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월 21일, IFC 채널에서 한 스케치 코미디 쇼가 첫 방송을 시작했다. 프레드 아미센(Fred Armisen)과 캐리 브라운스타인(Carrie Brownstein)이 만들고 출연한 《포틀랜디아(Portlandia)》. 이 드라마는 포틀랜드를 무대로 힙스터 문화, 친환경 광신자, 대안문화의 모든 가식을 날카롭게 풍자했다.
드라마의 제목이 《포틀랜드》가 아니라 《포틀랜디아》인 것은 의도적이었다. 브라운스타인은 이렇게 설명했다. "포틀랜디아는 실제 포틀랜드가 아니라 고도화된 버전입니다. 하나의 이데올로기, 마인드셋, 삶의 방식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놀라운 것은 포틀랜드 사람들이 이 드라마를 받아들인 방식이었다. 비난하거나 거부하는 대신, 그들은 웃으며 즐겼다. 실제로 포틀랜드 시장이 카메오로 출연했고, 드라마에 나온 많은 장소들은 실제 포틀랜드의 명소가 되었다. 포틀랜드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비웃을 줄 아는, 독립적인 비순응주의자들이었다.
《포틀랜디아》는 8 시즌 동안 방영되며(2011-2018) 포틀랜드를 미국 힙스터 문화의 수도로 각인시켰다. 하지만 이 드라마가 단순히 허구를 만든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이미 존재하던 포틀랜드의 독특한 문화를 전국에, 그리고 세계에 알린 것이었다.
《포틀랜디아》 첫 에피소드는 "The Dream of the 90s"라는 뮤직비디오 스케치로 시작한다.
LA에서 돌아온 남자 주인공 제이슨(아미센)이 친구 멜라니(브라운스타인)에게 말한다.
"1990년대 기억나? 사람들이 피어싱 하고 부족 문신을 새기던 때. 지구를 구하자고 노래하고, 밴드를 만들던 때. 그런 생각이 여전히 현실로 존재하는 곳이 있어. 내가 가봤어."
"어디?"
"포틀랜드."
"오리건?"
"그래. 1990년대의 꿈이 포틀랜드에서 살아있어."
그리고 노래가 시작된다. 두 사람이 포틀랜드 강변 Eastbank Esplanade를 걸으며 부르는 이 노래에는 점점 더 많은 괴짜들이 합류한다. 서커스 공연자, 힙스터들, 자전거 타는 사람들, 비건 식당 주인들, 독립 음악가들.
가사는 이렇다:
"1990년대의 꿈이 포틀랜드에서 살아있어!
11시까지 자도 돼, 천국이야.
문신 잉크는 마르지 않아!
안경 쓴 여자들이 다 예뻐!
내 플란넬 셔츠는 여전히 멋져!
포틀랜드에선 자전거를 타거나, 2층 자전거를 타거나, 외발자전거를 타지.
포틀랜드에선 레코드 가게에서 CD를 팔 수 있어.
뭔가에 새 그림을 그려 넣으면 그게 예술이야."
제이슨이 말한다. "포틀랜드는 거의 평행 우주 같아. 마치 앨 고어가 이긴 것처럼. 부시 행정부는 없었어."
멜라니가 덧붙인다. "사람들이 야망 없이 사는 것에 만족하던 때. 일주일에 몇 시간만 커피숍에서 일하던 때 말이야. 그게 오래전에 사라진 줄 알았는데." "포틀랜드에선 아니야."
이 노래는 "포틀랜드는 청년들이 은퇴하러 가는 도시"라는 유명한 대사로 이어진다. 야심과 경쟁, 성공에 집착하는 대신, 자기만의 속도로 살아가는 곳. 파트타임 일을 하며 밴드 활동을 하고, 독립 잡지를 만들고, 친구들과 맥주를 마시며 사는 곳.
포틀랜드 힙스터 문화를 이해하려면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힙스터(Hipster)"라는 단어 자체는 194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재즈와 비밥이 미국을 휩쓸던 시절, 주류 문화를 거부하고 독자적인 미학을 추구하던 사람들을 가리켰다. 하지만 현대적 의미의 힙스터는 훨씬 복잡한 계보를 가진다.
1950년대 비트 세대에서 시작된다. 잭 케루악, 앨런 긴즈버그로 대표되는 비트니크들은 보헤미안 정신을 미국에 이식했다. 자유로운 영혼, 예술적 실험, 기성 사회에 대한 저항. 샌프란시스코의 City Lights Bookstore가 그들의 성지였다.
