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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 시민의 기술 철학

by 골목길 경제학자

민주 시민의 기술 철학


어제 발행한 에세이 '정치경제학의 시간'은 신군산복합체를 정치경제학의 새로운 도전으로 제시했다. 이 권력은 현재 미국을 중심으로 기술, 자본, 국가 권력이 결합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독자는 이런 질문을 할 것이다. 신군산복합체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흥미롭게도 정치경제학의 주요 전통들—마르크스주의의 계급 이론, 공공선택이론의 이익단체 이론, 제도주의의 제도 이론—모두 개인 시민의 역할을 크게 강조하지 않는다. 마르크스주의는 계급을, 공공선택이론은 이익단체 경쟁을, 제도주의는 제도적 제약을 중심에 둔다. 개인은 구조의 산물이거나, 제도적 인센티브에 반응하는 존재로 그려진다.


그런데 21세기 기술 변화는 개인의 역할에 대한 정치경제학의 전제를 흔들고 있다. 소셜미디어와 디지털 플랫폼은 정당, 노조, 시민단체 같은 전통적 중개 조직의 역할을 약화시켰다. 동시에 개인이 직접 정보를 접하고, 의견을 표현하고, 집합 행동을 조직할 수 있는 가능성은 확대되었다. 개인 유권자의 이념과 행동 양식이 정치경제 구조에 미치는 영향력이 커지고 있다는 것이다.


신군산복합체 같은 권력 구조도 결국 개인들의 선택—무엇을 소비하고, 누구를 지지하며, 어떤 가치를 옹호하는가—과 무관하게 작동할 수 없다. 앞으로 정치경제학이 해야 할 일은 보다 인간 중심적인 기술사회의 구축을 위한 개인의 행동 강령을 제안하는 것이다.


현재 단계에서 강조할 수 있는 강령은 민주 시민의 기본 철학이다. 기술 권력을 포함한 모든 권위를 의심하는 것이다. 신군산복합체 형성에 대한 대응은 서양 교양교육이 강조하는 '스스로 생각하기'로 시작해야 한다.


권력 견제의 상식

민주주의의 기본은 권력 견제와 균형의 원칙이다. 견제 대상 1순위는 항상 기득권 세력과 기득권의 논리다. 경제 자유를 신봉하는 자유주의자에게도 독과점 지위에 있는 기업은 견제 대상이다. 진정한 자유주의자라면 작은 기업이 창업하고 성장할 때는 응원하지만, 그 기업이 일단 지배적 지위를 차지하면 그 순간부터 경계하고 의심해야 한다.


역사는 권력 견제에 대한 명확한 교훈을 남겼다. "권력은 부패한다. 절대 권력은 절대적으로 부패한다." 미국 헌법 제정자들이 파벌(이익집단)을 민주주의의 가장 큰 적으로 경고한 이유를 기억할 필요가 있다. 파벌에는 좌파도 우파도 없다. 이익집단은 이념을 초월해 권력을 추구한다.


현재 모든 선진국에서 정치·경제·사회 전 영역을 관통하는 가장 강력한 기득권 권력은 기술, 자본, 군사가 결합된 21세기형 군산복합체일 것이다. 기술권력도 민주 시민의 통제에서 예외가 될 수 없다. 기술이 중립적이라는 신화, 기술 발전이 곧 진보라는 믿음—이것들은 혹시 신군산복합체가 스스로를 정당화하기 위해 만들어낸 이데올로기는 아닐까.


전문가가 되어야만 견제할 수 있는가

일반 시민이 기술권력을 견제해야 한다고 주장하면, 즉시 들어오는 반응이 있다. 과연 일반인이 기술을 평가할 수 있는가?


민주주의 사회는 모든 사람이 시민이 될 것을 요구한다. 전문가가 필수 조건이 아니다. 우리는 민주 시민으로서 민주주의의 기본 가치로 권력을 견제할 수 있고 해야 한다. 정의, 평등, 자유, 인간 존엄성 같은 보편적 가치 말이다.


