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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프란시스코에서 싱가포르를 상상하다

by 골목길 경제학자

샌프란시스코에서 싱가포르를 상상하다


샌프란시스코 방문이 많은 여운을 남긴다. 스타트업의 도시, 반문화의 도시, 격식 없는 캘리포니아 자유주의의 상징이던 이곳의 공기는 친근했다. 기업가 정신과 실험정신, 창업자 중심 문화, 그리고 대학·벤처캐피털·스타트업이 어우러진 특유의 협력 구조도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기반 위에 새롭게 덧씌워진 감각이 도시 전체의 결을 바꿔 놓고 있었다. 이번 방문에서 느낀 변화는 샌프란시스코가 오히려 싱가포르를 닮아가고 있다는 다소 역설적인 인상을 남겼다. 자유와 반문화를 상징하던 도시가 효율, 전략, 통제를 우선하는 기능 도시적 특성을 강화하는 모습이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변화는 인도, 중국, 한국 등 아시아계 미국인의 부상이다. 단순한 인구 통계적 변화가 아니라 도시의 가치 체계와 일상의 분위기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힘으로 작동한다. 1990년대 실리콘밸리가 이상주의적 기술관과 자유주의적 감수성에 기반했다면, 오늘의 실리콘밸리는 성과 중심, 실용주의, 가족 단위 윤리처럼 아시아 발전국가 특유의 가치가 더 뚜렷하게 스며들어 있다. 인공지능, 반도체, 바이오 등 핵심 분야에서 아시아계 전문가가 차지하는 비중이 절대적으로 높아지면서, 조용했던 ‘기술 중심 이민자 문화’가 이제는 도시의 톤을 결정하는 중심축이 되고 있었다.


이와 동시에 ‘창업자 모드’의 확산은 실리콘밸리 조직문화의 또 다른 변화를 보여준다. Airbnb의 Brian Chesky가 강조한 창업자 중심의 의사결정 방식은 이제 수많은 스타트업의 기본 운영 원칙이 되었다. 빠른 실행과 강력한 통제는 효율성을 극대화하는 대신, 과거 실리콘밸리를 지탱했던 반권위주의적 기질을 약화시켰다. Palantir나 Anduril처럼 전략·안보와 연결된 기업들의 부상도 이런 변화와 맞물려 있다. Alex Karp의 『The Technological Republic』이 말하듯, 기술이 국가 전략과 통합되는 시대에는 강력한 리더십과 중앙집중 구조가 오히려 자연스러운 선택으로 받아들여진다.


벤처캐피털 문화 역시 2020년대에 들어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었다. 1990년대가 이상주의적 기술 탐구의 시대였고, 2010년대가 소비자 플랫폼 중심의 성장 경쟁 시대였다면, 2020년대는 기술 그 자체가 전략적 자산으로 취급되는 시대로 보인다. 이번에 방문한 벤처캐피털에서 관찰되는 빠른 실행 중심의 투자 방식은 기술의 사회적 의미보다 시장 검증 속도를 중시한다. 기술의 깊이와 완성도를 중시하는 전통과는 달리, 경쟁이 극단적으로 빨라진 AI 환경에서는 ‘속도 우선주의’가 합리적 판단이 되었다. 이는 기술·정책·안보가 서로 얽히는 새로운 시대의 투자 문화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던 변화는 이민 1세대 창업자와 엔지니어들의 비중이 크게 높아졌다는 점이다. 고강도 노동과 불확실성을 견딜 수 있는 이민자들의 체력, 절박함, 규율이 실리콘밸리의 생태계를 떠받치는 원동력이 되고 있었다. 일부 기업이 운동선수 출신을 선호한다는 말은 단순한 농담이 아니라, 극한의 속도와 집중력을 요구하는 AI 스타트업 현장의 현실을 보여주는 상징처럼 들렸다. 여기에서는 일과 삶의 균형이 더 이상 공통의 기준이 아니다. 생존의 조건이자 경쟁의 최소 단위가 되고 있었다.


이 모든 풍경은 결국 하나의 질문으로 수렴되었다. 실리콘밸리는 과연 어디로 가고 있는가. 자유와 실험의 도시가 효율과 통제의 도시로 이동하는 것이 일시적 변화인지, 아니면 더 큰 전환의 신호인지. 싱가포르는 민주주의 제도 없이도 투명한 관료제와 고도성장을 함께 달성한 독특한 모델이다. 기술이 곧 전략이 되고, 전략이 곧 성장의 전제가 되는 세계에서 이러한 모델은 더 이상 동남아시아의 특이점처럼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미국의 기술 수도에서 재현되고 있다는 사실이 오늘의 글로벌 기술문명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싱가포르를 떠올리게 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기술과 도시, 이민과 노동, 이상과 효율이 충돌하는 이 세계 속에서, 실리콘밸리의 변화는 단지 도시 분석을 넘어 기술문명의 미래를 묻는 하나의 질문처럼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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