1960년대 히피 문화가 뒤를 이었다. 베트남 전쟁 반대, 환경주의, 공동체 생활, 사이키델릭 음악. 샌프란시스코 Haight-Ashbury가 중심지였지만, 이 문화는 북쪽으로도 퍼져나갔다.
1968년, 《뉴스위크》는 "2만 명의 히피가 샌프란시스코에 싫증나 포틀랜드로 침공할 것"이라고 보도했다. 숫자는 과장되었지만, 실제로 많은 히피들이 포틀랜드로 이주했다.
왜 포틀랜드였을까? 먼저 저렴한 집값이었다. 1960년대 포틀랜드 남쪽 Lair Hill Park 지역은 유대인과 이탈리아 이민자들이 1920년대 떠난 후 쇠퇴해 있었다. 낮은 임대료가 히피들을 끌어들였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자연환경이었다. 히피들은 "땅으로 돌아가기(back to the land)" 운동을 벌였다. 포틀랜드는 도시이면서도 산과 강, 숲이 가까웠다. 30분만 나가면 자연이 펼쳐졌다. 켄 케시(Ken Kesey)는 오리건에서 자랐고,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를 썼으며, 1965년 포틀랜드에서 여섯 번째 "애시드 테스트(Acid Test)"를 개최했다.
Lair Hill Park는 히피 활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매주 토요일 무료 콘서트가 열렸다. PH Phactor Jug Band와 Great Pumpkin 같은 그룹들이 피트 시거와 조안 바에즈의 노래를 연주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수천 명이 모이는 "Portland Be-In"이 되었다.
Psychedelic Supermarket는 히피 문화의 상징이었다. 매주 일요일 무료 수프를 나눠줬는데, 이 아이디어는 샌프란시스코의 The Diggers에서 왔다. 사고팔지 않는 사회를 꿈꾸던 그들의 정신이 포틀랜드에서도 살아있었다.
그렇다면 히피는 어떻게 힙스터가 되었을까? 1980년대 후반이 전환점이었다. 1980년대 초반 경기 침체로 포틀랜드 경제가 어려워지자, 더 많은 예술가와 공예가들이 값싼 주택을 찾아 포틀랜드로 왔다. 이들은 히피와 달랐다.
히피가 자연에서 저항했다면, 힙스터는 도시에서 저항했다. 히피가 공동체와 코뮌을 만들었다면, 힙스터는 독립 비즈니스를 만들었다. 히피가 시스템에서 탈출하려 했다면, 힙스터는 시스템 안에서 대안을 만들었다.
1990년대가 결정적이었다. 시애틀 그런지 음악의 영향, 인디 문화의 성장, DIY(Do It Yourself) 정신의 확산. 포틀랜드는 이 모든 것의 중심이 되었다. 캐리 브라운스타인의 밴드 Sleater-Kinney가 1994년 결성된 것도 이 시기다.
히피가 환경과 평화를 외쳤다면, 힙스터는 로컬과 수제를 선택했다. 히피가 자유연애와 공동체를 추구했다면, 힙스터는 독립성과 개성을 추구했다. 하지만 둘 다 대량생산과 대량소비를 거부하고, 주류 문화에 저항한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2000년대 들어 "힙스터"는 특정한 미학을 가리키게 되었다. 플란넬 셔츠, 스키니 진, 뿔테 안경, 수염, 빈티지 패션. 브루클린 윌리엄스버그, 포틀랜드 Pearl District, 오스틴 South Congress가 힙스터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중에서도 포틀랜드가 가장 순수한 형태로 남았다.
왜일까? 포틀랜드의 힙스터 문화는 자생적이었기 때문이다. 브루클린이나 오스틴은 외부에서 힙스터들이 대거 유입되며 형성되었지만, 포틀랜드는 히피 문화부터 이어진 내재적 전통이 있었다. 1960년대부터 쌓인 대안문화의 DNA가 있었다.
《포틀랜디아》가 인기를 끌면서 힙스터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도 확산되었다. 가식적이고, 속물적이고, 게으르고, 비생산적이라는 비난. "아무 직업도 없이 커피숍에서 일주일에 몇 시간만 일하며 사는" 사람들.
