 디자인부터 생산, 유통, 판매, 인재 양성에 이르기까지 패션 산업의 모든 과정이 긴밀하게 연결된 통합적 생태계에 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패션타운의 모습이다.
이에 비해 서울은 동대문, 성수동, 강남 등 각각 뚜렷한 특색을 지닌 여러 패션디스트릭트들로 구성되어 있다. 동대문은 초고속 제조와 유통의 허브를, 강남은 명품 브랜드와 고급 소비문화의 중심지를, 성수동은 신진 디자이너와 패션테크 혁신이 만나는 실험적 공간을 맡고 있다.
문제는 이들 개별 디스트릭트가 아무리 뛰어난 성과를 보인다 하더라도, 서로 분절되어 있어 통합된 패션타운으로서의 시너지를 창출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서울이 글로벌 패션 도시로 도약하려면 각 디스트릭트의 고유한 역할을 명확히 파악하고, 이들을 연결하는 체계적 전략이 필수적이다.
전통적 패션타운의 조건은 명확하다. 디자인부터 생산, 유통, 판매까지 아우르는 수직적 통합 생태계, 글로벌 트렌드를 이끄는 리더십, 다양한 브랜드들의 집적 효과, 독특한 문화적 정체성,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는 제도적 인프라와 혁신 생태계가 그것이다.
이러한 기준으로 볼 때 서울은 몇 가지 영역에서 두각을 나타내지만, 전반적으로는 여전히 발전 과정에 있는 성장형 패션타운이라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 특히 파리의 오트 쿠튀르 전통이나 밀라노의 세대를 이어온 장인정신처럼, 오랜 시간 축적된 패션 헤리티지의 부재는 서울이 극복해야 할 중요한 과제다.
그렇다면 서울은 기존 패션 수도들의 발자취를 그대로 따라가야 할까? 그럴 필요는 없다고 본다. 서울의 진정한 강점은 전통이 아닌 혁신과 속도에 있기 때문이다. 동대문은 전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초고속 생산-유통 시스템을 구축했으며, 이는 디지털 시대의 빠른 트렌드 변화에 가장 적합한 모델이다. 또한 K-Pop, K-Beauty와 연결된 K-Fashion은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강력한 글로벌 문화적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서울은 이처럼 고유한 경쟁 우위를 기반으로 기존 패션 도시들과는 차별화된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해야 한다.
현재 성수동은 과거 수제화와 제조업의 흔적이 남은 공간에 신진 브랜드와 패션테크 스타트업들이 모여들면서, 독특한 감성과 창의성이 공존하는 '혁신의 실험실' 역할을 하고 있다. 오래된 공장을 감각적으로 개조한 공간들은 그 자체로 거대한 패션 무대가 되고 있다. 젠틀몬스터, 아더에러와 같은 독창적 브랜드들의 플래그십 스토어와 함께, 끊임없이 새로운 경험을 선사하는 다양한 팝업 스토어들이 자리 잡고 있다.
주목할 점은 많은 글로벌 명품 브랜드들이 성수동에 플래그십 스토어나 팝업 스토어를 운영하고 있으며, 아직 한국에 진출하지 않은 해외 패션·뷰티 브랜드들도 성수동 진입을 적극 검토할 정도로 글로벌 브랜드의 테스트베드로서의 위상이 급속도로 높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성수동의 가장 큰 차별성은 K-Pop, K-Beauty, K-Fashion의 유기적 결합에 있다.
온라인 패션 플랫폼 무신사는 성수동의 이러한 잠재력을 일찍이 포착하고, 본사 이전과 대규모 투자를 통해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아우르는 독자적 패션 생태계 구축에 나서고 있다. 무신사가 성수동에서 구현하는 모델은 기존 패션 브랜드들이 하나의 건물에 플래그십 스토어를 두는 것과 달리, 성수동 반경 700m 내 15개 거점을 기능별로 특화한 '디스트릭트 플래그십' 전략이다. 본사(캠퍼스), 인큐베이팅(스튜디오), 리테일(스탠다드) 등 각 공간이 서로 다른 역할을 하면서도 디지털적으로 연결되어 하나의 거대한 플랫폼 생태계를 형성한다.
이는 파리의 LVMH가 럭셔리 헤리티지를 기반으로 한 '톱다운' 방식이라면, 무신사는 디지털 플랫폼을 중심으로 한 '보텀업' 방식으로, 크리에이터와 디자이너 중심의 지속가능한 패션 생태계를 완성해 나가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서울은 파리나 밀라노처럼 '전통과 장인정신'을 내세우는 패션타운이 될 수도 없고, 될 필요도 없다. 대신 성수동의 디스트릭트 플래그십 모델을 중심으로 '혁신과 속도, 디지털 융합'을 상징하는 21세기형 패션타운으로 발전해야 한다.
핵심은 성수동을 서울 패션 생태계의 중추적 허브로 확립하는 것이다. 무신사가 증명한 디스트릭트 플래그십 모델을 바탕으로, 성수동이 다른 패션 디스트릭트들과의 연결고리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 동대문이 하드웨어였다면, 성수동은 소프트웨어다. 동대문의 초고속 제조와 홍대의 예술적 영혼, 강남의 브랜딩 노하우가 모두 성수동이라는 플랫폼을 통해 통합될 때, 서울은 비로소 완성된 패션타운으로 도약할 수 있을 것이다.
패션의 미래는 이미 성수동에서 시작되고 있으며, 성수동이야말로 서울 패션 생태계를 하나로 묶는 핵심 동력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