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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운동의 정치경제학

by 골목길 경제학자

문화운동의 정치경제학


신군산복합체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2편에서는 권력을 의심하고 설명을 요구하며 민주적 통제를 주장하는 민주 시민의 기술 철학, 3편에서는 기술 편익 분배에서 노동운동의 역할을 살펴보았다.


하지만 개인의 철학과 노동운동만으로는 부족하다. 21세기에는 자본과 노동이라는 이분법으로 포착되지 않는 새로운 주체들이 등장하고 있다. 그 새로운 주체 중 하나가 바로 문화운동이다.


문화와 문화운동은 STS(과학기술학) 문헌에서 논의되어 왔다. 정치경제학에서도 문화를 다뤄왔지만, 주로 부르디외의 문화자본론처럼 계급 재생산의 메커니즘으로, 혹은 문화산업론처럼 자본주의 체제 내 상품으로 분석했다. 문화의 세계화를 다룬 문헌들도 주로 문화제국주의나 맥도날드화 같은 지배 구조에 집중했다.


하지만 기술 변화에 대응하는 능동적 행위자로서의 문화운동은 상대적으로 덜 다뤄졌다. 특히 문화운동이 어떻게 기술의 설계 자체를 바꾸는지, 즉 기술의 정치경제학에서 문화운동의 역할은 체계적으로 분석되지 않았다.


21세기에는 문화와 문화운동이 더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 근거는 역사다. 거대기술이 등장할 때마다, 문화운동은 대안을 제시하고 실현해 왔다.


역사적 순환표: 세 번의 응전

기술과 권력의 결합에 맞선 저항은 오늘 처음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역사는 명확한 패턴을 보여준다. 거대기술이 인간의 본성을 위협할 때마다, 문화운동은 대안적 유토피아를 제시하며 응전해 왔다.


제1의 응전 (1850-1920): 장인성의 회복

산업혁명 기술이 장인 노동을 파괴했다. 대량생산이 수공예 기술과 개별 창작을 대체하면서, 장인의 숙련과 창작의 기쁨이 사라졌다.


윌리엄 모리스의 예술공예운동이 응답했다. "모든 사람이 예술가가 될 것"이라는 비전 아래, 수공예품과 예술작품을 통한 지역 공동체 기반 경제를 실험했다. 이것은 단순한 낭만적 후퇴가 아니었다. 아르티장 유토피아는 현대 디자인의 기초를 확립했다. 기능과 미학의 통합, 장인정신의 가치, 인간 중심 제작 과정—오늘날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이 개념들은 모두 제1의 응전에서 탄생했다.


제2의 응전 (1960-1990): 자율성의 회복

군산복합체의 기술이 개인 자율성을 억압했다. 메인프레임 컴퓨터와 중앙집중 시스템이 정보를 독점하고, 접근과 소통의 자유를 제한했다.


히피와 해커들의 대항문화운동이 응답했다. PC와 인터넷으로 "개인을 해방하고 연결하는 기술"을 구현했다. 스티브 잡스는 "사람들에게 힘을 주는 도구"를 만들겠다고 했다. 디지털 유토피아는 인터넷 민주화를 실현했다. 누구나 정보에 접근하고, 의견을 표현하며, 전 세계와 연결될 수 있게 되었다.


제3의 응전 (2010-현재): 창의성의 회복

빅테크와 AI가 창의성을 대체하고 있다. 플랫폼 알고리즘이 창작 과정을 통제하고, AI가 인지노동과 창작 영역을 침범한다. 이것은 단순한 일자리 문제가 아니다. 인간 존재의 핵심—창조하는 능력 자체—에 대한 위협이다.


제3의 응전은 현재 진행형이다. 크리에이터 유토피아는 협업 플랫폼 구축을 목표로 한다. 하지만 제1, 2의 응전과 달리, 제3의 응전은 훨씬 복잡한 구조를 필요로 한다.


제3의 응전의 특징: 다층적 문화운동의 융합

과거 응전들이 단일한 기술적 대안(수공예품, PC)으로 대응했다면, 제3의 응전은 여러 문화운동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며 서로 연결되는 특징을 보인다. 각 운동은 독립적으로 작동하지만, 모두 하나의 방향—개인의 자율성과 통제권 회복—을 향해 수렴하고 있다.


오픈소스 운동: 코드의 민주화

리눅스, 파이썬, 안드로이드로 대표되는 오픈소스 운동은 소프트웨어 코드를 공유 자산으로 만들었다. 소수 기업이 독점하던 기술을 누구나 접근하고, 수정하고, 재배포할 수 있게 함으로써 기술 권력의 분산을 실현했다. 최근에는 AI 분야에서도 메타의 LLaMA, 스태빌리티 AI의 스테이블 디퓨전 같은 오픈소스 모델들이 등장하면서, 빅테크의 AI 독점에 균열을 내고 있다.


