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물질주의 가치를 중시하는 독자에게 부르주아가 과연 매력적인 라이프스타일일까? 언론은 부르주아를 탐욕과 기득권의 동의어로 사용하지만, 빌 게이츠(Bill Gates)와 워런 버핏(Warren Buffett)의 소박한 일상이 보여주듯이 고전적인 부르주아는 성실, 겸양, 검소, 가족, 저축, 안정 등의 중산층 가치를 실천한다. 기존 사회의 가치를 존중하는 사람, 기존 질서 위에서 가족을 위해 성실하게 사는 사람도 부르주아 라이프스타일을 추구하는 사람이라 할 수 있다.
대다수 한국인은 평생 모범생, 즉 고전적 부르주아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는다. 사회가 인정하는 학교에 다니고, 사회가 인정하는 직장에 들어가, 사회가 인정하는 동네에 집을 장만하고, 가능하면 자녀도 동일한 라이프스타일을 추구하도록 교육한다. 사회가 인정하는 기준과 가치관에 따라 살고 싶어 하고 이를 통해 행복을 느낀다.
라이프스타일을 물질과의 관계로 정의한다면 부르주아는 물질을 삶의 중심에 두는 ‘물질주의’ 계급이다. 여기서 물질이 반드시 돈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신분, 조직, 경쟁, 근면 등 물질주의 사회를 지탱하는 가치도 포함된다. 부르주아 계급의 핵심 계층은 기업가와 자본가다.
부르주아의 영웅은 위험과 불확실성을 무릅쓰고 새로운 상품을 개발하고 기술 혁신을 통해 ‘창조적 파괴’에 앞장서는 슘페터형 기업인이다. 대량 생산, 대량 소비 체제가 확산되면서 자본주의 사회에는 창업가, 상인, 기술자 외에 체계적인 시스템을 운영할 전문직이 필요해졌고, 이때 금융인, 변호사, 회계사, 컨설턴트 등 자본가를 지원하는 전문직이 부르주아 계층으로 진입한다.
소득 수준이 높아지고 신분적 위계질서가 약화된 현대 선진국 사회에서는 부르주아의 영역이 공공 분야로 확산되고 있다. 최근 젊은 세대가 선호하는 소위 ‘워라벨(Work Life Balance)’을 실현할 수 있는 안정적인 직업군에 속하는 공무원, 교사, 공기업 직원, 대기업 직원도 부르주아 성향을 보인다. 관료화된 자본주의의 부르주아가 선호하는 일의 방식은 효율성과 정형화다. 경영자는 조직의 성과와 효율을 극대화하기 위해 작업 방식을 정형화한다. 직원들도 직무 분석(Job Description), 업무 분장 등 사전에 합의된 규율에 따라 예측 가능하고 효율적인 방식으로 일하는 것을 선호한다.
다수의 부르주아는 노력과 능력에 대한 정당한 보상을 받는 것을 정의롭다고 생각한다. 여기에서의 보상은 물질적인 측면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부르주아는 물질적 성공을 정신적, 윤리적으로 정당화한다. 직업과 물질적 추구를 신이 내린 천직이자 소명(Calling)으로 믿었던 초기 부르주아는 부의 축적을 기독교인의 의무로 여겼다.
막스 베버(Max Weber)가 주창한 프로테스탄트 윤리는 자본 축적을 정당화한 기독교 가치를 자본주의를 견인하는 기본 정신으로 설명한다. 결과적으로 부르주아는 계급, 지위, 신분, 불평등 등이 개인의 노력 여하에 따른 결과라고 믿으며, 불평등을 조장하는 사회적 구조에 대해 관대하다. 20세기에 들어 서구 사회 전반에서 탈종교 움직임이 두드러지며 기독교에서 시작한 부르주아는 종교와 거리를 두기 시작한다. 종교를 포기했다고 해서 그 종교가 상징하는 가치를 포기하는 것은 아니다. 종교가 없는 서구의 부르주아도 여전히 근면, 성실, 소명과 같은 기독교 가치를 추구한다.
