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이후 보헤미안에서 시작된 반문화 운동은 꾸준히 부르주아 패권에 도전한다. 보헤미안 운동이 종료된 1920년 이후에도 힙스터(1940년대), 비트(1950년대) 등 새로운 반문화가 순차적으로 등장한다. 1960년대 등장한 히피 운동도 정치 운동, 생활 운동 순으로 기성 문화를 강타한다.
그렇다면 1940년대 힙스터, 1950년대 비트닉(Beatniks), 1960년대 히피 운동가, 1960년대 히피 생활 혁신가 중 누가 미국의 역사를 바꿨을까? 이견이 있을 수 있으나 대개는 미국의 라이프스타일 시대를 오픈한 1960년대 히피 운동가를 꼽을 것이다.
1960년대 히피 운동의 기원은 1940년대 힙스터 문화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힙스터란 단어는 1930년대 ‘여성 재즈 댄서’을 지칭하는 낱말로 처음 사용된다. 1940년대에 들어오면 이 단어의 의미가 ‘흑인 재즈 음악을 좋아하는 백인 중산층 젊은이들’로 확대된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벌어지는 혼란기 중에 뉴욕의 일부 백인 청년들은 흑인 음악과 댄스를 즐기기 위해 흑인 지역을 자주 찾는다. 이들은 재즈 음악만 좋아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재즈 음악가의 라이프스타일 자체를 따르는 것이 유행이 된다. 재즈 음악가의 옷을 입고 그들의 말투를 따라 할 뿐 아니라 마리화나와 같은 마약을 흡입하고 개방적인 성생활을 즐기며 일부러 가난하게 사는 모습을 보이는 등 주류 사회에 저항하는 행동을 한다.
힙스터 청년들의 저항은 미국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를 반영한다. 1930년대 대공황을 극복하고 풍요로운 소비 사회로 진입한 미국 사회는 인종, 여성 등 새로운 사회 문제에 직면한다. 개방적이고 진보적인 성향의 청년 세대가 맞닥뜨린 첫 번째 고민이 인종 문제다. 공정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먼저 인종 문제를 극복해야 했고 흑인 사회와 그들의 문화를 이해하고 수용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가 되었다. 흑인 사회와의 공감대를 찾는 청년들에게 매력적인 흑인 문화로 다가간 것이 재즈였다.
이처럼 초기부터 저항 문화의 성격을 가졌던 힙스터는 1940년대를 거치면서 비트 세대(Beat Generation)로 자연스럽게 진화한다. 1960년대 히피 운동의 기반을 세운 것으로 평가할 수 있는 1950년대 비트들은 1940년대 힙스터와 같이 기존 중산층 소비문화를 배격했고 개인의 자유, 실험적 도전, 성적 해방 등의 대안적 가치를 추앙하고 대기업과 군수 산업에 적대적이었다. 하지만 1950년대 비트와 1940년대 힙스터가 같은 성격의 운동은 아니다. 1940년대 힙스터가 대중 운동이었다면 1950년대 비트 세대는 문학 운동의 성격이 강했다. 잭 케루악(Jack Kerouac), 알렌 긴스버그(Allen Ginsberg), 윌리엄 버로스(William Burroughs) 등 컬럼비아대에서 함께 공부했던 지식인들이 비트 세대를 주도했다.
1920년대 보헤미안 운동과의 차이도 흥미롭다. 1920~1930년대 보헤미안 운동이 유럽을 떠난 지식인들이 뉴욕의 그리니치빌리지에 모여 유럽의 혁명적 아이디어를 토론했다면, 1950년대 비트 운동은 지극히 미국 서민층에서 보헤미안 정체성을 찾고자 노력했다. 잭 케루악의 대표작 『길 위에서(On the Road)』는 두 청년이 자동차를 몰고 전국을 다니며 서부의 자연, 작은 마을의 농부, 도시의 소외된 노동자와 청년에서 자아 정체성을 발견하는 과정을 묘사한다.
1950년대 비트와 1960년대 히피의 차이도 중요하다. 유토피아를 지향하고 실현을 위해서는 투쟁과 폭력도 불사한 히피와 달리 비트는 현실주의적이고 개인의 영적 깨달음(Awakening)을 강조했다. 비트 리더들의 사상은 명상과 고행을 강조한 불교 철학에 가까웠다.
