샌프란시스코 4th & King 역에서 Caltrain을 탔다. 2024년 가을에 전철화를 완료한 이 기차는 1863년부터 운행해 온 서부에서 가장 오래된 철도 노선이다. 새로 도입된 스위스 Stadler 제작 전기열차는 조용하고, 좌석마다 콘센트가 있다.
창밖으로 베이가 보였다가 사라지며, 기차는 샌프란시스코와 실리콘밸리 사이의 반도(Mid-Peninsula)를 달린다. 1980년대 후반 대학원 재학 시절, 이 구간의 도시들은 오랫동안 그저 ‘지나치는 곳’이었다. Highway 101과 Caltrain 노선 위에 길게 늘어선 주택가, 조용한 교외, 침실도시. 그러나 최근 몇 년 사이, Caltrain 연선의 풍경이 달라지고 있다.
Burlingame 역은 1894년 건축된 스페인 식민지 부흥 양식의 역사적 건물이다. 역에서 나와 California Drive를 따라 걷자 곧 Burlingame Avenue가 나타난다. 현지에서 'The Avenue'라고 부르는 이 거리는 수백 개의 상점과 식당이 밀집한 다운타운 중심부다. 샌프란시스코 공항에서 차로 5분 거리지만, 이곳은 공항 근처 교외가 아니라 그 자체로 완결된 다운타운이다.
Alana's Cafe를 지난다. 1993년부터 영업한 이 작은 카페는 스웨덴식 오트밀 팬케이크와 브런치로 유명하다. 그 옆으로 Copenhagen Bakery, Maison Alyzée 같은 유럽풍 베이커리들이 이어진다. Pizzeria Delfina, Stella, Mingalaba까지, 거리는 다양한 음식으로 가득하다.
화려하지 않지만 안정적이다. 대규모 쇼핑몰이나 상징적 랜드마크는 없다. 대학 시절 친구는 벌링게임 공공 도서관(Burlingame Public Library)을 이 도시의 앵커 시설이라고 설명한다. 카페와 서점까지 갖춘 주민 중심 도서관에 들어서자, 마치 내가 이 동네 주민이 된 듯한 친근함이 느껴진다. 벌링게임을 다시 찾는다면, 나는 이곳을 나의 베이스캠프로 삼고 싶다.
이 도시가 AI 시대의 기술 인력과 스타트업이 선호하는 거점이 된 데는 이유가 있다. Burlingame은 샌프란시스코 투자자들과 Palo Alto·Mountain View 기술 커뮤니티를 Caltrain 하나로 연결한다. 비싼 샌프란시스코 중심부도, 외딴 교외도 아닌, 이동과 생활을 동시에 해결할 수 있는 위치다.
실제로 이곳에는 주목할 만한 기업들이 자리 잡았다. Lyra Health는 2015년 설립된 워크포스 멘털 헬스 플랫폼으로, 전 세계 1,500만 명 이상에게 서비스를 제공하며 9억 달러 이상의 투자를 유치했다. AI 기반 매칭 기술로 직원들을 적합한 정신건강 전문가와 연결하는 이 회사는 Burlingame의 287 Lorton Avenue에 본사를 두고 있다. unitQ는 사용자 피드백을 AI로 분석해 제품 품질을 모니터링하는 플랫폼을, Color는 유전자 검사와 정밀 의료 서비스를 제공한다.
이들은 대규모 캠퍼스를 짓지 않았다. 대신 Burlingame Avenue 근처 건물에 입주해 직원들이 도보로 카페와 식당을 오가며 생활한다. 일과 생활이 분리되지 않는 직주락 센터, 그것이 이 도시의 정체성이다.
Sanchez Avenue로 방향을 틀었다. 주택가로 들어서자 조용해진다. 1417 Sanchez Avenue, 여기에 마루SF가 있다. 아산나눔재단이 2024년 11월 문을 연 이 공간은 한국 스타트업이 실리콘밸리에 진입하는 거점이다. 11개의 침실과 주방, 공유 업무 공간을 갖춘 이곳은 사무실이라기보다 '일하고 살 수 있는 집'에 가깝다.
다시 기차에 올라 남쪽으로 향한다. Redwood City 역에서 내리자 Broadway가 바로 시작된다. 역과 다운타운의 거리가 짧다. 이것이 이 도시의 강점이다.
Redwood City는 1856년 San Mateo 카운티 청사 소재지가 되었다. 20세기 초반까지 정부·상업의 중심지로 번영했지만, 1960-70년대 교외 쇼핑몰과 함께 쇠락했다. 현지인들은 이 도시를 조롱하며 'Deadwood City(죽은 나무 도시)'라 불렀다.
변화는 1990년대 후반에 시작되었다. 1999년 San Mateo County History Museum이 1910년 건축된 구 법원 건물에 문을 열었다. 이 르네상스 리바이벌 양식 건물 앞에 가려져 있던 1939년 별관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Courthouse Square라는 대형 공공 광장을 만들었다. 법원의 유리 돔은 밤마다 불을 밝히며 11초마다 색이 바뀐다.
2006년 20개 상영관을 갖춘 Century Cinemas 복합시설이 개장했다. 2011년 Downtown Precise Plan이 채택되며 민간 개발이 활성화되었다. 계획 채택 후 2년 동안 제안된 주거 유닛은 이전 50년 동안 건설된 것보다 많았다.
이 도시는 Oracle이 2020년까지 본사를 두었던 곳이고(Redwood Shores), Electronic Arts, Box, Shutterfly 같은 기업들이 여전히 이곳에 있다. 그러나 Redwood City 다운타운이 진정으로 '일하고 살고 즐기는' 직주락 센터임을 보여주는 것은 매년 4월 Fox Theatre에서 열리는 Startup Grind Global Conference다.
