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정치의 진영논리에 지친 시민들이 탈출구를 찾고 있다. 586세대 퇴진, 세대교체, 중도파 단결 등이 언론에서 제시되는 대안이다. 과연 한국 정치가 세대교체와 이념 정체성이 모호한 중도주의로 현재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까. 대안 논의에서 중요한 것이 원인의 진단이다. 한국 정치가 극심한 양극화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를 제대로 밝혀야 한다. 언론이 간과하는 원인이 국가주의다.
현재 한국의 정당은 여야를 막론하고 국가주의가 장악했다. 국가주의와 경쟁했던 자유주의가 사라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존재감이 없다. 2020년 4월 총선에서의 공천 파동에서 볼 수 있듯이 보수와 진보 정당 모두 다양한 당내 정파가 경쟁하고 공존하는 민주적인 정당이 아니다. 국가주의 기득권이 권력을 장악한 권위주의 정당이다. 정당의 기득권이 권력을 유지하는 방법이 반대당을 '악마화'하는 진영논리다.
국민 입장에서 '어이없는' 것은 보수와 진보 국가주의의 단합이다. 겉으로는 극하게 대립하지만, 실제로는 서로 도와주고 있다. 진보정당이 내세우는 가장 큰 명분은 ‘이명박근혜’로의 회귀를 저지하는 일이고, 보수정당은 좌파 정부 퇴진에서 당위성을 찾는다. 다음 대선에서 보수정당이 다시 집권하면, 보수 국가주의가 진보 국가주의를 교체할 가능성이 높다. 정권은 교체돼도 국가주의의 패권은 지속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현재 상황에서 중도세력으로 분류할 수 있는 보수와 진보 진영의 자유주의자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국가주의자의 도덕성과 한계를 비판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진영논리에 식상한 중도성향, 특히 새로운 미래를 갈구하는 미래 세대에게 확고한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 그 비전에는 성장과 분배에 대한 고전적인 자유주의 정책, 새로운 가치로 부상한 삶의 질에 대한 확고한 자유주의 대안이 포함돼야 한다.
권위주의 전통이 강한 한국 정치에서도 보수와 진보 정당의 이념이 지금처럼 경직된 적이 없다. 권위주의 시절에도 보수와 진보 정당 안에서 국가주의와 자유주의 세력이 경쟁했다.
한국의 보수정당이 경제성장을 최우선 가치로 추구한다면, 성장을 추진하는 방법에서는 국가주의자와 자유주의자가 대립한다. 정부의 적극적인 개입과 산업정책을 선호한 세력이 국가주의고, 자유화, 민영화, 개방을 지지하는 세력이 자유주의다.
권위주의 시대에는 산업부, 대기업, 금융기관이 국가주의를, 기획원, KDI가 자유주의를 대표했다. 민주화 시대를 거치면서 보수진영의 이념은 균형을 잃고 한쪽으로 쏠린다. 대기업, 중소기업, 외국인기업, 스타트업, 소상공인이 공존하는 기업 생태계와 경쟁 구조를 구축하려는 자유주의자가 퇴보하고, 대기업과 제조업 중심의 산업구조를 보호하려는 국가주의자가 부상한다.
진보 진영이 추구하는 최고의 가치는 평등이다. 평등에서도 국가주의자와 자유주의자의 견해가 다르다. 국가주의자가 중앙정부의 적극적인 재분배를 통해 평등을 실현하려 한다면, 자유주의자는 공정 경쟁, 공정 거래 등 작은 기업과 개인이 대기업과 경쟁할 수 있는 환경을 강조한다.
김대중과 노무현 정부가 집권한 시기의 진보진영은 경제민주화(자유주의)와 복지국가(국가주의)를 대안으로 놓고 논쟁했다. 경제민주화 진영은 외국인 투자 유치, 시장개혁, 중소기업 육성을 통해 대기업을 견제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복지국가 진영은 외국 자본을 배제한 국내 대기업과 국내 노동의 대타협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대기업 체제를 유지하고 그 대신 노동자 복지를 대폭 확장하는 것이 자본과 노동의 대타협이다.
문재인 정부가 들어와서 진보진영의 대기업 경도는 악화된다. 대외적인 대기업 정책은 재벌개혁 중심의 경제민주화지만, 실제 정책은 대기업 체제를 유지해야 한다는 복지국가론에 가깝다. 소득주도성장론도 대기업 체제를 유지하면서 노동의 소득을 높이려는 복지국가 모델의 한 유형이다. 경제가 어려워지자 경제 활성화를 위해 대기업에 의존하는 모습을 더 명확하게 드러낸다.
진보진영의 경제민주화 노선은 현재 대안주도성장론에서 명맥을 유지한다고 평가할 수 있다. 대안주도성장이란 사회적 경제, 마을 공동체, 지역혁신 등 대안적인 방식으로 지역 내 선순환 구조를 구축하고 이를 통해 지속 가능한 성장을 추구하는 모델이다.
국가주의가 장악한 현재의 보수정당은 대기업 중심의 국가산업체제를 고수한다. 현실적으로 국가경제의 성장을 주도할 주체는 대기업이며, 대기업의 투자를 통해 고용을 진작해야 한다고 믿는다. 성장 모델로서는 전통적인 투자주도성장론에 가깝다.
