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1월 14일, 포브스 매거진이 의미심장한 여론조사 결과를 공개했다. 미국인의 53%는 억만장자들이 민주주의를 위협한다고 답했다. 1년 전보다 7% 포인트나 증가한 수치다. 10명 중 7명은 초부유층이 정치에서 더 작은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71%는 억만장자세를 지지했다. 절반이 넘는 53%는 아예 부의 축적에 상한을 둬야 한다고 응답했는데, 적정 수준으로 약 100억 달러를 제시했다. 이는 단순한 불만의 표출이 아니다. 미국 자본주의에서 반복되어 온 반작용의 순환이 다시 시작되고 있음을 알리는 신호다. 부의 극단적 집중은 언제나 사회적 위기를 낳았고, 그 위기는 결국 정치적 반격을 동반해 체제를 재편했다. AI 시대 역시 이 역사적 패턴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관건은 이번 반작용이 어떤 형태로 나타날 것인가이다.
미국 자본주의는 일정한 순환을 거쳐왔다. 금권이 등장하고, 불평등이 심화되며, 사회적 위기가 촉발되면 결국 포퓰리즘과 개혁이 밀려왔다. 19세기말 금권시대에는 로크펠러와 카네기, 모건이 철도·석유·금융을 장악했다.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진보주의 운동과 포퓰리스트 운동이 일었고, 셔먼 반독점법이 제정되었다.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트러스트 파괴자’라는 별명을 얻으며 독점기업을 해체했다.
1920년대의 주식시장 광풍은 1929년 주식시장 붕괴, 1930년대 대공황으로 이어졌고, 미국 자본주의는 구조적 한계에 직면했다. 이에 대한 해법이 뉴딜이었다. 글라스–스티걸법은 금융을 분리·규제했고, 노동권이 강화됐으며, 사회보장제도가 도입되었다. 이러한 재편은 ‘규제된 자본주의’라는 새로운 체제를 형성했다. 이후 1980년대 신자유주의는 규제를 완화해 금융의 폭주를 허용했고, 그 결과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도래했다. 월가점령운동과 도드–프랭크법이 다시 반작용을 불러왔지만, 이번 조정은 불완전했다. 불평등은 완화되지 않았고, 자본주의의 중심축은 월스트리트에서 실리콘밸리로 이동했다.
오늘날 플랫폼 자본주의는 과거의 철도·석유·금융보다 훨씬 강력한 권력을 쥐고 있다. 구글과 메타는 알고리즘으로 정보의 흐름을 조절하고, 아마존과 애플은 시장의 중개와 유통을 독점하며, 엔비디아와 오픈 AI는 AI라는 새로운 전략 자원을 사실상 지배하고 있다. 패턴은 분명하다. 부의 집중 → 사회적 위기 → 정치적 반작용 → 체제 재편. 그렇다면 AI 시대의 반작용은 어떤 모습으로 등장할까?
과거의 재벌들은 부를 축적했지만, 사회 질서를 재편하는 이념적 프로젝트를 제시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AI 시대의 기술 억만장자들은 단순한 경제적 행위자를 넘어 정치적 행위자가 되고 있다. 그들은 기술을 통해 새로운 사회 질서를 상상하며, 기존의 정치 제도를 대체하거나 우회하려는 시도를 서슴지 않는다.
피터 틸은 민주주의가 경쟁을 저해한다고 주장하며 기술 독점을 혁신의 원천으로 본다. 일론 머스크는 정부보다 기술 기업이 더 효율적으로 사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으며, 초국가적 기술 자유지상주의를 실험하고 있다. 반면 팔란티어의 알렉스 카프는 기술을 국가의 재무장 도구로 바라본다. 그는 AI 군비경쟁과 국가 안보를 새로운 문명적 과제로 제시하며, 엔지니어가 중심이 되는 ‘기술 공화국’을 구상한다. 과거 금권정치가 돈으로 정치에 영향력을 행사했다면, 오늘의 기술 금권은 기술 자체로 정치 구조를 재편하려 한다는 점에서 질적으로 다른 국면에 진입했다.
1. 좌파 포퓰리즘: 재분배와 생활정치
좌파 포퓰리즘은 여전히 재분배와 생활정치를 중심으로 자본의 집중을 견제하려 한다. AOC와 샌더스는 억만장자세, 부유세, 공공 의료 확대, 무상 대학 교육을 통해 불평등을 완화하는 전략을 제시한다. 특히 2025년 뉴욕 시장으로 당선된 자만 맘다니는 주거·교통·육아 같은 생활비 문제를 해결하는 ‘어포더빌리티 정치’를 전면에 내세워 많은 중산층·청년층의 지지를 얻었다. 그러나 이러한 생활 중심의 접근이 AI 시대의 구조적 문제에 대응할 수 있는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노동시장 재편, 플랫폼 독점, 알고리즘 권력 같은 핵심 문제는 재분배만으로는 해결되지 않기 때문이다.