기술사회의 미래 논쟁에서 전문 지식은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기술 엘리트의 지식의 양이 도덕적 우월성을 보장하지 않는다. 기술적 전문성이 정치적 결정권을 자동으로 정당화하지도 않는다.


역사는 시민이 전문 영역을 민주적으로 통제한 사례들을 보여준다. 1960년대 환경운동은 화학 산업의 전문성에 도전했다. 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은 과학자가 아닌 일반 시민의 관점에서 DDT의 위험을 제기했다. 화학 기업들은 "일반인이 복잡한 화학을 이해할 수 없다"라며 비판을 일축하려 했다. 그러나 시민들은 "인간과 자연에 안전한가"라는 보편적 가치로 반격했고, 결국 DDT는 금지되었다.


기술 결정은 본질적으로 가치 판단이다. 어떤 기술을 개발할 것인가, 어떤 위험을 감수할 것인가, 누가 혜택을 받고 누가 비용을 부담할 것인가—이런 질문들에 기술적으로 '올바른' 답은 없다. 오직 사회적으로 '정당한' 답만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정당성은 전문성이 아니라 민주적 숙의에서 나온다.


설명할 수 없다면 그것은 누구의 문제인가

그런데 21세기 기술은 이 원칙에 새로운 도전을 제기한다. 현재 기술 문제의 핵심은 일반 시민뿐만 아니라 전문가도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과학기술의 확산이다.


현대 인공지능 기술은 개발자조차 작동 원리를 완전히 설명하기 어려운 '블랙박스' 특성을 갖는다. 이런 불투명한 기술이 수많은 일자리를 대체하고 있다. 더 나아가 이 기술이 대량살상무기와 연결되면 인류 생존 자체를 위협할 수 있다. 완전히 이해되지 않은 기술이 우리의 생계와 생존을 좌우하는 것이 현재의 상황이다.


전문가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과학기술이 사회를 지배하는 것이 정상일까? 역대 가장 존경받는 물리학자 중 한 명인 리처드 파인만의 유명한 일화가 이 질문에 답한다. 한 캘리포니아 공과대학(Caltech) 교수가 파인만에게 스핀-통계 정리를 설명해 달라고 요청하자, 파인만은 자신 있게 "신입생 강의로 준비하겠다"라고 답했다. 그러나 며칠 후 돌아온 파인만은 이렇게 말했다. "할 수 없었다. 신입생 수준으로 환원할 수 없었다. 이것은 우리가 정말로 이해하지 못한다는 의미다."


파인만이 말한 '우리'에는 노벨상 수상자인 자신도 포함되어 있었다. 파인만의 이 원칙은 과학자 스스로가 세운 기준이다. 진정으로 이해했다면 명료하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 이것은 과학 철학의 핵심 원리다.


21세기 민주주의를 지키는 길

인공지능, 생명공학, 감시 기술, 추천 알고리즘... 이 모든 것이 우리 삶을 근본적으로 바꾸고 있다. 그러나 이런 결정들이 소수 신군산복합체의 손에만 맡겨져 있다면, 그것을 민주주의라고 부를 수는 없다. 그것은 기술관료주의, 소수의 지배에 가깝다.


신군산복합체가 "당신들은 기술을 이해할 수 없다"라며 민주적 통제를 거부할 때, 우리는 이렇게 물어볼 수 있다. "당신들이 제대로 이해했다면 우리에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하지 않는가?" 설명할 수 없다면, 그것은 우리의 무지라기보다 설명의 부재이거나, 때로는 그들 스스로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증거로 봐야 한다.


민주 시민의 참여는 단순히 기술권력을 견제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진정으로 인간 중심의 과학기술을 발전시키려면 민주 시민의 참여가 필수적이다. 기술이 누구를 위한 것인지, 어떤 가치를 추구해야 하는지, 어떤 위험을 감수할 수 있고 없는지—이런 근본적 질문들은 기술 전문가만의 영역이 아니다. 이것은 우리 모두가 함께 답해야 할 민주주의의 질문이다.



참고문헌

David L. Goodstein, "Richard P. Feynman, Teacher, " Physics Today, Vol. 42, No. 2 (February 1989), pp. 70-75, at p. 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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