현재 현격히 약화는 보수진영의 자유주의자들이 제시하는 성장 모델은 혁신주도 또는 생태계주도 성장이다. 특정 기업이나 산업에 의존하기보다는 시장 메커니즘을 통해 지속적으로 미래 성장 산업을 혁신 생태계를 구축해야 한다고 믿는다. 실리콘밸리가 대표하는 하이테크 중심의 혁신창업 생태계가 대표적인 사례다.
혁신 생태계가 반드시 실리콘밸리 모델일 필요는 없다. 리처드 플로리다와 찰스 랜드리가 제안한 창도도시도 혁신 생태계다. 박근혜 정부가 국정 목표로 선정한 창조경제와 문화융성이 창조도시 모델에 근접하다. 2017년 이후 필자가 제안한 소상공인, 예술가, 스타트업이 커뮤니티를 만들어 도시산업을 개척하는 골목상권도 새로운 유형의 혁신 생태계다.
국가주의-자유주의 프레임은 미래 경제에 중요한 도시정책을 설명하는 데도 유용하다. 도시정책의 이념화는 2000년대 뉴타운 사업으로 시작된다. 그전에는 정당 간 차이가 관심을 끌만큼 뚜렷했는지 기억되지 않는다. 뉴타운 모델은 민간주도 재개발이다. 2011년 서울 시장 선거 이후 서울시는 뉴타운 모델의 대안으로 도시재생을 추진한다. 도시재생의 기본 철학은 마을 공동체다. 마을 공동체 중심으로 마을 공동체의 발전을 위해 도시환경을 개선하자는 취지다. 뉴타운 모델 거부 명분은 공동체 파괴, 구체적으로 원주민 퇴출입니다. 뉴타운의 원주민 입주 비율이 20% 수준이었다.
논리적으로 보면 재개발과 재생은 한 지역에서도 공존할 수 있어 서로 반대되는 모델일 필요는 없다. 하지만 한국 정치 지형상 뉴타운 모델은 우파 정책, 도시재생 모델은 좌파 정책으로 고착된다. 한동안 잡음 없이 추진되는 것으로 보이던 도시재생 사업이 2020년 부동산 가격이 급등하면서 위기를 맞는다. 도시재생 모델이 주택 공급을 관리하는 사업이 아니었지만, 일부 지역에서 도시 공급을 억제한다는 것이다.
부동산 공급 문제가 현안이 되자 정부 여당도 공급 확대 정책으로 선회한다. 2021년 4월 서울 시장 선거에 출마한 여당 박영선 후보는 뉴타운 모델을 일부 수용하는 공약을 발표한다. 강남 재건축에 대한 규제도 완화하고 일부 지역에서는 재개발도 추진하자는 정부보다는 유연한 정책을 제안했다. 선거를 앞두고 중도로 이동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야당 후보들은 2021년 이전 구도가 유지될 것으로 예상하고 도시재생 모델을 반대하는, 그러면서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뉴타운 모델을 지지하는 입장을 취한다.
도시재생의 미래를 논의하는 중에 정부의 2.4 부동산 정책이란 게임 체인저가 등장한다. 정부가 교외 지역에서 사용했던 공공주도 재개발, 정부가 토지를 수용해서 재개발을 주도하는 모델을 제안한다. 정부가 도시재생을 포기하지 않고 공공주도 재개발을 추진할 수 있는지 의문이다. 정부 계획에 따르면 대도시 도시 재생 지역의 대다수가 재개발 대상 역세권으로 편입된다. 이념적으로 보면 공공주도 재개발은 도시재생보다 더 집단주의적 발상이다. 도시계획의 헌법이나 다름없는 용적률을 '편의에 따라' 확대하고, 토지 수용 동의 비율을 3/4에서 2/3으로 완화했다.
도시정책에서 여야 사이의 타협점, 즉 중도는 없을까? 흥미로운 것은 여야가 같이 신도시 제시하면서 서로 사회주의 유토피아니(우가 좌에게), 원주민 몰아내는 게이티드 커뮤니티니(좌가 우에게) 비난한다는 점이다. 좌우 모두 획일적인 재개발을 주장하는 상황에서 다양성을 담보하는 복합용도지구가 대안일지도 모른다.
박영선 후보가 제안한 '21분 도시'는 중도적 대안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집에서 15분 이동하면 일상에 필요한 모든 시설에 접근할 수 있는 파리의 '15분 도시'를 재현하는 도시다. 한국적 맥락에서 도시재생과 재개발을 혼합해야 하는 중도적 성격의 대안이다. 대규모 단지보다는 소규모 주택사업을 활용한다는 측면에서 뉴타운보다 중도이고, 생활환경 개선보다는 골목상권 개발을 포함한 소규모 개발사업을 추진한다는 측면에서 도시재생보다 중도다.
2022년 대선을 앞둔 한국 정치에서 과연 자유주의는 앞으로 어떤 역할을 할 것인가? 현재는 진보와 보수 양측 모두 자유주의가 현격히 약화된 상황이다. 그렇다고 자유주의에 기회가 없는 것은 아니다.