잭 케루악, 앨랜 긴즈버그, 윌리엄 버로스 등 뉴욕 출신의 비트 작가들은 샌프란시스코로 이주, 그곳에서 비트를 문학의 한 장르로 발전시킨다. 그들이 모인 장소는 이탈리안 이민자 로렌스 펠링게티가 창업한 노스비치 지역의 독립 서점 시티 라이츠 북스(City Lights Books)였다. 역사 때문인지 이 서점은 지금도 비트 문학 작가의 책으로 채워져 있다. 카운터 컬처 추종자들은 지금도 비트 문학을 그들의 바이블로 읽는다.
비트 운동은 1950년대 말에 자연스럽게 1960년대의 히피 운동과 통합되었다. 미국 사회의 기반을 뿌리째 흔들 만큼 격렬했던 히피 운동은 이후 등장한 모든 문화 운동과 서브컬처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2000년대 본격적으로 등장한 현대 힙스터도 예외가 아니다.
1960년대 미국을 휩쓴 히피즘의 본질은 탈물질주의다. 히피 문화는 1960년대 중후반 베트남 전쟁을 반대하며 일어난 저항 운동이다. 당시 미국 젊은이들은 주류 문화와 기존 사회 질서에 반기를 들고, 사랑, 평화, 자유를 추구하며, 물질문명이 아닌 정신적 가치와 인간성 회복을 주장했다.
그들의 저항 정신은 우드스톡(Woodstock)으로 대표되는 록 음악을 비롯해 패션, 미술 등 다양한 예술 분야에서 다채롭게 표출되었고 사회에 큰 변화를 일으켰다. 히피 이론가, 지도자, 중심지(캘리포니아, 샌프란시스코, 버클리), 문화(명상, LSD, 사이키델릭, 공동체 등)가 히피 역사를 주도했다.
그러나 1950년대 저항 운동만이 히피 운동의 부상에 기여한 것은 아니다. 1950년대 심리학, 경영학, 사회학 등 주류 학문에서 기득권 부르주아 문화를 비판하는 도서를 끊임없이 출판했다. 유아의 다양성을 존중하고 개인주의 교육을 장려한 벤저민 스포크(Benjamin Spock)의 ‘『유아와 육아의 상식’, (Dr. Spock's Baby and Child Care)』, 산업 사회 엘리트의 위선을 폭로한 C 라이트 밀스(C Wright Mills)의 『파워 엘리트(The power elite)』, 기득권의 대학 교육을 통한 신분 유지를 비판한 디그비 발트첼(E. Digby Baltzell)의 『프로테스탄트 기득권(The Protestant Establishment)』 등이 기존 문화와 제도의 한계를 비판함으로써 대안 문화 부상의 지적 토대를 마련했다.
히피 운동이 본격적으로 태동한 지역은 샌프란시스코 헤이트 애시베리(Haight Ashbury)다. 이 작은 동네에 1960년대 초반부터 대안적 라이프스타일을 찾는 미래의 히피들이 몰리기 시작했다. 히피들은 커피숍, 사이키델릭 숍, 무료 보건소와 자활 센터, 무료 슈퍼마켓, 동네 탁아소, 연장 대여소, 공동 정원과 텃밭 등을 운영하면서 자신이 사는 지역에서 공동체 생활을 실천하고 그 과정에서 새로운 히피 문화와 히피 비즈니스를 개척했다.
히피 주식회사(Hippie Inc.)의 마이클 클라센(Michael Klassen)은 소설가 켄 케시(Ken Kesey)를 히피 운동의 대표적인 인물로 평가한다. 케시는 1962년 정신병원이라는 전체주의 사회에 저항하는 환자들을 그린 소설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One Flew Over the Cuckoo's Nest)』를 발표해 인기 작가의 반열에 오른다. 그러나 그는 1964년, ‘즐거운 장난꾼들(Merry Pranksters)’이라 자칭한 친구들과 낡은 스쿨버스를 타고 미국 전역을 여행하면서 애시드 테스트(Acid Test)라 불리는 환각제 파티를 연다. 이후 샌프란시스코 남부 산악 지대의 작은 도시 라 혼다(La Honda)에 작은 자연 공동체를 만들어 생활에서 히피 가치를 실천한다. 1950년대 후반 알렌 긴즈버그, 잭 케루액 등 비트 세대 작가와 교류한 케시는 스스로를 비트 세대와 히피 운동을 연결하는 인물로 평가한다. 케시의 책을 읽고 미국의 젊은이들은 기성 사회에서 뛰쳐나온다. 샌프란시스코 히피 운동은 1967년 ‘사랑의 여름(Summer of Love)’, 1969년 ‘우드스톡(Woodstock)’ 축제를 분기점으로 쇠락한다.
