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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가 다시 돌아올 수 있을까?

by 골목길 경제학자

1990년대가 다시 돌아올 수 있을까?


언제 마지막으로 세상에 깊은 영감을 준 문화운동이 있었는지 가물가물하다. 서구나 한국 모두 1990년대였던 것 같다.


미국에서는 시애틀 그런지가 X세대의 분노와 무관심을 동시에 표현했고, 인터넷이라는 새로운 매체가 가져온 디지털 낙관주의가 있었다. 특히 인디 록 씬의 폭발적 성장이 인상적이었다. 서브 팝(Sub Pop) 같은 독립 레이블들이 메이저 레이블에 맞서 자체적인 유통망을 구축했고, DIY(Do It Yourself) 정신이 음악계 전반에 퍼져나갔다. 밴드들이 직접 녹음하고, 포스터를 만들고, 공연장을 섭외하며, 팬들과 직접 소통하는 방식은 오늘날 크리에이터들의 독립적 활동과 놀랍도록 닮아있다. MTV는 젊은이들의 새로운 언어가 되었고, 사인펠드와 프렌즈는 일상의 소소함을 문화적 콘텐츠로 승격시켰다. 타란티노의 영화들은 메타적 재미를 발견했고, 빌 클린턴은 정치를 대중문화와 접목시켰다. 무엇보다 "무관심함에 대한 투쟁"이라는 역설적 열정이 그 시대를 관통했다.


한국에서는 서구와 달리 민중운동이 민주화 여파로 활발했던 시기였다. 노래패의 기타 선율과 함께 불린 민중가요, 대학가를 메운 시위 구호, 마당극과 탈춤의 부활이 한국만의 독특한 문화적 역동성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동시에 홍대 중심의 언더그라운드 음악 씬도 꽃피었다. 클럽 드럭이나 롤링홀 같은 소규모 공연장에서 자생적으로 성장한 인디 밴드들이 메이저 음반사의 간섭 없이 자유롭게 실험했다. 서태지와 아이들이 메인스트림을 장악했다면, 언더그라운드에서는 펑크, 하드코어, 포크 등 다양한 장르의 밴드들이 스스로 기획하고, 스스로 홍보하며, 팬들과 직접 만나는 독립적 활동을 펼쳤다. 이들의 DIY 정신과 자생적 문화 창조 방식은 현재 크리에이터들의 독립적 콘텐츠 제작 문화의 원형이라 할 수 있다.


그 시절의 공통분모는 미래에 대한 복잡한 희망이었다. 냉전이 끝나고 새로운 세상이 열릴 것 같았지만, X세대는 동시에 냉소적이었다. 기술은 인간을 해방시킬 것 같았지만, 동시에 불안감도 가져다주었다. 문화는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상업주의와의 타협도 불가피했다. 1990년대의 문화운동들은 이런 모순을 그대로 안고 가면서도 창조적 에너지를 잃지 않았다.


척 클로스터만이 《The Nineties》에서 날카롭게 지적했듯이, 1990년대는 "무관심과 열정, 낙관주의와 냉소주의, 진정성에 대한 갈망과 상업주의의 팽창이 공존"했던 시기였다. 그런데 바로 이런 모순 때문에 그 시대가 그토록 역동적이고 창조적일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로부터 30여 년이 흘렀다. 과거 어느 때보다 혼란스러운 현재를 살고 있다. AI는 인간의 창조 영역까지 침범하고 있고, 기후변화는 일상을 위협하며, 사회는 갈수록 분열되고 있다. 민주주의는 포퓰리즘과 권위주의의 부상으로 위기를 맞고 있고, 세계 곳곳에서 전쟁과 분쟁이 끊이지 않으며 국제 질서는 흔들리고 있다. 1990년대의 디지털 낙관주의는 플랫폼 독점과 감시자본주의로 변질되었고, 그때의 문화적 다양성은 알고리즘의 획일화로 대체되었다.