실제로 부정적 측면도 있다. 지나친 아이러니와 냉소, "나는 남들과 달라" 하는 허영, 힙한 것에 대한 집착. 2016년 포틀랜드의 페미니스트 서점 In Other Words는 《포틀랜디아》를 맹비난하는 블로그를 올렸다. 쇼가 트랜스젠더를 조롱하고, 유색인종을 무시하고, 젠트리피케이션을 부추기며, 실제 비즈니스에 해롭다고.
서점 이사회 멤버 Nam Kennedy는 말했다. "쇼 때문에 온 방문객들은 좀처럼 고객이 되지 않아요. 그들은 문 앞에 서서 우리가 광고하는 것들을 조롱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힙스터 문화 자체의 문제라기보다, 그것을 소비하는 방식의 문제다. 진짜 힙스터 문화의 핵심은 다른 곳에 있다.
힙스터는 근본적으로 크리에이티브하고 기업가적이다. 스텀프타운 커피를 만든 사람들, 파웰스 서점을 키운 사람들, 에이스 호텔을 디자인한 사람들, ADX에서 목공예를 배워 가구 회사를 창업한 사람들. 이들은 모두 힙스터다. 그리고 이들은 모두 창조자이자 기업가다.
히피가 시스템을 거부하고 코뮌을 만들었다면, 힙스터는 시스템 안에서 대안 비즈니스를 만든다. 히피가 자연으로 돌아갔다면, 힙스터는 도시에서 새로운 라이프스타일 산업을 창조한다.
《포틀랜디아》 자체가 이것을 잘 보여준다. 쇼는 힙스터를 조롱하지만, 동시에 애정을 담고 있다. 치킨의 사육 환경을 끝없이 추궁하는 커플, 책을 알파벳 순으로 정리하는 것조차 거부하는 서점 주인들. 우스꽝스럽지만, 그 안에는 진정성과 가치에 대한 집착이 있다.
브라운스타인은 《뉴욕 타임스》 인터뷰에서 말했다. "이상한 점은, 우리가 아무리 극단적으로 나가도, 항상 2일 안에 실제로 그런 사람을 만난다는 겁니다." 포틀랜드의 힙스터 문화는 풍자가 아니라 현실이었다.
힙스터와 힙스터 비즈니스는 동네에서 잉태하고 성장한다. 이것이 핵심이다. 브루클린이나 LA의 힙스터 문화는 종종 위에서 기획된다. 부동산 개발업자가 "힙한 동네"를 만들려고 예술가를 유치한다. 하지만 포틀랜드는 다르다. 힙스터 생태계가 자연발생적으로, 동네 단위로 형성된다.
Alberta Arts District가 좋은 예다. 한때 위험한 동네였던 이곳은 1990년대 예술가들이 값싼 공간을 찾아 모여들면서 변했다. 갤러리, 스튜디오, 카페, 독립 상점들이 하나씩 생겼다. 매달 마지막 목요일 열리는 Last Thursday 아트 워크는 수천 명을 끌어모으는 축제가 되었다.
아무도 기획하지 않았다. 예술가들이 먼저 왔고, 그들을 위한 카페가 생겼고, 카페 손님들을 위한 가게가 생겼고, 가게가 많아지자 더 많은 사람이 왔다. 생태계가 자생적으로 형성된 것이다.
Mississippi Avenue도 마찬가지다.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쇠퇴한 상권이었지만, 독립 부티크, 빈티지 가게, 수제 맥주 펍, 채식 레스토랑이 하나둘 들어서면서 힙스터 핫스팟이 되었다. Mississippi Marketplace에는 다양한 푸드 카트가 모여 있다.
Division Street는 최근 10년간 가장 극적으로 변한 곳이다. 로컬 레스토랑, 스페셜티 커피숍, 독립 서점이 즐비하다. Pok Pok 같은 태국 레스토랑은 포틀랜드를 넘어 전국적 명성을 얻었다.
Pearl District는 좀 다르다. 한때 창고 지역이었던 이곳은 1990년대 후반부터 재개발되었다. 하지만 일반적인 재개발과 달리, 힙스터 문화를 의도적으로 보존했다. 파웰스 서점 본점이 있고, Wieden+Kennedy 광고 대행사 본사가 있고, 독립 갤러리와 부티크가 산재해 있다.
