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산업정책의 정치경제학

by 골목길 경제학자

산업정책의 정치경제학


산업정책: 가장 오래된 논쟁

기술과 관련된 가장 중요한 정치경제학 주제는 산업정책이다. 산업 형성과 성장에 정부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 이 논쟁은 정치경제학만큼이나 오래되었다.


실제로 17세기 이후 많은 국가가 산업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해 왔다. 17세기 프랑스 재무장관 콜베르는 제조업 육성을 위해 보조금과 독점권을 부여했다. 알렉산더 해밀턴은 1791년 『제조업에 관한 보고서』에서 신생 미국의 산업 보호를 주장했다. 알렉산더 거센크론(Alexander Gerschenkron)은 후발국일수록 국가의 역할이 커진다는 이론을 제시했다.


20세기 후반, 동아시아 개발국가들이 이를 입증했다. 일본의 MITI, 한국의 경제기획원, 대만의 산업기술연구

원은 반도체, 자동차, 조선 산업을 세계 최고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1980년대 제임스 팰로스(James Fallows), 로버트 라이쉬(Robert Reich), 클라이드 프레스토위츠(Clyde Prestowitz) 같은 미국 지식인들은 일본 모델을 배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의 공통점은 명확했다. 민간 산업의 국제 경쟁력 강화가 목표였다. 경제 성장, 중산층 일자리, 국민 삶의 질 향상—이것이 산업정책의 정당화 논리였다.


트럼프 시대: 산업정책의 부활

2016년 트럼프 당선은 미국 산업정책의 전환점이었다. 40년간 지배했던 신자유주의적 자유무역 컨센서스가 무너졌다. 바이든은 CHIPS Act와 인플레이션 감축법으로 반도체와 청정에너지 산업을 육성했다. 트럼프 2기는 관세와 리쇼어링으로 제조업 부활을 약속한다.


좌파와 우파가 산업정책에서 만났다. 마리아나 마추카토는 『기업가형 국가』에서 정부가 혁신의 핵심 동력이었다고 주장한다. 인터넷, GPS, 터치스크린—모두 정부 투자의 산물이다. 우파는 중국 견제를 명분으로 전략 산업 지원을 지지한다.


그러나 이런 산업정책의 부활 속에서, 전혀 다른 방향의 주장이 등장했다. 미국 정보기관과 군에 데이터 분석 플랫폼을 제공하는 팔란티어의 CEO 알렉스 카프가 주장하는 기술공화국(The Technological Republic)론이다.


Karp의 주장: 군산복합체의 재건

카프의 문제의식은 명확하다. 실리콘밸리는 사진 공유 앱, 농장 게임, 광고 기술 등 피상적 소비자 중심의 혁신에 갇혀 있다. 뛰어난 엔지니어들이 "광고 배치를 최적화하는 알고리즘"을 만드는 데 재능을 낭비하고 있다는 것이다.


1950~60년대 모델: 잃어버린 황금기

카프가 그리는 이상은 1950~60년대다. 당시 과학자와 엔지니어들은 정부와 긴밀히 협력했다. J.C.R. 리클라이더는 1962년 국방부 산하 DARPA에 합류해 현대 인터넷의 전신을 만들었다. 그의 1960년 논문 "인간-컴퓨터 공생"은 미 공군의 지원을 받았다. 핵무기와 우주 프로그램이 미국인들을 하나로 묶었다. 과학자들은 사막에 모여 세계를 바꿀 문제를 풀었다. 그들은 돈이 아니라 사명감으로 움직였다.


이 시기 실리콘밸리는 "현대적 예술가 집단, 또는 기술적 공동체"였다. 정치 지도자와 과학자 사이에는 긴밀함과 상당한 신뢰가 있었다. 연방 정부의 기술 개발 지원은 재정적이었을 뿐 아니라, 공동체 전체를 결속시키는 정신적 투자였다.


1960~70년대 반문화: 단절의 시작

하지만 이 관계는 무너졌다. 카프는 1960~70년대 반문화 운동이 전환점이었다고 본다. 실리콘밸리는 국방과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2018년 구글 직원들이 미 국방부의 드론 분석 AI 사업 '프로젝트 메이븐' 참여를 거부한 사건이 상징적이다. 카프는 이를 "원칙 있는 평화주의가 아니라 부르주아 안락함에 대한 집착"이라 비난했다. 팔란티어가 그 계약을 따냈다.


기술공화국의 비전

카프가 말하는 "기술공화국"은 단순히 군사력 확대가 아니다. 그것은 범죄, 교육, 복지 등 국가의 집단적 문제 해결 능력을 회복하려는 시도다.


국가가 명확한 목표를 제시하고, 민간이 이를 기술로 구현한다. 카프는 이 과정을 "엔지니어링 된 공화주의"라고 부른다. 그에게 기술은 단순한 시장재가 아니라, 시민적 공동목표를 실현하는 도구다.