오픈소스의 핵심은 투명성과 집단지성이다. 코드가 공개되면 누구나 검증할 수 있고, 전 세계 개발자들이 협력해 개선할 수 있다. 이것은 블랙박스로 작동하는 독점 기술에 대한 직접적 대안이다.


해커 문화: 기술 주권의 실천

여기서 해커는 범죄자가 아니라 기술을 창조적으로 재해석하는 문화 실천가들을 말한다. 1960년대 MIT 해커들부터 현재의 화이트햇 해커, 시빅 해커들까지, 이들은 기술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이해하고, 그것을 사용자 중심으로 재설계하려 한다.


해커 문화가 강조하는 것은 '기술 문해력(technological literacy)'과 '수정할 권리(right to repair)'다. 애플의 폐쇄적 생태계에 맞서 아이폰 수리권을 요구하는 운동, 존 디어 트랙터의 소프트웨어를 농부들이 직접 수정할 권리를 주장하는 운동이 그 예다. 기술을 블랙박스로 남겨두지 않고, 사용자가 이해하고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핵심이다.


메이커 운동: 제작 도구의 민주화

3D 프린터, 레이저 커터, CNC 같은 디지털 제작 도구가 저렴해지면서, 소수 공장만이 할 수 있던 생산을 개인이 할 수 있게 되었다. 전 세계 2,500개 이상의 팹랩(Fab Lab)과 메이커스페이스는 누구나 제작자가 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한다.


메이커 운동은 물리적 세계에서 제1의 응전(장인운동)을 재현하고 있다. 하지만 수공예로의 회귀가 아니라, 디지털 도구를 활용한 새로운 형태의 개인 제작이다. 오픈소스 하드웨어(아두이노, 라즈베리 파이)와 결합하면서,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의 경계를 넘나드는 창작이 가능해졌다.


크리에이터 경제: 창작의 경제적 자립

유튜버, 팟캐스터, 서브스택 작가, 인디게임 개발자—크리에이터 경제는 창작 활동을 생계 수단으로 만든다. 패트리온, 코파이, 크리에이터링크 같은 플랫폼들은 크리에이터가 대형 플랫폼에 종속되지 않고 팬들과 직접 관계를 맺으며 수익을 창출할 수 있게 한다.


크리에이터 경제의 의미는 단순히 새로운 일자리가 아니다. 노동과 창작의 경계가 무너지고, 누구나 자신의 개성과 전문성을 콘텐츠로 전환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산업혁명 이후 분리되었던 '일하는 사람'과 '창조하는 사람'의 재통합이다.


디지털 커먼즈: 지식의 공유 자원화

위키피디아,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아카이브닷오알지(Archive.org)로 대표되는 디지털 커먼즈 운동은 지식과 문화를 공유 자원으로 만든다. 지식에 대한 접근을 자본이나 권력이 아닌, 인류 공동의 자산으로 보는 관점이다.


디지털 커먼즈는 정보의 사유화와 독점에 맞선다. 학술논문을 무료로 공개하는 오픈 액세스 운동, 의약품 특허에 맞서는 오픈소스 의약품 운동도 같은 맥락이다. AI 시대에는 학습 데이터와 모델 자체를 커먼즈로 만들려는 시도들이 등장하고 있다.


데이터 주권 운동: 내 데이터는 내 것

GDPR(유럽 일반 데이터 보호법)로 제도화된 데이터 주권 개념은 개인이 자신의 데이터에 대한 통제권을 가져야 한다는 주장이다. 빅테크 플랫폼들이 사용자 데이터를 무단으로 수집하고 AI 학습에 활용하는 것에 맞서, 개인이 데이터의 수집, 사용, 삭제를 통제할 권리를 요구한다.


데이터 협동조합, 개인 데이터 저장소(Personal Data Store) 같은 실험들도 등장하고 있다. 데이터를 플랫폼이 아닌 개인이 소유하고, 필요할 때만 선택적으로 공유하는 구조다. 블록체인 기반 자기주권신원(Self-Sovereign Identity) 시스템도 같은 방향이다.


모든 운동의 수렴점: 개인 소유 AI

이 모든 문화운동들이 하나의 방향으로 수렴하고 있다. 바로 개인 소유 AI(Personal AI)다. 오픈소스는 AI 모델을 공개한다. 해커 문화는 AI를 이해하고 수정할 권리를 주장한다. 메이커 운동은 로컬에서 실행 가능한 AI 하드웨어를 만든다. 크리에이터들은 AI를 자신의 창작 파트너로 활용한다. 디지털 커먼즈는 학습 데이터를 공유 자원으로 만든다. 데이터 주권 운동은 개인 데이터로 학습된 AI가 개인에게 속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개인 소유 AI란 무엇인가? 클라우드에서만 작동하는 거대 모델이 아니라, 개인의 기기에서 실행되고, 개인의 데이터로만 학습하며, 개인이 완전히 통제할 수 있는 AI다. 이미 기술적으로 가능해지고 있다. 라마(LLaMA) 같은 소형 오픈소스 모델은 개인 컴퓨터나 스마트폰에서도 실행된다. 애플의 온디바이스(On-Device) AI 전략도 같은 방향이다.


