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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 진보와 노동

by 골목길 경제학자

기술 진보와 노동


정치경제학은 오랫동안 기술을 다뤄왔다. 마르크스는 생산력 발전이 역사를 추동한다고 보았고, 슘페터는 혁신이 자본주의의 동력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전통적 정치경제학에서 기술은 주로 경제성장과 자본축적의 맥락에서 다뤄졌다. 기술이 누구를 위한 것인지, 기술의 방향을 누가 결정하는지, 기술의 혜택이 어떻게 배분되는지 같은 질문은 부차적이었다.


AI와 플랫폼 자본주의가 등장하면서 이런 질문들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 기술 발전이 자동으로 모두에게 이익을 가져온다는 기술낙관론에 대한 회의가 커지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최근 주목받는 책이 대런 아세모글루와 사이먼 존슨의 『권력과 진보』(2023)다.


이 책은 기술을 정치경제학의 중심 의제로 끌어올렸다. 실리콘밸리의 "혁신이 곧 진보"라는 수사에 맞서, 기술이 누구를 위한 것인지, 누가 혜택을 받고 누가 비용을 부담하는지를 묻는다. 이것은 1편에서 제기한 신군산복합체 문제와 맥을 같이한다. 기술과 자본, 권력의 결합을 정치경제학적으로 분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권력과 진보』의 핵심 주장

아세모글루와 존슨은 "기술 발전은 자동으로 번영을 가져오는가?"라는 질문에 "아니다"라고 답한다. 기술의 방향과 결과는 권력관계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이 그들의 핵심 주장이다. 이것은 기술결정론—기술 발전이 자동으로 모두에게 이익을 가져온다는 믿음—에 대한 정면 반박이다.


그들은 역사적 사례를 통해 이를 논증한다. 중세 유럽의 수차와 풍차는 곡물 제분의 생산성을 크게 높였다. 하지만 수차와 풍차의 소유권은 영주와 교회에 집중되었고, 농민들에게는 경제적 부담을 지웠다. 기술 발전이 일반 민중의 삶을 개선하지 못한 것이다. 역사는 기술 발전이 자동으로 모두에게 혜택을 가져오지 않는다는 것을 반복적으로 보여준다.


19세기 영국 산업혁명도 같은 패턴이었다. 생산성을 폭발적으로 높였지만, 노동자의 삶은 오히려 악화되었다. 기술의 열매는 자본가에게만 집중되었다.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는 도시 노동자들에게 산업화는 기계에 종속된 삶을 의미했다. 반면 자본가들은 산업혁명이 낳은 막대한 부를 누렸다.


그러나 19세기 후반부터 변화가 나타났다. 영국에서는 차티스트 운동으로 대표되는 노동운동이 힘을 얻으며 노동조합이 합법화되었고, 보통선거권이 확립되면서 노동자의 정치적 영향력이 커졌다. 전기라는 새로운 범용기술의 도입은 생산 공정의 유연성을 높여 숙련 노동에 대한 수요를 창출했다. 정부는 공장법, 빈민법 등 복지 정책을 확대했다.


이러한 변화는 20세기 초 포드주의적 대량생산 체제에서 가시적 성과를 거두었다. 포드는 컨베이어 벨트로 생산성을 극대화하는 동시에, 5달러의 날로 상징되는 고임금 정책으로 구매력을 창출했다. 이것이 바로 '생산성 밴드왜건' 메커니즘이다. 생산성 향상이 임금 인상으로 이어지고, 구매력 증대가 수요를 확대하며, 이것이 다시 생산성 향상을 촉진하는 선순환이다.


이 메커니즘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서구에서 본격화된 복지국가 체제와 결합하며 195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의 '영광의 30년'을 견인했다. 기술 발전이 숙련 노동자에 대한 수요를 증대시켰고, 노동조합의 강력한 교섭력에 힘입어 생산성 향상의 과실이 임금 상승으로 이어지면서 불평등이 완화되고 중산층이 확대되었다.


그러나 1970년대를 기점으로 이 평등한 성장 모델은 도전에 직면했다. 생산성이 증가했지만 실질임금은 정체되었고, 노동소득분배율은 하락했다. 신자유주의적 이념에 입각한 시장중심적 기술관이 확산되었다. 주주가치 극대화를 명분으로 효율성 향상에 초점을 맞춘 경영 전략이 확산되었고, 노동절약적 기술 도입이 가속화되었다. 자본의 교섭력은 강화된 반면, 노동자의 협상력은 약화되었다.


디지털 혁명도 비슷한 양상을 보였다. 초기 해커들은 기술을 통해 인간을 해방시키고 권력의 탈중심화를 꿈꿨지만, 이러한 이상은 상업화 과정에서 자본의 논리에 포섭되었다. 디지털 기술이 자본에 의해 노동 통제의 수단으로 활용되는 경향이 강해졌다. 플랫폼 자본은 데이터와 알고리즘을 기반으로 시장 지배력을 강화하며 노동자의 협상력을 약화시켰다.


AI에 대한 그들의 전망도 낙관적이지 않다. 인공지능은 단순 노동의 자동화를 넘어 전문직 고숙련 노동마저 대체하며 기술실업에 대한 우려를 낳고 있다. AI는 효율성 제고를 명분으로 노동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는 수단으로 활용될 수 있다. AI 예술 생성 기술의 발전은 인간 노동의 창의적 영역마저 위협한다.