부르주아 라이프스타일은 소비 영역에서 가시적으로 드러난다. 부르주아에 진입한 사람들은 자기표현이나 자아실현을 위해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신분과 계층의 규범에 따라 소비한다. 그 때문에 부르주아의 소비는 때로 부유층의 과시적 소비로 이해된다. 많은 사람은 이들이 물건 자체의 가치보다는 그 물건이 표상하는 신분과 부를 과시하기 위한 소비를 일삼는다고 평가한다.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iard)가 과시적 소비를 기호의 교환으로 정의한 것처럼 소비를 ‘나는 당신과 다르다’라는 점을 표현하는 기호로 보는 것이다. 부르주아 소비자는 차별적 소비를 통해 기능적, 정서적인 편익을 넘어 신분적 편익을 획득한다.
19세기 후반 자본가 계층의 행태를 비판한 소스타인 베블런(Thorstein Bunde Veblen)은 과시적 소비를 자본주의를 위협하는 적폐로 인식했다. 그는 소시민에게 근면, 효율, 협동 등 산업 사회 발전을 위해 필요한 가치를 요구하는 부르주아가 정작 스스로는 부를 과시하는 데 여념이 없는 것은 위선이며 이를 미개 사회의 잔재라고 비판했다.
그렇다면 부르주아는 스스로 과시적 소비를 한다고 평가할까? 대부분은 일부 부르주아의 일탈로 치부하고, 또 일부는 과시적 소비의 개념 자체를 부인하고 안목과 취향의 문제라고 답할 것이다. 자신은 상품이 지닌 특별한 가치를 발견할 수 있으며 이러한 가치를 인정하고 이에 상응하는 가격을 지불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이들은 스스로 과시적 소비가 아닌 가치적 소비를 한다고 항변한다. 또한 소비자에게 수월성적 가치를 제공하는 생산자와 제품에 정당한 가격을 지불하는 행동은 자본주의 경제 발전의 동력이라 주장한다.
부르주아 소비는 명품과 고급 상품에 한정되지 않는다. 우리가 소비자 덕목으로 이해하는 가성비도 부르주아 소비 행태로 분류된다. 상품이 생산되는 과정이나 상품과 나의 가치관의 관계보다는 상품의 가격과 품질에 집중하여 평가하고 선택하는 소비는 기업과 개인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물질주의 가치에 부합한다.
부르주아 라이프스타일은 이들이 사는 곳에도 반영된다. 이들은 가능한 다른 부르주아와 모여 사는 것을 선호하며, 서로 모인 후에는 물리적·문화적 장벽을 통해 자신을 외부와 격리하는 게이티드 커뮤니티(Gated Community)를 형성한다. 이러한 커뮤니티 안에서 골프, 사교 모임, 고급 음식 등의 취향을 공유한다. 격리된 취향 공동체를 지향하는 부르주아 계층은 다른 계층과의 분리가 용이한 신도시, 단지 도시, 자동차 도시를 선호한다. 다른 계층과의 교류나 유입을 꺼리기 때문에 거리 문화나 보행 도시를 불편하게 느낀다.
특히 한국 부르주아는 단지 도시에 남다른 애착을 보인다. 주상 복합 단지에서 오피스 단지로 출근하고, 쇼핑 단지에서 쇼핑과 여가 시간을 보내며 단지 간 이동은 자동차를 통해 해결한다. 역사와 문화가 담긴, 오래된 거리와 좁은 골목길로 이루어진 동네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다. 부르주아에게 대규모 유동 인구를 유발하는 거리와 동네는 문화적 자원이 아닌 쾌적한 주거 환경을 훼손하는 낙후한 인프라다.
부르주아는 보수적인 정치 성향을 보인다. 경제 영역에서는 자유주의, 규제 완화, 민영화 등 기업 활동을 진작하는 정책을 지지한다. 사회적으로는 종교 자유, 가족 제도를 지지하고 소수자 인권은 부수적 문제로 여긴다. 안보에서는 강한 군사력, 힘의 논리, 그리고 동맹을 지지한다. 부르주아는 노력을 통해 축적한 물질적인 가치를 세습하는 데 거부감이 없다. 과거 부의 세습을 통해 신분을 유지했다면, 현대의 부르주아는 조금 더 세련된 방식으로 교육을 통해 신분을 세습한다.