첫 번째 이유가 국가주의의 한계다. 보수와 진보 정당의 국가주의 진영은 현재 경제 성장은 대기업과 유니콘에게 맡기고, 자신들은 중앙 정치에 집중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세계화에서 낙오된 중산층, 제조업 경쟁력 약화로 공동화된 산업도시, 설자리가 없는 자영업자 등 수원과 판교의 낙수 효과가 미치지 못하는 분야는 우선순위가 아니다.
두 번째가 탈물질주의가 주는 새로운 기회다. 현재 보수정당과 진보정당의 주류는 모두 탈물질주의에 대한 무관심하다. 예외가 있다면 대안주도성장을 지지하는 일부 진보 세력이다. 20세기 정치가 물질주의 내부의 성장주의와 분배주의의 경쟁이었다면, 21세기 정치는 물질주의와 탈물질주의의 경쟁이다. 선진국 정치는 1970년대부터 탈물질주의 정치로 전환됐다. 개성, 다양성, 삶의 질, 사회적 가치와 같은 탈물질주의 이슈가 정치권의 핵심 쟁점으로 등장했다.
한국에서도 탈물질주의가 2000년대 이후 확산된다. 라이프스타일, 삶의 질, 정체성, 일의 미래가 밀레니얼이 최대 관심사다. 그들은 생존과 분배보다는 자기표현, 자아실현을 중시한다. 새로운 대안을 찾는 밀레니얼에게 기존 정당이 제시하는 비전은 지극히 물질주의적이다. 다소 거칠게 표현하면, 보수정당은 대기업 일자리, 진보정당은 공무원과 공공기관 직장을 대안으로 제시한다. MZ세대가 요구하는 자유롭고 독립적인 라이프스타일과 자신의 개성을 실현할 수 있는 창의적인 일에 대한 고민을 찾기 어렵다.
국가주의와 자유주의가 삶의 질을 실현하는 방식도 다르다. 국가주의자가 정부의 개입으로 삶의 질을 향상하려고 한다면, 자유주의자는 개인의 창의성과 독립성을 통해 삶의 질을 높인다. 구체적으로 개인이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도록 기존 조직의 문화를 바꾸고, 장기적으로는 개인이 자유롭게 일하고 창업하는 창조경제를 확대하는 것이 자유주의 해법이다. 기계가 노동을 대체해 전통적인 일자리가 사라지는 미래 경제에서는 개인 창의성과 예술성에 기반한 창조산업은 더욱 중요해질 것이다.
국가주의와 자유주의의 차이를 일의 미래 관점에서 정리해보자. 물질주의 사회에 최적화된 국가주의는 과거와 다른 미래를 제시하지 못한다. 한국의 보수주의와 진보주의 정당이 보여주듯이, 국가주의 보수는 대기업, 국가주의 진보는 공기업과 실질적으로 공기업화된 대기업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자유주의는 다를 것이고 달라야 한다. 자유주의 진보는 19세기 미술공예운동에서 시작된 자아를 실현하는 노동의 정신으로 돌아가 독립기업, 협동조합 등 국가와 대자본에서 독립된 일을 지지한다. 자유주의 보수는 자유주의 진보와 마찬가지로 개인 주도의 일을 지지하지만, 그와 달리 창작자, 창업가와 같이 시장에서 큰 기회를 찾는 기업가를 모델로 삼는다.
물질주의가 제안하는 공기업과 대기업, 탈물질주의가 제안하는 독립기업과 스타트업, 이중 누가 미래 세대가 원하는 일일까? 미래 사회가 '개인 해방과 느슨한 연대' 중심으로 재편된다면, 일의 미래가 어디에 있는지는 자명하다. 탈물질주의 경제가 가능해진 이유는 기술 발전과 가치 변화다. 과거와 달리 기술 발전이 개인이 조직의 힘에 의존하지 않고 성공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었다.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지면서 경제적 생존과 정치적 자유를 넘어 자기표현과 자아실현에 대한 욕구도 늘었다. 공급과 수요 측면에서 탈물질주의 경제의 공간이 확대된 것이다.
인간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이념 축은 국가주의와 자유주의다. 성장, 분배, 삶의 질 등 사회의 우선순위는 시대에 따라 바뀔 수 있지만, 이를 실현하는 방법에 대한 경쟁은 계속될 것이다. 한국의 중도세력이 자유주의 중심으로 결집한다면 새로운 기회는 올 것이다. 이미 탈물질주의가 자유주의자의 새로운 희망으로 부상했다. 개인의 자유와 사회의 다양성을 중시하는 탈물질주의는 기본적으로 자유주의에 유리한 현상이다. 한국의 자유주의들이 보수 국가주의와 진보 국가주의가 경시하는 탈물질주의에 대한 확고한 대안을 제시한다면, 장기적으로 국가주의와의 경쟁에서 다시 주도권을 쟁취할 수 있다. 탈물질주의가 한국 자유주의의 미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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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고 2020.3.9
1차 수정 2021.1.9
2차 수정 2021.3.6
3차 수정 2021.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