이 모든 동네의 공통점은? 로컬 비즈니스다. 체인점이 거의 없고, 모두 독립 사업자들이다. 그리고 이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커피숍 주인이 옆 가게 수제 빵을 팔고, 레스토랑이 동네 양조장 맥주를 쓰고, 서점이 로컬 작가 낭독회를 연다.
ADX는 힙스터 메이커 생태계의 상징이다. 400평 규모의 이 메이커 스페이스는 목공, 금속 가공, 가죽 공예, 용접, 3D 프린팅 등 다양한 장비와 교육을 제공한다. 월 회원권을 끊으면 누구나 와서 만들 수 있다.
여기서 취미로 시작한 사람이 전문 가구 제작자가 되기도 하고, 주말 프로젝트가 Etsy 비즈니스가 되기도 한다. ADX에서 만난 사람들이 협업해 새 회사를 만들기도 한다. 이것이 힙스터 창업 생태계다.
Portland Made는 300명 이상의 로컬 메이커를 연결하는 협동조합이다. 공동 마케팅, 워크숍, 네트워킹 행사를 조직한다. "Made in Portland" 브랜드를 만들어 품질을 보증한다.
포틀랜드에는 70개 이상의 양조장이 있다. 인구 대비 세계에서 가장 많다. 각 양조장은 자기만의 레시피, 자기만의 분위기, 자기만의 커뮤니티를 가진다. Cascade Brewing은 사워 비어 전문, Upright Brewing은 벨기에 스타일, Breakside Brewery는 실험적 IPA로 유명하다.
《포틀랜디아》는 2018년 8 시즌으로 종영했다. 마지막 에피소드에서 시장(Kyle MacLachlan)은 처음으로 자신의 이름을 밝힌다. "숀(Shaun)입니다."
쇼의 종영은 상징적이다. 《포틀랜디아》가 시작된 2011년과 끝난 2018년 사이, 포틀랜드는 많이 변했다. 인구가 급증했고, 집값이 치솟았고, 노숙자 문제가 심화되었다. "1990년대의 꿈"은 파트타임 바리스타 일로는 더 이상 집세를 낼 수 없는 현실과 부딪혔다.
포틀랜드의 인기가 오히려 포틀랜드를 위협했다. 《포틀랜디아》를 보고 전국에서 사람들이 몰려왔다. 그들은 힙한 포틀랜드를 소비하려 왔지만, 역설적으로 그들의 유입이 포틀랜드를 덜 힙하게 만들었다. 임대료가 올라 예술가들이 밀려났고, 로컬 가게가 문을 닫고 체인점이 들어섰다.
NPR 기자 Fiona McCann은 말했다. "사람들이 포틀랜드와 포틀랜디아를 구분하지 못하는 것 같았어요. 포틀랜드 사람들은 조롱당하는 것에 지쳤습니다."
하지만 2020년대 초 위기를 겪으면서 포틀랜드는 다시 변화하고 있다. COVID-19 팬데믹, 인종차별 반대 시위, 다운타운 쇠퇴. 많은 사람이 "포틀랜드는 끝났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힙스터 문화의 핵심, 즉 창조성과 회복력은 여전하다. 어려운 시기에도 새로운 로컬 비즈니스가 생겨나고, 동네 커뮤니티는 더 강해지고, 사람들은 새로운 방식으로 연대한다.
《포틀랜디아》 종영을 앞두고 캐리 브라운스타인은 말했다. "포틀랜디아는 특정한 장소가 아니라 마인드셋입니다. 그리고 그 마인드셋은 사라지지 않을 겁니다."
그녀가 옳았다. 2024년 포틀랜드는 여전히 힙스터 도시 랭킹 상위권에 있다. 여전히 독립 서점과 수제 맥주 양조장이 번창하고, 여전히 예술가와 메이커들이 모여들고, 여전히 사람들은 플란넬 셔츠를 입고 자전거를 타고 파머스 마켓에 간다.
1990년대의 꿈이 살아있는가? 아마도 더 이상 그렇지 않을 것이다. 포틀랜드도 21세기의 현실을 살아간다. 하지만 그 꿈의 정신, 즉 대안을 만들 수 있다는 믿음, 다르게 살 수 있다는 용기, 함께 창조한다는 기쁨은 여전히 살아있다.
히피가 자연에서 저항했고, 힙스터가 도시에서 저항했다면, 포틀랜드의 다음 세대는 어디서 무엇을 창조할까?
그것이 포틀랜드가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그리고 그 답은, 언제나 그랬듯이, 동네에서 시작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