Startup Grind: 다운타운을 점령하는 스타트업 축제
2013년 Mountain View에서 500명 규모로 시작한 이 행사는 지금 매년 약 5,000명의 스타트업 창업자, 투자자, 기술 리더들이 모인다. 2일간 다운타운 전체가 스타트업 커뮤니티의 공간으로 바뀐다.
Courthouse Square를 걸었다. 광장 중앙에는 행사를 위한 대형 텐트가 설치되어 있다. Fox Theatre 메인 무대에서는 Airbnb 공동창업자, Box CEO 같은 실리콘밸리 주역들이 창업·펀딩·AI를 주제로 이야기한다. 거리는 폐쇄되고, 다운타운 곳곳의 카페와 식당이 네트워킹 공간이 된다.
Startup Grind는 단순한 컨퍼런스가 아니다. 이것은 Redwood City가 더 이상 침실도시가 아니라, 스타트업 생태계가 일하고 만나고 생활하는 완결된 도시임을 보여주는 연례 증명이다. "우리는 Fox Theatre 메인 무대와 이 도시 자체를 사랑하게 되었다. Redwood City는 우리와 함께 성장해 왔다"라고 Startup Grind 본부는 홍보한다.
기차는 계속 남쪽으로 달린다. Santa Clara 카운티로 넘어와 Mountain View 역에 도착했다. 다른 Caltrain 역보다 분주하다. Mountain View Transit Center라는 건물도 눈에 들어온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이곳은 미국 교외에서 보기 드문 대중교통 환승역이다. 샌프란시스코와 산호세를 잇는 Caltrain, 그리고 Mountain View에서 시작해 Alum Rock(San Jose)까지 이어지는 VTA Orange Line 경전철이 교차한다.
Mountain View는 Google 본사가 있는 전형적인 ‘캠퍼스 도시’다. 대형 기업이 도시 외곽에 자급자족형 캠퍼스를 구축하고, 직원들은 그 안에서 일하고 먹고 소비한다. 고용은 강하지만, 도심은 생활의 중심으로 작동하지 못한다. 이것이 캠퍼스 도시의 구조다.
그러나 Castro Street를 걷자 예상과 달랐다. Caltrain 역에서 두 블록 떨어진 이 메인 스트리트는 7개 블록에 걸쳐 식당과 카페, 바가 밀집해 있다. Scratch, Eureka!, Olympus Caffe & Bakery, 그리고 베이 에리어 최초의 브루펍 중 하나인 Tied House가 눈에 들어온다. 저녁이 되자 보행자가 눈에 띄게 늘어난다. 대부분 인근 테크 기업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이다.
2022년 Mountain View 시는 Castro Street 일부를 보행자 몰로 전환했다. 대규모 재개발은 없었다. 대신 저녁과 주말의 생활 리듬이 거리를 되살렸다. 매주 일요일 Caltrain 역 주차장에서 열리는 파머스 마켓, 여름철 Thursday Night Live, 9월 Art and Wine Festival이 일상적인 활기를 만든다.
Mountain View 다운타운의 핵심은 교통 허브로서의 위치다. Caltrain과 VTA Orange Line이 교차하는 이 지점은 Peninsula와 South Bay를 연결하는 전환점이다. Castro Street는 캠퍼스와 분리된 저녁거리로 작동하지만, 낮의 고용은 여전히 Google, LinkedIn, Microsoft 같은 외곽 캠퍼스에 집중되어 있다.
미래는 열려 있다. 환승역 중심의 TOD를 주변 환경에 맞게 추진한다면, 직주락 센터로 발전할 기반은 이미 갖추어져 있다. 시 정부가 적절히 방향을 설정한다면, Redwood City처럼 기업과 생활이 다운타운에서 만나는 구조로 전환할 잠재력도 충분하다.
세 가지 도시, 하나의 구조
Caltrain을 타고 세 도시를 오가며 본 것은 명확한 패턴이다.
Burlingame은 기존 다운타운이 AI 시대의 새로운 수요에 자연스럽게 대응했다. Lyra Health 같은 헬스테크 기업, unitQ 같은 AI 플랫폼이 대규모 캠퍼스 없이 다운타운에 입주하며 직주락 센터를 만들었다.
Redwood City는 역사적 자산을 활용해 공공 공간을 만들고, 명확한 계획으로 민간 개발을 유도했다. 그리고 Startup Grind 같은 대규모 행사를 통해 다운타운 전체를 스타트업 생태계의 거실로 만들었다. Oracle, Electronic Arts, Box가 이 지역에 자리 잡은 것도 우연이 아니다.
Mountain View는 캠퍼스 도시였지만 저녁거리를 회복했다. Google 같은 거대 기업이 있어도, Castro Street는 저녁과 주말의 독립적인 생활 문화를 유지한다. 완결된 다운타운보다는 교통 허브와 저녁거리로서의 역할이 더 중요하다.
세 도시의 경로는 달랐지만, 공통점이 있다. 첫째, Caltrain과의 직접적 연결. 세 도시 모두 역에서 다운타운까지 도보 5분 이내다. 둘째, 대형 쇼핑몰이나 상징적 개발보다 일상적 생활 밀도를 우선했다. 셋째, 고용만이 아니라 '일하고 살고 즐기는' 직주락 센터를 지향했다.
기차에서 내려 거리를 걸으며 생각했다. 교외 도시의 다운타운화는 거대한 신규 투자 없이도 가능하다. 160년 된 철도, 역사적 건물, 공공 광장, 그리고 그 위를 다시 걷는 사람들. 때로는 새로운 인프라가 아니라, 이미 있던 선로 위를 다시 연결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