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 보헤미안에서 상인 보헤미안으로
보헤미안 운동은 19세기 초에 등장했다. 파리 예술가를 중심으로 부르주아 계급과 물질주의에 대한 저항에서 출발했다. 자연주의, 미술 공예 운동(Arts and Crafts Movement), 바우하우스(Bauhaus), 사회 복지, 환경주의, 사회주의 등 수많은 유산을 남긴 19세기 보헤미안 운동은 제1차 세계 대전을 기점으로 막을 내린다. 아쉽게도 보헤미안이 19세기 내내 갈망했던 경제적인 독립은 끝내 실현하지 못한다.
19세기 보헤미안은 왜 실패한 것일까. 창조 도시에서 정부와 자본으로부터 독립성을 확보한 21세기 보헤미안의 사례를 보면 교훈을 얻을 수 있다. 19세기 보헤미안은 21세기 보헤미안과 같이 도시를 활용하지 못했다. 그 이유는 보헤미안의 정체성에서 찾을 수 있다. 도시를 활용하기 위해서는 상인이 되어야 했지만, 상인에 대한 적대감을 중심으로 형성된 보헤미안의 정체성이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반부르주아 운동으로 시작된 보헤미안 운동
부르주아에 대한 보헤미안의 반감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반응이었다. 전근대 사회에서 귀족에 의존했던 예술가는 근대 사회로 넘어오면서 귀족으로부터 독립했다. 그러나 그 자유는 오래가지 않았다. 새로운 고객으로 등장한 대중을 만족시키고, 시장에서 경쟁해야 하는 것이 그렇게 녹록지 않았다. 특히 시간이 지날수록 지배력을 강화한 부르주아를 상대하기가 어려웠다. 자신보다 아래 계급으로 여겼고 ‘가게 주인(Shopkeeper)’이라 폄하했던 부르주아가 지배 계급에 올랐으니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예술가가 부르주아, 그리고 부르주아에 순응한 중산층에 분개한 이유는 그들의 물질주의 때문이다. 정확히는 인간의 창의력을 억제하는 물질주의의 획일성에 반발한 것이다. 기질적으로 영웅적인 행동, 혁명적인 변화를 선호하는 예술가에게 부르주아 질서에 순응하는 중산층 역시 경멸의 대상이었다. 파리의 예술가들은 자신의 소외를 저항을 통해 해소하려 했다. 도시에 부르주아가 접근할 수 없는 자신만의 구역을 만들었다. 머리를 기르고 기이한 복장을 입으며 자신을 차별화했다. 부르주아에게는 전투적으로 저항했다. “부르주아를 떨게 만들자 (Shock the Bourgeois)”가 파리의 보헤미안이 흔히 쓰는 구호였다. 이러한 보헤미안의 부르주아에 대한 적대감은 노동자, 범죄자, 극빈자 등 사회 소외층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19세기 현실주의자들은 부르주아 사회의 어두운 면을 그림, 조각 등으로 적나라하게 표현했다. 그중 일부는 부르주아 문화에 오염되지 않은 아프리카, 아시아의 이국적인 문화를 찬양했다.
보헤미안의 어원은 체코 공화국의 한 지역인 보헤미아(Bohemia)에서 비롯되었다. 방랑 생활을 하는 집시들이 보헤미아 지역에서 유래했다고 생각한 프랑스인들은 집시를 보헤미안이라고 불렀다. 19세기 초 예술가들이 집값이 싼 집시 지역에 모여 살기 시작하면서 대안적 라이프스타일을 추구한 예술가를 보헤미안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보헤미안 예술가의 차별성은 라이프스타일이다. 한 지역에 오래 머무르지 않는 방랑자적인 자유분방한 삶을 살았고, 돈이 없어도 근심하지 않았으며 때로는 일부러 가난하게 살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모든 보헤미안이 무명으로 산 것은 아니다. 보헤미안 운동은 많은 예술가를 배출했고 다양한 형태로 19세기 파리 예술계에 영향을 미쳤다.
보헤미안과 프랑스 문화사
보헤미안 운동의 가장 큰 예술적 유산은 19세기 낭만주의와 자연주의다. 19세기 프랑스 예술은 7월 왕정의 낭만주의에서 제2제정기의 자연주의로 전환하는 것이 큰 흐름이다.
아놀드 하우저(Arnold Hauser)에 따르면 보헤미안 주의는 스탕달과 발자크가 주도한 낭만주의 문학, 플로베르와 쿠르베가 대표하는 자연주의 예술의 발전에 모두 기여했다. 먼저 낭만주의는 18세기를 지배한 계몽주의와 고전주의에 대한 반발에서 시작되었다. 개인의 감수성과 창조성을 중시한 낭만주의자들은 계몽주의가 강조한 이성, 고전주의가 제시한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미의 기준을 거부했다. 기존 사회의 질서를 거부하고 인간이 만든 사회보다는 자연과 인간의 내면에 진실이 있다고 믿는 것이 낭만주의에 내포된 보헤미안적 가치다.
