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골목길 경제학자 Apr 26. 2020

모든 교토 산업에 새겨진 지역 정체성 교京

교토는 처음 가서 한번에 좋아지는 도시가 아니다. 일본 전통문화를 모르는 사람은 전통 건물로 가득 찬 교토를 낙후된 곳으로 볼 수도 있다. 일본 문화를 지나치게 좋아하면 안 된다고 교육받으며 자란 내게 일본색이 강한 교토는 때론 부담스럽게 느껴진다. 교토에 이런 편견을 가져서인지, 2004년에 처음으로 교토를 방문했을 때 큰 인상을 받지 못했다. 교토 대학이 주최한 국제회의에 참석했는데, 그 출장에서 지금 기억하는 것은 회의장과 내가 묵었던 호텔 주변의 선술집이 전부다.


당시 나는 왜 미국의 명문 아이비리그 대학들이 일본 공부를 원하는 학생들을 교토의 도시샤 대학에 보내는지를 이해하지 못했다. 나라면 경제적 기회를 훨씬 많이 제공하는 도쿄에 보낼 텐데 말이다. 미국의 일본 전문가 교수들이 학생의 미래보다는 자신의 연구 주제를 더 중요하게 고려하여 방문 도시를 선정한다고 의심했다. 하지만 도시와 기업에 관심을 넓히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교토는 상대적으로 작은 규모임에도 연 매출 1조 원이 넘는 대기업을 20개 넘게 가지고 있다. 즉 ‘큰 기업을 가진 작은 도시’였다.





기업의 역사를 강조하는 교세라


교토를 대표하는 세계적 기업을 꼽으라면 많은 사람이 교세라(京セラ)를 선택할 것이다. 세계적인 기업을 많이 지닌 세계 3위의 경제 대국 일본에서도 알아주는 기업이다. 회사의 창업자인 이나모리 가즈오(いなもり かずお )회장은 혼다자동차의 혼다 소이치로와 마쓰시타전기의 마쓰시타 고노스케와 더불어 일본 3대 경영의 신 중 한 명으로 존경받는다.


교세라는 우리나라에서는 생소한 기업일 수도 있다. 지금은 통신과 휴대전화 사업을 하고 있지만, 오랫동안 이 회사의 주력 사업은 소재와 부품이었다. 1959년 창업한 교세라는 2013년 전 세계에서 7만여 명을 고용하고 144억 달러가 넘는 매출을 기록했다. 주력 상품인 세라믹 시장에서 2004년 세계 시장 점유율이 70퍼센트에 이를 정도로 지배력 있는 회사다.


이나모리 회장은 창사 후 매년 흑자를 기록하는 등 뛰어난 경영 실적을 자랑한다. 하지만 그가 존경받는 진짜 이유는 뚜렷한 경영 철학을 가지고 이를 기업 구성원과 일본 사회에 활발하게 홍보하기 때문이다. 이나모리 회장의 경영 철학 핵심은 ‘직원의 행복 추구’이다. 그는 직원의 행복이 주주 이익의 극대화보다 더 중요한 기업 목표라고 생각한다.


많은 학자는 ‘아메바 경영’이라는 독특한 조직 문화가 교세라의 경쟁력이라고 말한다. 아메바 경영은 단세포 원생동물인 아메바의 생존 원리에 착안한 경영 방식으로, 전체 조직을 독립 채산이 가능한 최소 단위로 팀을 나눠 각 팀이 독립적으로 경영에 참여하는 방식이다. 아메바 조직들은 서로 협력하는 한편 치열하게 경쟁한다. 또한 업무 성격별로 세분되어 독립적으로 운영되기 때문에 각 조직은 소규모 중소기업처럼 신속하고 유연하게 움직인다. 이러한 아메바 경영으로 교세라는 대기업에서 흔히 발생하는 관료주의 같은 여러 문제를 극복한다.


교세라 본사는 교토의 남부 산업 지역 후시미(伏見区 )구 토바도노초(鳥羽殿町)에 있다. 토바도노초는 일본을 대표하는 기업의 본사가 있는 지역이라고 보기에는 의아할 정도로 평범한 공장 지역이다. 눈에 띄는 점은 공장, 창고, 사무실 건물 등이 모여 있는 동네와는 어울리지 않게 현대식 고층건물이 서 있는데, 그곳이 바로 교세라 본사다. 교세라 본사 1층과 2층은 박물관이다. 1층 박물관은 교세라가 소장한 미술품을 전시하는 미술관이고, 2층 박물관은 세라믹 박물관이다. 친절하게도 교세라는 세라믹 역사에 관심 있는 사람에게 창업 이후부터 지금까지 생산한 세라믹 상품과 기술을 그림과 견본으로 설명한다.