물질주의 가치를 중시하는 부르주아지만 그렇다고 다른 가치를 경시하는 것은 아니다. 부르주아도 평등, 형평성, 삶의 질, 안전, 독립 등 효율성과 성장 외의 사회적 가치를 중요시한다. 우선순위가 다를 뿐이다. 복지와 독립을 위한 경제적 기반을 강조하는 부르주아는 물질적 안정을 우선 실현한 후 다른 가치를 추구해야 한다고 믿는다.
역사적으로 보면 부르주아는 오히려 개혁 세력에 가깝다. 부르주아는 중세 귀족에 저항하는 상업, 수공예에 종사하는 중산층 계급에서 태동했다. 시장 경제가 발전한 북유럽에서 부르주아가 선호한 종교는 개신교다. 개신교는 중세 귀족의 종교였던 천주교의 헤게모니를 종교 개혁으로 무너뜨렸다. 귀족과 경쟁하던 부르주아가 귀족의 종교와 반대되는 종교를 선택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17~18세기에 본격적으로 시작된 시민 혁명의 주도 세력도 부르주아였다. 귀족 사회에 대한 일종의 반문화로 시작한 부르주아는 종교 개혁, 시민 혁명, 그리고 산업 혁명을 통해 근대 자본주의 경제의 지배 계급으로 부상했다. 노력과 실력을 바탕으로 치열한 경쟁을 통해 부를 축적한 이 계급이 물질주의 사회의 기본 규범과 가치를 중시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알고 보면 한국의 부르주아도 전근대 양반사회에 저항한 반문화 세력이다. 근대화를 시작한 19세기 말은 물론 산업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1960년대에도 부르주아 계층은 식자층과 관료로 구성된 주류 사회에 도전해야 했다. 정확한 시점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있으나, 금융 위기를 거친 1990년대 후반에 와서야 한국에서 부르주아 패권이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부르주아는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일과 고용을 창출하는 데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할 것이며, 그것은 이들의 가장 큰 과제이기도 하다. 만약 부르주아가 주도하는 자본주의 경제가 충분한 중산층을 만들어낸다면 도덕적인 비판에도 불구하고 부르주아의 지배적 위치는 계속 유지될 것이다.
자본주의 경제에서 차지하는 부르주아의 비중을 고려할 때 부르주아는 미래 세대가 선택할 수 있고, 또 일부는 선택해야 하는 라이프스타일이다. 한국의 부르주아 지식인도 미국의 지식인처럼 사회 개혁과 경제 성장을 위해 부르주아 문화를 복원하고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도 부르주아의 미래가 만만해 보이지 않는다.
과거의 기술 혁신과 달리 4차 산업 혁명이 대표하는 현재의 기술 혁신은 대량 실업을 수반한다. 구조적 실업은 기본 소득으로 편리하게 봉합할 문제가 아니다. 미래 세대는 거세게 의미 있는 일을 요구하고 있으며, 부르주아가 이를 만족시키지 못하면 그들에게 주어진 특권적 지위는 상실될 것이다.
도덕성에 대한 고민도 남는다. 전 세계적으로 기득권과 불평등의 상징으로 몰린 부르주아가 현재의 계급적 위기를 쉽게 극복할 수 있을까? 미래에 대한 고민은 부르주아 역사에 대한 문제의식으로 시작해야 한다. 부르주아가 매력적인 이유는 도전의 역사를 개척했기 때문이다. 현재에도 존경받는 부르주아는 계속 도전하고 가치를 창출하는 기업가다.
부르주아의 도전을 건너뛰고 부르주아의 성취만을 추구하는 사람은 진정한 부르주아라고 할 수 없다. 자신의 능력과 공정한 경쟁으로 시장에서 부를 축적하고 고용을 창출하는 기업가가 부르주아의 전형이다. 이들은 부의 축적이라는 현세의 소명을 실현하기 위해 규율, 절제, 절약 등 이에 필요한 가치를 추구한다. 부의 축적으로 얻어지는 물질적 풍요는 어쩌면 부르주아 정체성에서 부수적인 요소일 수 있다. 반문화로 시작한 부르주아가 역동성을 유지하려면 기득권을 견제하고 개인의 자유에서 일의 미래를 찾는 반문화 초심으로 돌아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