왜 개인 소유 AI가 제3의 응전의 궁극적 목표인가? 첫째, AI가 21세기 핵심 생산수단이기 때문이다. 산업혁명 시대 생산수단은 공장이었다. 정보혁명 시대는 PC와 인터넷이었다. AI 시대 생산수단은 AI 자체다. 누가 AI를 소유하고 통제하느냐가 권력 구조를 결정한다.


둘째, 개인 소유 AI는 자율성, 투명성, 프라이버시를 동시에 실현하기 때문이다. 내 데이터가 클라우드로 전송되지 않고, 내 기기에서만 처리된다. AI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나는 알 수 있고, 필요하면 수정할 수 있다. 빅테크의 감시와 통제에서 벗어날 수 있다.


셋째, 개인 소유 AI는 창의성을 극대화하기 때문이다. 모두가 같은 거대 모델을 쓰면 결과도 비슷해진다. 하지만 개인 소유 AI는 나의 데이터, 나의 선호, 나의 창작 스타일로 학습된다. 진정한 의미의 '나만의 AI 파트너'가 된다.


물론 아직 과제가 많다. 개인 소유 AI를 실행할 하드웨어 비용, 오픈소스 모델의 성능 격차, 일반 사용자를 위한 인터페이스, 그리고 개인 소유 AI 간의 상호운용성과 학습 데이터의 질적 한계 등이다. 하지만 방향은 분명해 보인다. 적어도 이 글에서 다룬 문화운동들은 개인에게 기술 권력을 되돌려주려는 노력이고, 그 구체적 형태 중 하나가 개인 소유 AI다.


제3의 응전은 이제 막 시작되었다. 오픈소스 개발자, 해커, 메이커, 크리에이터, 데이터 권리 활동가들이 각자의 영역에서 실험하고 있다. 이들의 노력이 모여 신군산복합체에 맞서는 실질적 대안—개인이 기술을 소유하고 통제하는 미래—을 만들어갈 것이다.


결론: 문화운동의 정치경제학—새로운 지평

역사는 명확한 교훈을 준다. 거대기술이 인간의 본질을 위협할 때마다, 문화운동은 대안을 제시하고 실현해 왔다. 장인성, 자율성, 창의성—각 시대마다 지켜야 할 핵심 가치는 달랐지만, 패턴은 같았다. 집중화에 대한 분산화, 독점에 대한 자율, 통제에 대한 창조.


제3의 응전은 아직 진행 중이다. 그런데 정작 정치경제학은 이 문화운동들을 거의 다루지 않았다. 마르크스주의는 계급투쟁에, 신자유주의는 시장과 제도에, 공공선택이론은 이익집단 경쟁에 집중했다. 문화운동은 주변적 현상으로 취급되었다.


하지만 지금 일어나고 있는 가장 중요한 정치경제적 변화—신군산복합체의 형성과 그에 대한 대응—는 바로 문화운동을 통해 진행되고 있다. 오픈소스, 해커, 메이커, 크리에이터, 커먼즈, 데이터 주권 운동이 신군산복합체와 복잡하게 얽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21세기 권력 구조를 형성하고 있다.


21세기 정치경제학의 새로운 과제는 이 동학을 분석하는 것이다. 어떤 조건에서 문화운동이 신군산복합체를 제약하는가? 반대로 어떻게 포섭되거나 무력화되는가? 개인 소유 AI 같은 대안 기술이 실제로 권력 구조를 바꿀 수 있는가?


이것은 기술 분석만으로도, 문화 연구만으로도, 경제학만으로도 답할 수 없다. 기술, 자본, 국가, 문화가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 통합적으로 봐야 한다. 문화운동의 정치경제학—이것이 21세기를 이해하는 정치경제학의 새로운 지평이다.


참고문헌

Mokyr, Joel (1997). "The Political Economy of Technological Change: Resistance and Innovation in Economic History." Working Paper, Department of Economics, Northwestern University.

Mumford, L. (1967). The Myth of the Machine: Technics and Human Development. New York: Harcourt Brace Jovanovich.

대런 아세모글루, 사이먼 존슨 (2023). 『권력과 진보』. 김승진 옮김. 생각의힘.

모종린 (2024). 『크리에이터 소사이어티』. 김영사.

모종린 (2025). 『제3의 응전』. 21세기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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