히피 운동이 사회 운동으로 단명한 배경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작용했다. 마약, 자유 섹스, 집단생활, 가족 거부 등 1960년대 전성기 당시에도 히피는 사회적 문제를 야기했고, 무엇보다 베트남 징병을 피하려는 엘리트가 주도했기 때문에 대중에 뿌리가 약했다. 운동 자체가 상업적으로 흘러 헤이트 애시베리 히피들이 1967년 여름 히피 장례식을 열 정도로 내부 역동성을 상실했다. 1969년 닉슨 집권 후 베트남에서 철수하기 시작한 것도 히피 운동의 쇠락에 기여했다. 히피 운동을 견인했던 반전 운동의 명분이 약해진 것이다. 그러나 히피 운동에 결정적으로 타격을 준 사건은 1969년 찰스 맨슨(Charles Manson) 사건이었다. LA 주변에서 히피 공동체를 운영하던 그와 추종자들이 인종 전쟁을 부추기기 위해 이틀간 두 번에 걸쳐 7명을 죽인 사건이다.
쿠엔틴 타란티노(Quentin Tarantino) 감독은 2019년 영화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Once Upon a Time in Hollywood)」에서 이 사건을 적나라하게 묘사한다. 영화에서는 맨슨 멤버들의 공격을 받은 클리프 부스가 이들을 퇴치하지만, 실제 사건에서는 그들이 로만 폴란스키의 집에 침입해 그의 아내 샤론 테이트를 비롯해 5명을 잔인하게 살인했다. 당시 테이트는 임신 9개월의 임산부였다. 물론 맨슨 갱이 실제 히피였는지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 하지만 미국 대중들은 히피 극렬분자들이 아무 이유 없이 무고한 사람들을 살해했다고 생각해 히피들을 적대시하기 시작했다.
1968년 이후 히피 운동의 중심은 생활 혁신으로 옮겨진다. 1968년에 히피 생활 가이드를 담은 매거진 『전 지구 목록』이 발행되어 생활 운동을 주도한다. 여기에는 대안적 라이프스타일의 핵심 개념인 자급자족, 생태, 대안 교육, DIY, 홀리즘(Holism)을 실현할 수 있는 생활 기술, 도구, 상품이 소개되었다. 2000년대 이후 한국에 도입된 많은 라이프스타일 아이디어와 상품의 기원도 이 매거진에서 찾을 수 있다. 이후 『전 지구 목록』은 스티브 잡스가 2005년 스탠퍼드대 졸업식 연설에서 ‘1960년대 구글(Google)’로 소개하면서 다시 유명해진다. 이 연설에서 인용한 명언 ‘늘 배고프고, 늘 어리석어라(Stay Hungry, Stay Foolish)’도 『전 지구 목록』의 커버에 쓰였던 카피다.
이 매거진를 발행한 스튜어트 브랜드(Stewart Brand)는 ‘1960년대 뉴레프트는 우리에게 풀뿌리 정치 권력의 행사를 요구했지만, 우리는 그 대신 풀뿌리 직접 권력(Direct Power)의 행사 즉, 생활의 도구와 스킬을 지지했다’고 자신의 생활 혁명 철학을 밝혔다.
『히피와 반문화(La Contre Culture)』의 저자 크리스티안 생 장 폴랭(Christiane Saint Jean Paulin)도 1960년대 반문화를 빈곤, 불평등, 인종 차별, 베트남 전쟁, 뉴레프트 운동(소수 인종, 여성에 대한 사회적 권위주의를 거부한 정치 운동)과 미국 중산층의 생활 양식을 겨냥한 히피로 구분한다. 둘 다 산업 사회의 문화로 요약되는 주류적 사고방식과 상반되는 정치적 견해, 생활 양식, 그리고 철학적 개념을 추구했으나 뉴레프트는 정치적 표현, 히피는 사적 표현을 지향했다. 히피 세대가 추구한 ‘일상에서의 문화 혁명’은 그 후 미국과 선진국 사회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뉴레프트는 소수 정치운동으로 남아있지만 히피 세대의 라이프스타일 혁신은 현대 모든 선진국의 생활 양식을 지배한다.
1960년대 당시에도 정치 운동과 생활 운동을 구분 짓는 것은 중요했다. 1964~1965년 언론 자유 운동을 시작한 버클리가 1960년대 신좌파 운동을 주도했다면, 샌프란시스코는 히피의 중심지로 생활 운동을 주도했다. 샌프란시스코와 버클리의 차이를 히피 밴드인 ‘제퍼슨 에어플레인(Jefferson Airplane)’은 불평자와 행동가로, 비트 작가 ‘앨런 긴즈버그(Allen Ginsberg)’는 정치꾼(Politico)과 히피로 구분했다. 히피의 생활 운동은 1990년대에 들어와 미국 주류 사회의 문화로 자리 잡는다.