그렇다면 해법은 무엇인가? 아세모글루와 존슨은 무엇보다 기술변화의 방향성 자체를 규정하는 민주적 의사결정 체계의 구축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노동조합의 역할 강화, 정부-기업-시민사회 간 협력적 거버넌스 구축, 적극적인 시민 참여가 요구된다. 특히 노동의 권익을 보호하고 대변할 수 있는 집단적 역량을 제고함으로써 자본과 기술에 대한 견제와 균형을 모색해야 한다. 교육, 노동시장 정책, 사회안전망 확충을 포괄하는 종합적인 사회정책도 필요하다. 조세개혁 등을 통한 소득 재분배 강화도 제안한다.


첫 번째 한계: 재분배를 넘어 기술 설계로

아세모글루와 존슨의 역사적 사례들을 자세히 보면, 노동운동은 주로 기술 발전의 혜택을 재분배하는 데 기여했다. 생산성 밴드왜건이 작동하려면 노동조합의 교섭력이 필요했다는 그들의 주장은 설득력 있다. 하지만 노동운동이 기술 자체를 다르게 설계했다는 증거는 약하다. 포드의 컨베이어 벨트 시스템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노동자들은 더 높은 임금을 받았지만, 여전히 기계의 속도에 맞춰 반복 작업을 했다.


역사를 보면 기술을 근본적으로 바꾼 것은 다른 주체들이었다. 윌리엄 모리스의 예술공예운동은 인간 중심 디자인이라는 새로운 기술 패러다임을 창조했다. 메이커와 해커들은 개인용 컴퓨터라는 새로운 기술 체계를 만들었다. 오픈소스 개발자들은 새로운 생산 방식을 구축했다. 이것은 재분배가 아니라 기술의 설계 원리, 소유 구조, 통제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꾼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생산수단 자체가 바뀌었다는 점이다. 공장은 개인이 소유할 수 없었기에 집단 교섭이 필요했다. 하지만 PC, 인터넷, AI는 개인이 소유할 수 있다. 오픈소스 AI 모델은 개인 컴퓨터나 스마트폰에서 실행된다. 생산수단을 개인이 소유할 수 있다면, 집단 교섭을 통한 재분배만이 아닌 새로운 전략이 필요하다.


두 번째 한계: 새로운 주체와 새로운 권리

아세모글루와 존슨의 분석 틀은 자본과 노동이라는 전통적 이분법에 기반한다. 하지만 21세기에는 이 이분법으로 포착되지 않는 주체들이 등장하고 있다. 리누스 토르발스, 오픈소스 개발자, 유튜버, 패트리온 작가—이들은 생산수단을 소유하지만 자본가가 아니고, 창작 활동을 하지만 전통적 노동자가 아니다.


『권력과 진보』는 메이커와 해커들이 "상업화 과정에서 자본의 논리에 포섭되었다"라고 평가한다. 하지만 그들이 만든 유산—개인용 컴퓨터, 인터넷, 오픈소스—은 여전히 개인에게 권력을 준다. 더 주목할 것은 이런 시도들이 계속되고 있다는 점이다. 오픈소스 운동은 AI 분야로 확장되고 있고, 메타의 LLaMA, 스태빌리티 AI의 스테이블 디퓨전은 빅테크의 AI 독점에 균열을 내고 있다.


이런 창의 노동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더 높은 임금이나 강화된 복지가 아니다.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기술에 대한 접근권, 데이터 주권, 알고리즘 투명성, 플랫폼 독립성이다. 이것은 20세기 노동운동이 추구했던 것과는 다른 종류의 권리다.


결론: 정치경제학의 확장, 그리고 다음 질문

아세모글루와 존슨의 『권력과 진보』는 기술을 정치경제학의 대상으로 만든 중요한 기여를 했다. 특히 생산성 향상의 혜택이 사회 전반에 확산되려면 노동조합 같은 대항 권력이 필요하다는 그들의 통찰은 여전히 유효하다.


하지만 21세기 기술 정치경제학은 아세모글루와 존슨을 넘어서야 한다. 재분배를 넘어 기술 설계로 나아가야 한다. 생산수단을 개인이 소유할 수 있는 시대에는 새로운 전략이 필요하다. 자본과 노동이라는 이분법을 넘어, 생산수단을 소유하면서도 자본가가 아닌 새로운 주체들을 이해해야 한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떤 대안이 가능한가? 기술을 실제로 바꾼 역사적 사례들은 무엇이고, 현재 진행되는 시도들은 무엇인가? 다음 편에서는 이 질문에 답하며, 오픈소스, 해커 문화, 메이커 운동, 크리에이터 경제, 디지털 커먼즈, 데이터 주권 같은 다양한 움직임들이 어떻게 신군산복합체에 대응하고 있는지 살펴볼 것이다.



참고문헌

대런 아세모글루, 사이먼 존슨 (2023). 『권력과 진보』. 김승진 옮김. 생각의힘.

Mumford, L. (1967). The Myth of the Machine: Technics and Human Development. New York: Harcourt Brace Jovanovich.

모종린 (2024). 『크리에이터 소사이어티』. 김영사.

모종린 (2025). 『제3의 응전』. 21세기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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