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시대의 중산층 경제
최근 만난 한 브랜드 연구 교수가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는 ‘브랜드’라는 단어가 정책 언어로 자리 잡는 과정에 직접 참여한 경험이 있다고 했다. 그 과정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고 한다. 단어 하나를 정책 언어로 만든다는 것은 단순한 개념 정리가 아니라 정치권과 행정, 산업계를 차례로 설득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 이야기를 듣고 한 가지 질문이 떠올랐다. 왜 시대정신을 반영하는 단어들은 정책 언어가 되는 데 이렇게 어려움을 겪는 것일까.
지금 우리 사회에는 이미 새로운 경제를 설명하는 단어들이 등장해 있다. 라이프스타일, 크리에이터, 로컬, 그리고 브랜드다. 이 단어들은 사회와 시장에서는 널리 사용되고 있지만 아직 국가 어젠다의 중심에 자리 잡지는 못했다.
이 단어들이 중요한 이유는 미래 경제의 현실 때문이다. 미래 경제를 이해하려면 두 가지 현실을 동시에 받아들여야 한다. 하나는 AI와 플랫폼 경제가 아무리 성장해도 충분한 일자리를 만들어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그럼에도 청년 세대의 자아실현 욕구는 줄어들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 두 현실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다. 의미 있는 일자리와 지속가능한 중산층 경제는 어디서 올 것인가.
바로 이 지점에서 라이프스타일, 브랜드, 크리에이터, 로컬이라는 네 단어의 의미가 드러난다.
AI와 플랫폼이 대체하기 가장 어려운 것은 맥락이 있는 취향, 장소에 뿌리를 둔 경험, 그리고 개인의 서사에서 비롯된 신뢰다. 라이프스타일은 개인의 취향과 가치관을 소비와 창업으로 연결하고, 브랜드는 개인과 소규모 사업자가 자본이 아니라 철학과 이야기로 시장에서 경쟁할 수 있는 무기가 된다. 크리에이터는 이 모든 것을 실행하는 주체다. 단순한 콘텐츠 생산자가 아니라 자신의 라이프스타일을 콘텐츠로 만들고 브랜드로 시장과 직접 연결하는 새로운 경제적 개인이다.
그리고 이 세 요소가 실제 경제로 작동하는 공간이 바로 로컬이다. 도시의 감성을 담은 오프라인 공간, 지역 장인의 손끝에서 나오는 제품, 한 사람의 삶이 축적된 브랜드는 대부분 특정 지역에 뿌리를 두고 성장한다. 동네가 브랜드가 되고 골목이 경제 생태계가 되는 현상이 바로 그것이다.
이 단어들 중 그나마 국가 차원의 어젠다로 가장 가까이 접근했던 단어는 앞서 이야기한 동료 교수가 참여했던 ‘브랜드’였다. 이명박 정부는 ‘국가브랜드위원회’를 통해 국가 이미지를 전략적으로 관리하려 했고, 박근혜 정부는 ‘크리에이티브 코리아’와 문화융성 정책을 내세웠다.
그러나 두 국가 브랜드 정책은 공통된 한계를 지녔다. 브랜드를 국가 이미지와 관광 홍보의 언어로 이해했을 뿐, 개인과 지역이 경제적 주체로 성장하는 전략으로 확장하지 못했다. 국가 브랜드는 대외 이미지를 관리하는 홍보의 언어지만, 개인 브랜드와 로컬 브랜드는 개인과 지역이 스스로 경제적 주체가 되는 자생의 언어다.
정책화의 한계는 최근 정치 담론에서도 쉽게 확인된다. 지방선거 공약과 정책 토론을 살펴보면 첨단산업 유치, 교통 인프라 확충, 대규모 개발 같은 익숙한 언어는 넘쳐난다. 라이프스타일, 브랜드, 크리에이터, 로컬 같은 단어를 중심에 놓은 정책은 좀처럼 찾기 어렵다.
왜 이런 일이 반복될까. 시대정신은 이미 사회와 시장에서 먼저 등장한다. 그러나 정책은 언제나 기존 제도와 산업 구조 위에서 움직인다. 새로운 언어가 정책으로 자리 잡기까지 긴 시간이 걸리는 이유다.
지금의 상황을 생각하면 마냥 기다릴 수만은 없다. AI 시대의 중산층 경제를 고민한다면 이제 이 언어들을 정책의 중심으로 가져와야 한다. 라이프스타일, 브랜드, 크리에이터, 로컬은 단순한 유행어가 아니라 AI 시대의 중산층 경제를 설명하는 핵심 언어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