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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문단지, 금리단길 그리고 황리단길

by 골목길 경제학자

보문단지, 금리단길 그리고 황리단길


APEC이 보여준 소도시 상권의 명암

다음 주 경주를 방문하려 한다. 경주 단풍이 절정을 이룰 시기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APEC 전후 경주의 변화를 직접 관찰하고 싶기 때문이다.


2024년 APEC 공식 회의는 보문관광단지에서 열렸다. 경주 시내에서 6킬로미터 떨어진 전형적인 리조트형 단지다. 공식 회의에 참석한 외국 귀빈들은 회의만 하지 않는다. 여가 시간에 회의 개최 도시를 탐방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번 APEC도 예외가 아니었다. 많은 참석자들이 경주 곳곳을 둘러봤고, 언론 보도에 따르면 정상급 인사들을 포함한 상당수가 황리단길을 찾았다고 한다.


도시에 관심이 있다면 자연스럽게 이런 질문을 하게 된다. 왜 보문단지도, 금리단길도 아닌 황리단길이었을까?


보문단지의 한계: 인공성의 벽

먼저 보문단지를 살펴보자. 보문단지는 한국 리조트 중에서도 예외적으로 잘 조성된 곳이다. 상업시설, 문화시설, 보행환경 모두 수준급이다. 하지만 로컬 문화를 경험하고 싶은 여행자를 만족시키기에는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 기본적으로 인공 시설이기 때문이다.


더 큰 문제는 보문단지가 경주라는 도시와 분리되어 있다는 점이다. 1970년대 관광단지 개발 방식, 즉 '관광객을 한 곳에 모아 효율적으로 관리한다'는 발상의 산물이다. APEC 행사 기간에도 방문객 동선을 제한하면서 자연스러운 도시 분위기를 만들지 못했다. 결국 보문단지는 '경주다운 경주'를 경험하고 싶은 방문객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없었다.


금리단길의 쇠락: 잊힌 중심

그렇다면 전통적인 경주 도심인 금리단길은 어떨까? 금리단길은 2024년경 경주시가 기존 로데오거리를 황리단길과 연결하기 위해 새롭게 명명한 이름이다. 황리단길과 불과 몇 백 미터밖에 떨어져 있지 않지만, 황리단길이 방문객으로 붐비는 동안 금리단길은 여전히 쇠락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APEC 기간에도 주목받지 못했다.


금리단길의 쇠락은 1990년대 후반부터 시작됐다. IMF 외환위기 이후 지역 경제가 침체되면서 명동, 로데오거리로 불리던 중심가는 활력을 잃어갔다. 2000년대 중반 아웃도어 붐이 일면서 잠깐 숨통이 트이는 듯했다. 전국 소도시 중심상권이 노스페이스, 밀레, 코오롱스포츠 매장으로 채워지던 시기였다. 하지만 이는 일시적 현상에 불과했다.


아웃도어 매장들은 브랜드 이미지 관리 차원에서 프랜차이즈 형태로 운영됐고, 지역 상인들의 자생적 생태계를 만들지 못했다. 온라인 쇼핑이 확대되면서 이들 매장도 하나둘 철수했다. 남은 것은 빈 점포와 노후화된 건물들뿐이었다. 금리단길은 이름만 바꾸었을 뿐, 구조적 문제는 해결하지 못했다.


황리단길의 성공: 자생적 골목 문화

반면 황리단길은 어떻게 성공했을까? 황리단길은 기획된 상권이 아니다. 자생적으로 형성된 골목상권이다. 2010년대 중반부터 낮은 임대료를 찾아 젊은 창업자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한옥과 오래된 주택들이 섞여 있는 골목길, 대형 프랜차이즈가 들어올 수 없는 좁은 도로, 그리고 황남동이라는 지역 정체성이 결합하면서 독특한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황리단길의 성공 요인은 세 가지다. 첫째, 진정성이다. 대형 자본이 아닌 개인 창업자들이 자신의 취향과 철학을 담은 공간을 만들었다. 둘째, 규모의 적정성이다. 골목 구조가 대형 프랜차이즈의 진입을 자연스럽게 막아주면서 고유한 색깔을 유지할 수 있었다. 셋째, 지역성이다. 천년 고도 경주의 역사적 맥락 속에서 현대적 감각이 조화를 이뤘다.


APEC 참석자들이 황리단길을 찾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들이 원한 것은 한국의, 경주의 '진짜' 모습이었다. 보문단지의 호텔도 아니고, 금리단길의 프랜차이즈도 아닌, 골목에서 만나는 살아있는 도시 문화였다.


소도시는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

이번 APEC은 지방 소도시가 공통적으로 직면한 문제를 다시 한번 부각했다. 지역소멸과 소도시 소멸을 진정으로 우려한다면 피할 수 없는 질문이다. 지역의 상권을 어떻게 재생할 것인가?


경주는 운이 좋았다. 황리단길이 자연스럽게 형성됐다. 하지만 그런 문화와 도시 인프라를 가진 소도시는 많지 않다. 대부분의 소도시는 황리단길 같은 새로운 골목상권을 발굴하기보다, 금리단길 같은 기존 중심상권을 재생하는 수밖에 없다.


중심상권 재생은 단순히 외관을 정비하거나 브랜드를 만드는 것이 아니다. 젊은 창업자들이 감당할 수 있는 임대료 구조, 대형 자본의 무분별한 진입을 막는 제도적 장치, 그리고 지역 정체성을 담을 수 있는 공간 전략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주거 인구를 유지하는 것이 핵심이다. 상권만 있고 사람이 살지 않는 공간은 결국 텅 비게 된다.


또 다른 재생 대상지는 보문단지와 같은 교외 신도시와 단지다. 지난번 다룬 도쿄 후타코다마가와 사례가 보여주듯이, 관건은 신도시의 도시력 회복이다. 보행환경 중심의 건축환경과 직주락 근접을 유도하면서 신도시와 단지를 재생해야 한다. 보문단지의 경우, 현재 상황에서는 주거 기능 투입이 불가피하다. 단지 내 일부 지역을 주거지역으로 전환하는 것이 더 이상의 쇠락을 막는 방법이다.


보문단지, 금리단길, 황리단길. 이 세 공간은 한국 지방 소도시가 직면한 선택지를 상징한다. 인공적 관광 거점을 만들 것인가, 쇠락하는 중심상권을 방치할 것인가, 아니면 자생적 도시 문화를 키울 것인가. 이번 APEC은 그 답이 어디에 있는지 분명히 보여줬다. 사람들은 진짜 도시를, 살아있는 거리를 원한다. 시간이 많이 남아있지 않다. 더 늦기 전에 도시력 회복을 지역소멸 대응의 중심에 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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