본사 바로 옆에 창업자 이나모리 도서관이 있다. 도서관 1층 입구에 들어가면 오른쪽에 도서 전시장이 나타난다. 처음 가보는 사람은 특정 주제의 도서를 전시한 곳으로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이곳에 전시된 책은 모두 이나모리 회장이 집필했거나 이나모리 회장에 대해 쓴 책이다. 상당한 규모의 이 전시장은 이나모리 회장과 교세라가 일본 산업 발전에 끼친 영향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5층 규모의 이나모리 도서관은 1층에서 이나모리 관련 서적을 전시하고, 나머지 공간은 이나모리 회장의 경영 철학을 연구하는 공간이나 관련 자료를 보관하는 장소로 사용한다.


교세라 본사의 미술관과 박물관은 이렇듯 기업의 역사를 강조하고, 역사에 대한 자부심을 키우는 기업임을 보여준다. 교세라가 창업자의 철학과 기업의 역사에 이처럼 투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다른 교토 기업과 마찬가지로 기업 자신과 지역에 대한 남다른 애정과 자부심이 있기 때문이다.





교토 전역의 ‘교 문화’


교세라의 자부심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교세라라는 이름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교세라는 ‘교토 세라믹’의 준말이고 ‘교京’는 교토의 머리글자로 수도라는 의미다. 교토는 일본의 천 년 고도다. 헤이안 천황이 서기 794년 교토로 천도했고 그 이후 메이지 천황이 1868년에 도쿄로 천도하기까지, 교토는 무려 천여 년 동안 일본의 수도였다.


내가 본 교토 사람들은 경쟁과 견제 상대로 유난히 도쿄를 신경 쓰는 것 같았다. 아무래도 도쿄가 일본 중심지로서 교토를 대체했기 때문일 것이다. 도쿄가 공식적으로 수도가 된 것은 1868년이지만, 사실 그보다 370년 전인 에도 시대가 시작할 무렵부터 이미 일본의 중심지로 기능했다. 도쿠가와 가문은 1601년 도쿄에 막부를 두고 실질적으로 일본을 통치했다.


도쿄에 대한 경쟁심은 교토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이라는 형태로 표출되는데, 그 결정체가 바로 교토를 최고 도시로 생각하는 ‘교심(京心)’ 또는 ‘교(京)문화’이다. 교세라도 도쿄에 대한 ‘교심’이 뭉친 기업이다. 교토의 다른 회사 역시 교심의 영향을 받았다. 교심은 여러 형태의 기업 문화로 표출된다. 대표적인 예가 도쿄에 대한 반골 기질이다. 교토 기업 대부분은 적어도 도쿄 기업에는 질 수 없다는 오기를 품고 있다. 비록 도쿄에 일본 수도 자리를 뺏겼지만, 일본 제일의 도시 자리는 뺏기고 싶지 않은 것이다.


교토의 교심은 19세기 개항 시대에 지역 산업 활성화 정책을 적극 펼치게 된 동력이 됐다. 교토는 1870년에 화학과학연구소를 의미하는 사밀국(舍密局)을 설립하여 일본 최초의 산학협력기관을 만들었다. 이러한 노력의 결실로 1875년에 시마즈제작소와 같은 벤처 기업이 탄생했다. 교토의 교심은 여러 분야로 진출해 일본 최초의 성공 신화를 쌓았다. 1891년 교토는 일본 최초의 상업용 수력발전소인 게아게 발전소를 건설했다. 일본 최초의 노면전차 역시 1895년 교토에서 처음으로 개통됐다. 그 후에도 일본 최초 기록은 계속된다. 1897년 일본 최초 영화 상영, 1924년 공립 식물원 조성, 1956년 심포니 오케스트라 설립 등 교토는 새로운 것을 도입할 때마다 늘 일본을 선도해 왔다.


교 문화는 기업이 서로 도와주는 상생의 산업 문화를 만들었다. 인천대학 양준호 교수는 '교토 기업의 글로벌 경쟁력'에서 중소기업과 상생하고 새로운 창업 기업을 지원하는 전통은 오래전에 시작됐다고 설명한다. 교토의 최초 벤처 기업이라고 할 수 있는 시마즈제작소는 자신이 창업 때 받았던 사회적 관심과 배려를 잊지 않고, 1944년 설립한 무라타제작소의 창업과 성장을 적극 지원했다. 1933년에 설립한 옴론 역시 선배 기업으로서 1973년에 창업한 일본전산을 계속 도와줬다고 한다.


교토가 보수적이고 자존심이 높아서 폐쇄적일 것 같지만, 뜻밖에도 이처럼 개방적인 면이 있다. 물론 다른 지역 사람들은 교토인을 ‘속마음을 알 수 없고 가까워지기 어려우며 겉과 속이 다른 폐쇄적인 사람’이라고 비판한다. 교토 사람 개개인은 폐쇄적일 수 있으나 교토 사회 전체는 상당히 개방적이다. 교토의 개방성은 지역에 상관없이 능력 있는 사람을 받아들이는 문화에서 나타난다. 개방성이 없었다면 교토에 인재가 모이지 않았을 것이다. 비교토 출신으로 교토에서 창업한 기업인으로는 옴론의 타테이시 카즈마(구마모토 출신), 와코루의 쓰카모토 고이치(미야기 출신), 교세라의 이나모리 가즈오(가고시마 출신)를 들 수 있다.