노동자와 평민의 일상을 작가의 예술적 개입 없이 있는 그대로 묘사한 자연주의는 더욱더 보헤미안 철학과 가까웠다. 자연주의는 부르주아에 대한 정치적인 저항 운동이었다. 자연주의의 과학주의로 불리는 플로베르의 소설, 쿠르베의 회화는 거의 기계적으로 당대 사회의 모순과 갈등을 부각하며 기존 사회에 저항했다.
자연주의 작가는 적극적으로 보헤미안 라이프스타일을 실천했다. 플로베르, 보들레르, 졸라가 도시에서 자본주의로부터의 도피처로 선택한 장소가 거리였다. 더럽고 위험한 파리의 거리가 산책을 즐기기 좋은 거리로 변신한 것은 1830년대다. 당시 파리 시장이 파리의 거리에 가스등을 설치하고, 공중변소를 만들었다.
이때 파리에는 양쪽에 가게들이 들어선 거리 위를 유리 천장으로 덮는 파사주(Passage)가 유행한다. 1850년대 백화점이 등장하기 이전 파리 시민들이 즐겨 찾던 상업 지구였다. 영어로는 아케이드(Arcade)라고 불린 이 회랑식 상가는 프랑스 지식인들이 서민 문화를 관찰하기 위해 찾은 장소였다. 이 지역은 역설적으로 1930년대 독일 문화 비평가 발터 벤야민이 근대 자본주의의 물신성을 발견하고 비판한 장소가 된다.
19세기 파리의 보헤미안이 산책자 문화에 빠진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기존 질서와 규칙에 자유스럽고 싶은 보헤미안에게 산책은 그 자체로 자본주의에 대한 저항 행위로 볼 수 있다. 천천히 목적 없이 걷는 행위는 경쟁적인 부르주아 문화나 질서와는 무관하기 때문이다. 또한 보헤미안 작가에게 산책하며 관찰한 대중의 삶은 중요한 창작의 소재였다.
영국, 독일, 미국의 보헤미안 운동
영국에서는 존 러스킨(John Ruskin)과 윌리엄 모리스(William Morris)가 예술을 통한 대안 운동을 주도했다. 19세기 중반 영국에서 시작된 미술 공예 운동이 대표적인 보헤미안 운동의 성과다. 미술 공예 운동은 산업 사회의 물질주의와 정신과 분리된 기계적 노동의 대안을 중세 수공업과 가내 공업에서 찾았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하우저의 비판대로 미술 공예 운동은 하나의 낭만주의에 불과했다. 수공업 생산으로 기계의 지배를 견제할 수 있다고 믿은 것은 순진한 생각이었다.
역설적으로 미술 공예 운동은 적지 않은 산업적 유산을 남겼다. 적은 수의 생산자가 작은 공간에서 서로 협력해 한 가지 일을 완결하는 현대 건축과 공업 미술의 스튜디오 생산 방식, 그리고 이를 통해 이루는 실용성과 견고함은 미술 공예 운동의 노력과 이론의 결과다.
현대 디자인 산업도 미술 공예 운동의 유산이다. 벽면 장식으로부터 스테인글라스, 가구, 섬유 디자인 등 모든 실내 장식품을 생산한 최초의 상업적 디자인 회사인 모리스 마샬 포크너사(Morris, Marshall and Faulkner Company)는 1861년 모리스가 친구들과 설립한 회사다. 모리스 사망 후에도 1940년까지 운영된 이 디자인 회사는 상업적으로 크게 성공해 현대 디자인 산업을 개척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독일의 보헤미안 문화가 이룬 성과가 바우하우스의 기능주의다. 1919년에 설립된 바우하우스는 나치의 탄압으로 14년 만에 문을 닫지만 모더니즘 건축, 현대 산업 디자인의 시발점으로 기억된다. 영국의 미술 공예 운동가들과 달리 독일의 디자이너들은 공업화를 피하지 않고 공산품에 예술을 접목시킨다. 전자가 귀족을 위한 사치품으로 ‘전락한’ 수공예품을 생산했다면, 후자는 모든 사람이 사용하는 상품을 디자인하는 일을 선택했다.
공업의 예술화 과정에서 디자인 개념을 현대 기업에 최초로 도입한 AEG(아에게, 독일 전기기기 제조업체)의 디자인 책임자 페터 베렌스(Peter Behrens)가 주도적인 역할을 한다. 1907년 AEG의 로고를 디자인하는 등 AEG 디자인에 기여한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기여는 미래의 바우하우스 지도자를 훈련시킨 것이다. 바우하우스의 설립자 발터 그로피우스(Walter Gropius), 3대 교장 미스 반 데어 로에(Mies van der Rohe),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가 베렌스의 조수로 일했다. AEG와 바우하우스가 개척한 기능주의 디자인 전통은 애플, 이케아 등 현대 글로벌 기업의 디자인 철학으로 계승된다.