코린 맥러플린(Corinne McLaughlin)과 고든 데이비드슨(Gordon Davidson)은 자신들의 저서 『더 나은 삶을 향한 여행, 공동체(Builders of the Dawn)』에서 전원 공동체와 뉴에이지 공동체 등 1960년대 히피 공동체를 계승한 다양한 공동체의 활발한 활동을 소개한다. 이들은 1960년대와 1990년대 공동체의 차이가 사회 변혁의 주체에 있다고 본다. 1960년대 공동체가 기성사회의 배척에서 대안을 찾았다면, 1990년대 공동체는 개인의 영적 성장과 더불어 모든 존재와 하나됨을 목표로 한다는 것이다.
생태 공동체와 전원 공동체는 기성 사회 구조와 공존하면서 영향력을 확대해 나간다. ‘1960년대 히피가 승리했다(The Hippies Have Won)’라는 표현으로 히피 라이프스타일의 부상을 공인하는 데까지 이른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현재 도시 문화를 주도하는 새로운 트렌드의 대부분이 히피 문화에서 유래했다.
어떤 과정을 통해 히피 문화가 주류 문화로 편입된 것일까? AMC 네트워크에서 2007~2015년 방영된 미드 「매드맨(Mad Men)」은 1960년대 히피 문화가 주류 문화로 변하는 과정을 그린다.(매드맨은 뉴욕 매디슨 애비뉴에서 일하는 광고인을 뜻한다.)
주인공 돈 드레이퍼(Don Draper)는 한국 전쟁에 참전했으나 전투 중 전사한 동료의 신분증을 위조해 탈영한 군인 출신의 광고 회사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다. 그는 광고 회사에서 일하면서 1960년대 미국 사회 변화를 몸으로 체험한다. 그리니치빌리지에서 작가로 활동하면서 자유분방하게 사는 보헤미안 애인, 힌두교 공동체 운동 ‘하레 크리슈나(Hare Krishna)’에 빠진 동료, 캘리포니아의 여성 해방 운동을 주도하는 여성 친구, 아버지에 반항해 히피 공동체로 들어간 딸 등이 「매드맨」에 등장하는 히피와 문화 저항자다. 하지만 드레이퍼는 히피가 되지 못한다. 대신 그가 선택한 것은 히피 문화의 상업화다. 그는 딸을 찾기 위해 들어간 히피 공동체 ‘빅 서(Big Sur)’에서 새로운 광고 아이디어를 낸다. 다양한 연령과 인종의 사람들이 언덕에 올라 서로 손을 잡고 전 세계인과 코카콜라를 마시고 싶다고 노래하는 광고다. 이것이 바로 광고 역사를 바꾼 코카콜라의 1971년 힐탑(Hilltop) 광고다. 드레이퍼는 히피 문화를 배격하지 않고 이를 창의적인 방식으로 수용한 것이다. 미국 주류 사회는 이 광고를 기점으로 히피 운동의 가치를 수용하였고, 히피 문화는 대중문화의 중심에 들어선다. 힐탑 광고가 ‘히피 발 라이프스타일 혁명’의 시작을 알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토마스 프랭크의 『쿨 문화의 정복(The Conquest of Cool)』도 미국 광고 산업과 패션 산업이 히피 문화를 산업화하는 과정을 설명한다. 프랭크는 미국 대기업의 역할을 수확으로 한정하지 않는다. 대기업이 히피 운동이 이룬 성과를 사후적으로 활용했을 뿐 아니라 초기부터 히피 문화를 지지하고 후원했다고 주장한다. 히피 운동이 막 시작되는 1960년대 초반 이미 미국의 광고 산업과 패션 산업은 1950년대의 획일적인 문화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과 논리를 적극적으로 찾았다는 것이다. 1970년대 주류로 진입하기 시작한 히피 문화는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주류 생활 문화의 패권을 잡았다고 말할 수 있다. 19세기 이후 부르주아에 대항한 반문화 중 유독 히피가 성공한 이유는 단순하다. 정치와 예술 운동에 머무른 반문화와 달리 히피는 생활 운동을 추구했다. 단기적인 정치적인 성과보다는 일상생활의 지속적인 변화를 선택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