이런 시대에 1990년대 같은 문화적 역동성이 다시 가능할까? 지금의 위기들은 결국 인간의 주체성과 존엄성을 위협하는 것들이다. AI는 인간의 고유한 창조 영역을 침범하고, 플랫폼 독점과 알고리즘은 개인의 선택권을 제약하며, 전쟁과 분쟁은 인간의 기본적 생존권을 파괴하고, 민주주의 위기는 시민의 정치적 참여를 무력화시킨다. 이 모든 것들이 인간을 수단화하고 도구화하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여러 가지 가능성이 있겠지만, 나는 1990년대의 정신을 현재에 맞게 재해석한 새로운 휴머니즘 운동을 기대한다. 19세기 윌리엄 모리스가 산업혁명의 기계화에 맞서 수공예의 아름다움을 되찾으려 했듯이, 지금 우리에게도 AI가 대표하는 과잉 기술 중심 사회에서 벗어나 인간적인 것으로 돌아가자는 문화운동이 필요하다.


다음의 문화운동은 기술과의 관계를 재설정하는 것으로 시작할 것이다. 1990년대보다 기술이 훨씬 더 복잡하고 강력해진 지금은 단순한 거부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 실제로 윌리엄 모리스도 기계를 무조건 거부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창조성과 존엄성을 지키는 방향으로 기술을 재구성하려 했다. 오늘날에도 같은 정신으로 고군분투하는 사람들이 있다. 빅테크 독점에 맞서 오픈소스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는 프로그래머들, 개인이 기술을 소유하고 통제할 수 있도록 하는 메이커들, 감시와 통제가 아닌 해방과 창조를 위한 기술을 만드는 해커들. 이들은 모두 새로운 휴머니즘 운동의 기술적 실험가들이다.


AI를 창작 파트너로 활용하면서도 자신만의 고유한 목소리를 잃지 않으려는 크리에이터들, 플랫폼에 종속되지 않고 팬들과 직접 관계를 맺으며 독립적인 창작 활동을 이어가는 아티스트들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1990년대 인디 뮤지션들이 독립 레이블을 통해 자유롭게 창작했듯이, 현재의 디지털 도구를 활용해 메이저 플랫폼의 간섭 없이 직접 팬들과 소통하고 있다. 당시 홍대 언더그라운드 밴드들이 "스스로 기획하고, 스스로 홍보하며, 팬들과 직접 만나던" 방식이 지금의 크리에이터들에게 그대로 계승되고 있는 것이다. 1990년대 인디 문화와 DIY 정신의 현대적 계승자들인 셈이다.


아마도 새로운 문화운동은 1990년대처럼 모순을 안고 갈 것이다. 공동체 텃밭에서 함께 채소를 기르면서도 오픈소스 툴로 창작하고, 동네 서점에서 저자와 만나면서도 탈중앙화 플랫폼에서 작품을 공유하며, 핸드메이드 시장에서 얼굴을 보며 물건을 사면서도 커뮤니티 기반 기술을 함께 개발하는 것. 이런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조화로운 결합이야말로 새로운 휴머니즘 운동의 진정한 모습일 것이다.


우리가 일상에서 휴머니즘을 실천할 수 있는 방법 중의 하나가 감각의 훈련이다. AI가 모든 것을 대체할 수 있다고 말하는 시대에, 김지수 작가의 '감각 자본'은 우리에게 본질적인 답을 제시한다. 대체 불가능한 것은 바로 개인의 고유한 '감각 체계'라는 것이다. 이 책에서 작가는 단순한 라이프스타일 가이드를 넘어서, 술과 음식, 영화와 책, 거리와 도시를 관찰하며 쌓아온 작가만의 섬세한 감각을 통해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는 방법을 보여준다.


1990년대가 그대로 돌아올 수는 없다. 하지만 그 시대의 정신 - 모순을 끌어안으면서도 창조적 에너지를 잃지 않는 것, 냉소와 열정을 동시에 품는 것, 상업주의와 타협하면서도 진정성을 포기하지 않는 것 - 은 여전히 유효하다. 그런 정신으로 현재의 과잉 기술 사회에 맞서는 새로운 문화운동이 언젠가 다시 우리에게 희망을 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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