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한 사람은 왜 멈추지 못하는가
젠슨 황이 한국에 왔을 때 우리는 환호했다. 26만 장의 GPU, 삼성·현대와의 만남. 그런데 한 기업 CEO가 국가별로 전략 자원을 배분하는 장면을 보며 누군가 물었어야 했다. “당신은 기업인인가, 외교관인가?”
우리는 묻지 않았다. 오히려 박수쳤다.
미국은 달랐다. 트럼프는 즉각 반응했다. “GPU는 아무나 못 준다.” 민간 기업 CEO가 전략 자원 배분을 결정하는 것을 용인하지 않았다. 정치가 경제를 견제한 것이다. 젠슨 황의 ‘월권’을 허용하지 않은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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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힌 원칙
자유사회에는 단순한 원칙이 있다.
직업은 경계를 갖는다.
기업가는 이윤을, 정치인은 권력을, 학자는 진리를 추구한다.
각 영역은 그 나름의 ‘소명(Beruf)’과 윤리를 지닌다.
막스 베버는 『직업으로서의 정치』에서 말했다.
“권력의 열정이 아니라 절제의 의지가 정치인을 만든다.”
그에게 직업윤리는 단순한 근면의 덕목이 아니었다.
자신의 영역을 지키고, 타인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 윤리,
즉 성공을 자제하는 능력이었다.
한 영역의 성공이 다른 영역의 지배로 전환되는 순간, 균형은 무너진다.
그것이 전제(專制)의 출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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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권을 찬양하는 시대
실리콘밸리의 CEO들은 기술로 부를 만들었다. 훌륭한 성취다.
그러나 그들은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알고리즘으로 사회 담론을 설계하고, 플랫폼으로 정치 권력을 행사하며, 방위산업에 진출한다.
우리는 이것을 “혁신가의 영향력”이라 부르며 박수친다.
정치인은 권력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퇴임 후 기업 고문이 되고, 강연료로 부를 축적하며, 자녀에게 인맥을 물려준다.
우리는 이것을 “경륜의 활용”이라 포장한다.
학자와 전문가도 마찬가지다.
지식은 권위로, 권위는 창업과 기업 취업으로 전환된다.
우리는 이것을 “전문성의 시장화”라며 당연시한다.
이것이 바로 '월권(越權)'이다.
법적으로는 문제없지만, 사회가 유지해야 할 윤리적 규율을 어기는 일이다.
왜 우리는 월권을 방관하는가?
성공을 숭배하기 때문이다.
한 영역에서 성공한 사람은 다른 영역에서도 성공할 자격이 있다고 믿는다.
우리는 균형 파괴를 능력으로 착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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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의 자제 원칙은 제도로 이어진다
베버가 말한 책임윤리(Verantwortungsethik)는
단지 개인의 내면적 절제가 아니라, 사회적 제도 질서의 토대다.
그는 정치·경제·학문을 각각의 독립된 윤리 영역으로 보았다.
이들 사이의 경계가 무너질 때, 민주주의는 타락한다고 경고했다.
자유주의 사회는 이미 이런 경계의 원칙 위에 서 있다.
정경분리는 정치 권력이 경제를 직접 통제하지 못하게 하고,
경제력 또한 정치 권력을 매수하지 못하게 한다.
학문의 독립성은 지식이 권력과 자본의 도구로 전락하지 않도록 막는다.
그러나 우리는 영역 ‘내부’의 분산에만 신경 썼다.
경제에서는 반독점법으로, 정치에서는 삼권분립으로 권력 집중을 견제했다.
하지만 영역 ‘간’의 균형은 방치했다.
그 결과, 엔비디아는 기업이지만 외교관처럼 행동하고,
정치인은 기업인처럼, 학자는 마케터처럼 행동한다.
자유의 균형은 경계의 붕괴와 함께 무너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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멈출 줄 아는 용기
성공한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멈출 줄 아는 용기다.
베버가 말한 “직업의 윤리”란 바로 그 멈춤의 윤리다.
그것은 금욕이 아니라, 자유의 구조적 조건이다.
자유는 절제 위에서만 지속된다.
견제 없는 성공은 전제의 씨앗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