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크 카니 캐나다 수상이 2026년 다보스 세계경제포럼(WEF) 무대에서 '중견국 외교의 부활'을 선언했습니다. 국제질서의 안정은 패권국의 선의만으로 유지되지 않습니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두터운 중산층이 정치 체제를 떠받치듯, 국제체제에서는 중견국들의 ‘팔로워 리더십(Follower Leadership)’이 필수적입니다. 제가 이를 ‘중견국 안정 이론’이라 불러온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중견국의 역할을 다시 강조하는 목소리가 나온 것은 분명 반가운 일입니다.
다만 캐나다가 이토록 열정적으로 스스로를 ‘중견국’이라 정의하는 모습은 흥미로우면서도 신중한 질문을 던지게 합니다. 캐나다는 레스터 피어슨 총리 이래 중견국 외교의 개념을 개척한 국가이지만, 그간의 대외 정책이 항상 하나의 궤적을 유지해 온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대표적으로 스티븐 하퍼 정부(2006~2015) 시절, 캐나다는 중견국들의 다자 협력체인 G20보다 G7과 같은 전통적인 강대국 협의체에 정책적 비중을 두는 경향을 보였습니다. 2010년 토론토 G20 정상회의를 주최하면서도, 내부적으로는 G7 중심의 의사결정 구조를 우선시하며 다자주의 거버넌스인 G20의 역할을 제한적으로 해석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정책적 선택은 캐나다 외교 정체성에 대한 국제사회의 의구심을 자아냈고, 중견국으로서의 확고한 리더십을 구축하는 데 적지 않은 과제를 남겼습니다.
카니 수상은 연설에서 ‘규칙 기반 질서의 종언’을 선언하며 사안별로 파트너를 바꾸는 ‘가변적 기하학(Variable Geometry)’을 제안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간과해서는 안 될 본질적인 전제가 있습니다. 중견국 외교는 기본적으로 보편적 가치와 규칙이 존중되는 ‘자유주의 국제질서’라는 토양 위에서만 비로소 실효성을 갖는다는 점입니다.
사실 '가변적 기하학'은 1990년대 이후 패권국이 다자주의의 제약을 우회하여 전략적 이익을 관철하고자 사안별 연합을 구성할 때 활용하던 논리이기도 합니다. 카니 수상 이 질서의 종말을 기정사실화한 것은 다소 성급한 진단일 수 있으며, 자칫 중견국 외교의 도덕적·실천적 근간을 흔들 위험이 있습니다. 중견국의 진정한 미션은 무너져가는 질서를 방치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복원하고 강화하는 데 있습니다. 규칙이 부재한 ‘이슈별 연대’는 결국 강대국의 선택적 협력에 이용될 뿐이며, 중견국은 다시금 강대국의 전략적 도구로 전락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카니 수상이 제안한 ‘중견국 연대’가 화려한 수사를 넘어 실질적인 힘을 얻으려면, 중견국 연대에 대한 실질적인 대안을 제시해야 합니다. 협력하고 싶은 중견국이 누구이며, 이들과 어떻게 협력할지가 중요합니다. 그러나 현재 카니 수상의 연설은 캐나다의 개별적인 외교 전략만을 나열하는 데 그치고 있습니다. 연설에서 언급된 EU와의 전략적 파트너십, 중국·카타르와의 개별적 관계 강화, 북극권 안보를 위한 그린란드·덴마크와의 협력 등은 모두 캐나다의 국익에 기반한 단독 외교의 파편들일뿐입니다. 이러한 '사안별 연합'의 나열만으로는 중견국들이 강대국의 패권 다툼에 공동으로 대응할 수 있는 체계적인 진용을 갖추기 어렵습니다.
진정한 중견국 리더십은 각자도생의 양자 외교를 넘어, 중견국들이 정상급에서 목소리를 결집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플랫폼인 G20에 화력을 집중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G20는 선진국과 신흥국이 공존하며 전 세계 GDP의 85%를 대변하는 글로벌 거버넌스의 정점이자, 중견국들이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전략적 공간을 확보할 수 있는 유일한 정상급 무대입니다.
특히 G20 내 핵심 중견국 협의체인 MIKTA(멕시코, 인도네시아, 한국, 터키, 호주)는 중견국들이 공통의 가치를 바탕으로 집단적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최적의 결사체입니다. 중견국 개념의 발원지인 캐나다가 정작 가장 활발한 중견국 협의체인 MIKTA에 참여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은 여전히 보완해야 할 지점입니다. 캐나다가 진정으로 중견국 리더십을 원한다면, 전통적인 소수 강대국 그룹인 G7이라는 안락한 성벽에서 내려와 G20 내에서 MIKTA 국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자유주의 다자 질서를 수호하는 데 더욱 헌신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