2. 우파 포퓰리즘: 주도권 경쟁
우파 포퓰리즘은 트럼프를 대표로 하는 대중 포퓰리즘의 국가주의에서 출발한다. 이는 반엘리트, 반이민, 보호무역, 국가 우선주의를 결합한 정치적 흐름이며, 여전히 미국 우파 정치에서 가장 강력한 대중 기반을 가지고 있다. 트럼프 포퓰리즘은 전통적인 우파가 기업·자본 중심이었던 것과 달리, 분노한 유권자의 감정과 국가주의적 정체성을 중심에 두었다. 이 흐름은 기술과 결합해 새로운 형태로 진화하고 있다. 트럼프 포퓰리즘은 정치적 기반을 제공하고, 기술 엘리트들은 그 위에서 새로운 권력 구조를 설계한다. 즉, 정치 포퓰리즘 위에 기술 포퓰리즘이 중첩되는 구조가 형성되고 있다.
AI 시대 우파 포퓰리즘의 가장 흥미로운 전선은 기술 엘리트 내부의 경쟁이다. 일론 머스크는 국가보다 기술 기업이 더 효율적으로 사회를 운영할 수 있다고 믿으며, 규제를 최소화한 기술 자유지상주의를 추구한다. 그의 세계관은 국경을 넘어선 기술 질서, 정부의 축소, 민간 우주개발과 AI 활용의 확장을 중심으로 한다.
반면 알렉스 카프는 기술을 국가의 재무장 도구로 활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The Technological Republic』에서 국가 안보와 AI 군비경쟁을 미래 문명의 핵심 과제로 제시하며, 엔지니어 주도의 새로운 민주주의—혹은 반(反) 민주주의적 기술 공화국—을 옹호한다. 그의 비전은 ‘기술을 통한 국가 강화’라는 점에서 머스크의 초국가적 자유지상주의와 정면으로 충돌한다. 결국 AI 시대 우파 포퓰리즘의 향방은 트럼프, 머스크, 그리고 카프 중 누구의 비전이 더 많은 지지와 권력을 확보하는지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3. 크리에이터 포퓰리즘: 제3의 길, 제3의 응전
AI 시대에 주목할 만한 또 하나의 흐름은 크리에이터 포퓰리즘이다. 이는 좌파의 재분배 중심 접근과 우파의 국가주의적 포퓰리즘을 넘어서는 제3의 길이다. 크리에이터 포퓰리즘은 플랫폼 독점에 맞서 창작자 경제를 구축하고, 중앙집중형 AI 대신 개인 소유 AI와 로컬 AI를 확산하며, 거대 조직이 아닌 창작자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경제 질서를 재편하려 한다. 19세기 포퓰리즘의 주축이 농민이었다면, 21세기 포퓰리즘의 주축은 창작자가 될 가능성이 크다.
크리에이터 포퓰리즘의 핵심은 권력 분산과 기술의 민주화다. 규제가 아니라 개방된 기술, 국가 개입이 아니라 자율적 네트워크, 재분배가 아니라 창작자 역량 강화가 중심이 된다. 이는 AI 시대의 기술 권력 집중에 대응하는 가장 건설적이며 지속 가능한 대안일 수 있다. 나는 이를 ‘제3의 응전’이라 부른다.
반작용은 반드시 온다. 미국 자본주의는 언제나 부의 집중이 심화될 때마다 정치적 반격을 경험해 왔다. AI 시대도 예외가 아니다. 좌파 포퓰리즘의 생활정치, 우파 포퓰리즘의 국가주의, 기술 포퓰리즘의 자유지상주의와 국가주의, 그리고 크리에이터 포퓰리즘의 기술 민주화 가운데 어떤 흐름이 AI 시대의 중심으로 떠오를지는 아직 알 수 없다. 그러나 해리스 여론조사가 보여주는 흐름은 분명하다. 시민들은 이미 새로운 반격의 기반을 축적하고 있다. 문제는 그 반작용이 어떤 형태로 등장할지, 그리고 그것이 기술 금권을 얼마나 효과적으로 재편할 수 있을 지다. 답은 머지않아 드러날 것이다.
참고문헌
Roeloffs, Mary Whitfill. “Americans Want Billionaires Out Of Politics—And Think They’re A Threat To Democracy, Poll Shows.” Forbes, November 14, 2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