미국, 독일, 스칸디나비아에서 나타난 또 하나의 보헤미안 운동이 초월주의이다. 미국의 보헤미안은 유럽과 달리 산업 사회에 대한 대안을 사회주의 또는 중세 기독교적 공동체가 아닌 자연, 그리고 단순한 삶에서 찾았다. 라이프스타일의 특성도 예술가보다는 자연주의자에 가까웠다. 물질주의와 합리주의를 초월해 내면의 영적 상태에서 의미와 평화를 찾는다는 의미의 초월주의를 신봉한 사람들은 랠프 월도 에머슨(Ralph Waldo Emerson), 헨리 데이비드 소로(Henry David Thoreau) 등 뉴잉글랜드 지역의 시인과 철학자였다. 이들은 도시의 거리보다는 숲 속에서 초월적인 경험을 추구했다. 소로가 잠시 살았던 자연 속의 월든 호반이 초월주의 라이프스타일의 상징이 됐다. 19세기 초월주의는 20세기 환경 운동이라는 큰 유산을 남긴다.
19세기 보헤미안 시대의 종말과 유산
다수의 보헤미안은 20세기로 넘어오면서 이상주의와 허무주의에 빠진다(Allan Bloom). 일부는 사회주의를 적극적으로 지지한다. 허무주의는 무기력증에서 왔을 가능성이 높다. 보헤미안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는 더욱 팽창해 모든 영역에서 자본이 지배하는 도금 시대를 연다. 19세기 후반 미국의 도금 시대는 『위대한 개츠비(The Great Gatsby)』의 배경으로도 등장하는 ‘광란의 20년대’(The Roaring Twenties)로 이어진다.
가장 먼저 보헤미안 운동이 쇠퇴한 곳은 운동이 시작된 프랑스다. 프랑스의 보헤미안 사조는 제1차 세계 대전이 시작한 1914년에 종료된다. 바우하우스에 대한 나치의 탄압에서 볼 수 있듯이, 독일의 보헤미안 역사도 해피 엔딩으로 끝나지 않는다.
보헤미안에게 가장 치욕적인 역사는 1930년대에 쓰인다. 보헤미안은 1930년대 유럽에서 확산되는 전체주의에 조직적으로 저항하지 못하고 무기력하게 무너진다. 19세기에 시작된 ‘위대한 보헤미안’ 실험은 1930년대 대공황, 전체주의, 그리고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종료된다. 이후 20세기 보헤미안은 19세기 보헤미안의 경험을 바탕으로 자본주의와 공존하는 새로운 방법을 찾는다.
첫째는 대중문화 산업의 개척이다. 20세기 전반 영화, 대중음악 등 예술성보다는 상업성에 기반한 새로운 문화 산업이 등장한다. 예술과 문화 기업을 통해 부를 축적하는 예술 자본가들이 대중문화 산업을 장악한다. 로스앤젤레스의 할리우드, 뉴욕의 브로드웨이가 현대 문화 산업을 대표하는 상징으로 부상한다. 보헤미안이 자본주의와 시장 경제를 거부하기보다는 그 안에서 경제적 기회를 찾은 것이다.
둘째는 새로운 기술의 활용이다. 20세기의 가장 큰 변화는 대중문화 산업을 가능하게 만든 기술 발전이다. 현재 진행되는 4차 산업 혁명의 여파로 갤러리, 미술관, 오케스트라 등 순수 문화 산업도 전환기를 맞고 있다. SNS, 유튜브의 등장으로 소수의 전문가와 중개 기업이 산업 전체를 통제하기가 어려워졌다. 중개 기업을 통하지 않고 대중 속으로 직접 진출해 성공하는 예술가가 늘고 있다. 현대 보헤미안에게 주어진 기회는 전통적인 문화 산업에 한정되지 않는다. 문화 산업의 영역이 생활 산업과 리테일 산업으로 확장되고 있다.
셋째가 창조 도시의 개척이다. 앞서 「도시에서 안식처를 찾은 보헤미안」챕터에서 강조했듯이 예술가는 이제 스타트업, 전문직과 같은 창조 계급으로서 창조 도시의 성장을 주도한다. 19세기 보헤미안과 달리 21세기 보헤미안은 도시와 공간을 기반으로 독립적인 산업 영역을 확보했다.
창조 도시의 확산으로 상인 보헤미안이 늘고 있다고 해서 그들이 보헤미안의 다수가 됐다고 평가하기는 아직 이르다. 예술과 산업의 공존에도 불구하고 보헤미안의 기질은 변하지 않았다. 다수의 예술가는 지금도 예술성과 상업성의 사이에서 반시장, 반자본주의 성향을 보인다. 예술의 상업주의를 극복하고 예술을 위한 예술을 복원할 수 있는 대안을 끊임없이 찾는다. 그러나 미래는 다를 것이다. 기술과 공간으로 무장한 상인 보헤미안이 예술가 보헤미안을 대신해 보헤미안 계급을 이끌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