AI 군비경쟁: 새로운 맨해튼 프로젝트

카프에게 가장 시급한 과제는 중국·러시아·이란과의 AI 군비경쟁이다. 원자폭탄이 냉전 시대의 지정학적 질서를 정의했듯, AI가 21세기를 정의할 것이다. "새로운 세대의 자율무기에 AI가 접목될 것인가가 아니라, 누가 어떤 목적으로 만들 것인가가 문제다."


이것은 기술적 도전일 뿐 아니라 문명적 도전이다. 국가 안보 프로젝트는 엔지니어들에게 의미 있는 도전을 주고, 국가 자긍심을 고양한다. 전쟁 준비—정확히는 AI 군비경쟁 준비—가 미국인들을 하나로 묶는다.


전례 없는 주장

문제는 카프가 명시적으로 군산복합체를 지지한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의외인 이유는 세 가지다.


첫째, 미국 방위산업은 이미 세계 최대 규모다. 군수산업의 "부족"이 미국의 문제라고 보기 어렵다. 더욱이 트럼프 행정부는 현재 국가안보를 명분으로 모든 산업과 무역정책을 재편하고 있다. 안보가 이미 최우선 가치가 된 상황에서 방위산업의 추가 확대를 주장하는 것은 시의성이 의문스럽다.


둘째, 방위산업의 산업정책 논쟁 참여는 전례가 없다. 1980년대 산업정책 논쟁에서 팰로스와 동료들이 요구한 것은 일본 MITI 같은 민간 산업 육성이었다. 반도체, 자동차, 철강—경쟁력 있는 제조업으로 미래를 주도하고 중산층 일자리를 만들자는 것이었다. 록히드 마틴이나 보잉 같은 방위산업체는 이 논쟁에 참여하지 않았다. 군사 기술을 국가 정체성의 핵심이나 산업정책의 모델로 제시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더욱이 방위산업체가 대중적 지지를 구할 이유도 불분명하다. 전통적으로 이들은 조용히 사업을 추진해 왔다. B2B 비즈니스로서 대중의 관심 없이도 안정적 수익을 올렸다. 그런데 팔란티어는 B2C 기업처럼 팬덤과 대중적 인기를 추구한다. 왜 굳이 기업 철학을 베스트셀러로 홍보하는가? 이는 방위산업의 전통적 행태와 다르다.


셋째, 군산복합체라는 용어 선택이다. 군산복합체는 60년간 부정적 용어였다. 아이젠하워는 1961년 고별 연설에서 "군산복합체가 부당한 영향력을 얻지 못하도록 경계하라"라고 경고했다. 이후 좌파는 베트남 전쟁과 제국주의를, 우파는 정부 비대화와 재정 적자를 비판했다. 좌우 모두가 부정적으로 본 이 용어를 굳이 긍정적으로 재포장할 이유가 있는가? 권위주의나 전쟁 선호 기업이라는 인상을 자초하는 것 아닌가?


이 세 가지 의문은 더 근본적인 질문으로 이어진다. 카프가 제시하는 산업정책은 과연 무엇을 위한 것인가? 전통적 산업정책은 경제성장과 산업경쟁력을 목표로 했다. 정부는 민간 산업을 지원하고, 기술혁신을 촉진하며, 중산층 일자리를 창출했다. 콜베르의 제조업 육성, 동아시아 개발국가의 수출주도 성장, CHIPS Act의 반도체 경쟁력—모두 궁극적으로 국민의 경제적 번영을 지향했다.


카프의 산업정책은 다르다. 그는 안보와 국가 정체성의 회복을 중심에 둔다. 기술을 시장의 수단이 아니라 국가적 결속의 도구로 본다. 산업정책의 목표를 '경제적 번영'에서 '문명적 재건'으로 이동시킨다. 이것이 카프의 기술공화국이 역사상 모든 산업정책과 결정적으로 다른 이유다.


이념적 기반: 테크노크라시와 전쟁

카프의 주장은 세 가지 오래된 이념의 혼합이다.


첫째, 1930년대 미국 테크노크라시 운동이다. 대공황 시기, 하워드 스콧 같은 엔지니어들은 정치인을 제거하고 과학적 관리로 사회를 운영하자고 했다. 위기 담론, 전문가 통치, 효율성 숭배—패턴은 같다. 차이는 후원자다. 1930년대 테크노크라시는 노동운동에 가까웠다. 카프의 테크노크라시는 국방부에 가깝다.


둘째, 네오콘(신보수주의) 이념이다. 루이스-크라우스는 카프가 인용하는 것이 앨런 블룸, 로저 스크루턴, 레오 스트라우스 같은 보수주의 철학자들뿐이라고 지적한다. 이들은 서구 문명의 우월성과 미국의 세계적 리더십을 강조했다. 특히 네오콘은 민주주의 확산을 위해 군사력 사용을 정당화하고, 국가 안보를 통한 국내 결속을 추구했다.


카프의 공동창업자 피터 틸 역시 네오콘적 성향을 보인다. 틸은 "민주주의와 자유는 양립할 수 없다"라고 말했으며, 강력한 행정부와 기술 엘리트의 역할을 강조해 왔다. 팔란티어는 이라크 전쟁 이후 국방부·정보기관과 긴밀히 협력하며 성장했다. 카프가 말하는 "문명적 재건"과 "서구의 미래"는 전형적인 네오콘 수사다.


셋째, 전쟁의 사회적 기능에 대한 믿음이다. 루이스-크라우스는 윌리엄 제임스가 1910년 「전쟁의 도덕적 등가물」에서 전쟁을 "사회를 응집시키는 피 묻은 유모"로 인정했지만, 대안도 제시했다고 설명한다. 젊은이들이 댐을 짓고 고층건물을 세우는 국가 봉사로 전쟁의 덕목을 배양하자는 것이었다.


루이스-크라우스는 존 듀이의 사례도 든다. 듀이는 1차 세계대전을 지지했다가 후회했다. 전쟁이 사회 개혁도 가져올 것이라 믿었지만, 실제로는 대량 살상과 시민 자유 억압만 가져왔다. 그의 제자 랜돌프 본은 경고했다. "전쟁은 국가의 건강이다"—권력을 키우는 것 외에는.


루이스-크라우스에 따르면, 카프는 듀이의 실수를 반복한다. 그는 순환논리에 빠져 있다. 국가 안보가 국가 자긍심을 고취해야 한다고 하지만, 국가 자긍심이 국가 안보의 전제라고도 한다. 전쟁 준비가 목적이자 수단이다. 네오콘이 이라크 전쟁으로 민주주의를 확산시키려다 실패했듯, 카프 역시 AI 군비경쟁으로 "두 마리 새를 한 돌로" 잡으려 한다—국가 안보와 문명적 결속을.


기술공화국의 모순: 민주주의와 테크노크라시

그럼에도 카프의 비전은 단순한 권위주의적 회귀로만 볼 수는 없다. 그는 일론 머스크식 강압적 경영을 비판하며, 팔란티어 내부의 ‘5Why 시스템’을 통해 의사결정의 투명성과 토론 문화를 강조한다. 그에게 ‘공화국’은 특정 권력의 집중이 아니라, 기술자 공동체가 책임의식을 가지고 공공 문제에 참여하는 체제를 의미한다.


카프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기술공화국은 권위주의 논쟁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첫째, 강력한 산업정책은 언제나 일정한 권위주의를 동반했다. 1960~80년대 동아시아 개발국가가 그랬듯, 산업의 고도화를 위해 정부가 시장을 지휘하고 민간을 조정하는 방식은 본질적으로 민주적 절차와 긴장을 빚는다.


둘째, 카프가 말하는 문명적 기술공화국은 기존의 개발국가보다 오히려 더 권위주의적 위험을 내포한다. 과거의 산업정책이 경제성장이라는 구체적 성과를 목표로 했다면, 기술공화국도 국가 안보와 공공 안전 같은 구체적 목표를 제시한다. 하지만 카프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그는 이를 넘어 국가 정체성 회복과 문명적 결속이라는 추상적 가치를 진짜 목표로 삼는다. 안보와 안전은 수단이고, 진짜 목적은 “미국인의 영혼을 고양”하는 것이다. 목표가 이렇게 형이상학적으로 확장될수록, 그 정당성은 시민이 아니라 기술 엘리트의 판단과 설계 능력에 의존하게 된다.


이 변화는 산업정책의 내용뿐 아니라 추진 방식 자체를 바꾸어 놓는다. 개발국가의 주체가 관료 엘리트였다면, 기술공화국의 주체는 데이터와 알고리즘을 다루는 기술 엘리트다. 산업정책의 중심이 행정적 조정에서 기술적 설계로, 정책적 목표가 경제성장에서 정보 통제와 기술적 통합으로 이동한다. 이 과정에서 정책의 투명성은 줄고, 기술 전문성에 대한 맹신이 커진다.


결국 카프의 기술공화국 제안은 산업정책을 경제의 영역에서 정치의 영역으로, 그리고 관료 권력에서 기술 권력으로 이동시키려는 시도다. 이것이 바로 카프가 21세기 산업정책의 정치경제학에 던진 가장 근본적인 도전이다.



참고문헌

Karp, A. C., & Zamiska, N. W. (2025). The Technological Republic: Hard Power, Soft Belief, and the Future of the West. Palantir Technologies.
Lewis-Kraus, G. (2025, February 19). The Palantir Guide to Saving America’s Soul. The New Yorker.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문화운동의 정치경제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