교토 기업의 세계화도 교 문화와 관련이 깊다. 일본 본토 내에서 지역 기업이 도쿄 기업을 이기기는 사실 쉽지 않다. 일본 시장의 중심지는 도쿄이고, 아무래도 중심도시에 기반을 둔 기업이 우세하기 마련이다. 일본 내에서의 열세를 타개하기 위해 교토 기업이 찾은 해법은 적극적인 해외 시장 진출이었다. 지역 기업이든 중앙 기업이든 해외 시장에서는 동등하게 경쟁하기 때문이다.


교세라도 해외 시장 비중이 높은 세계적 기업이다. 82개에 달하는 외국 법인을 통해 2012년 전 매출의 55.1퍼센트인 69억 달러를 해외에서 벌었다. 기업의 성장 과정에서 해외 진출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신흥 기업으로서 일본 대기업에 납품하는 것이 여의치 않자 미국 시장 개척으로 전략을 바꿨는데, 결국 1965년 페어차일드 수주에 성공하여 성장의 발판을 마련했다.


이나모리 교세라 회장은 자서전 '좌절하지 않는 한 꿈은 이루어진다'에서 중심도시 도쿄와 경쟁할 방법은 세계화뿐이라고 생각하게 된 계기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 무렵(창업 초기) 도쿄에도 사업 발판을 마련하기 위해 출장소를 개설했다. 그곳에 담당자를 배치하고 관련 제조업체를 매일 찾아다니도록 지시했다. 하지만 무명의 교토세라믹에 신규 진입의 벽은 높기만 했다. 좀처럼 영업 활로가 뚫리지 않아 속이 탔다. 그러던 차에 문득 미국 업체들이 생각났다. 일본의 대기업은 미국에서 기술을 도입하는 경우가 많았다. 만약 미국 업체에 회사 제품을 먼저 사용하게 하고, 그곳에서 제대로 평가받을 수만 있다면 일본 업체도 결국 앞다투어 교토세라믹 제품을 도입하리라고 생각했다. 시장이 열려 있는 미국에서는 실력만 있으면 공평하게 겨룰 수 있을 거라고 판단했다.”


‘교’라는 단어를 좋아하는 것은 기업뿐만이 아니다. 교토 거리를 거닐면 교토인이 얼마나 ‘교’를 좋아하는지 알 수 있다. 교토 사람은 스시를 비롯한 음식, 상품, 건물이나 장소 등 거의 모든 곳에 ‘교’ 자를 붙인다. 교료리, 교스시, 교야끼(도자기), 교야사이(야채), 교우후(京風)까지! 심지어 기온 거리의 허름한 여관도 ‘교’ 브랜드를 내세운다.



전통과 현대의 시너지가 기업의 경쟁력


전통과 현대가 조화를 이룬 곳. 교토를 진부하게 묘사한 표현이지만 대체할 다른 문구도 마땅치 않다. 다른 지역을 압도하는 교토의 엄청난 문화유산을 통해 교토의 전통을 가득 느낄 수 있다. 그렇다면 교토의 현대는 어디서 느낄 수 있을까? 교세라 같은 첨단 기업을 소개했으니 교토의 현대를 이미 설명했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교토의 현대는 생각보다 뿌리가 깊다. 교토는 일본에서 처음으로 전화와 전차 등의 신문명 기계를 도입해 일본 근대화를 선도한 도시다.


교토의 현대는 문화와 예술에서 느낄 수 있다. 교토는 일본의 현대 미술을 주도하는 도시다. 1880년 일본 최초로 공립 미술학교인 교토부 미술학교(Kyoto Prefectural School of Fine Arts)를 설립했다. 이 학교는 1969년 시립음악대학을 통합하여 지금의 교토시립예술대학이 됐다. 기타무라 세호, 도모토 인쇼, 우에무라 쇼코 등 많은 문화 훈장 수상자가 이 학교를 졸업했다.


일본 최초의 교향악단인 교토시립교향악단은 1956년 6월 18일 폰토초 극장에서 초연을, 다음 날 마루야마 노천극장에서 정기 공연을 열었다. 4500명이 넘는 관객이 몰렸고 입장을 못 한 관객은 나무나 길 위에서 공연을 들었다고 한다. 교토 사람들은 예전부터 서양 클래식 음악을 즐겨왔다. 교토 부 정부는 일본 최초로 고등학교 교육 과정에 음악 수업을 넣었고 음악 전문대학도 만들었다.


이렇게 현대 문화를 적극 도입한 교토인은 전통문화 보존에도 그에 못지않은 사랑을 쏟았다. 교토인은 자신이 일본의 주인이며 일본 문화의 진정한 계승자이자 수호자라는 인식이 강하다. ‘지붕 없는 박물관’이라고 불릴 만큼 교토의 전통문화 자원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교토에는 1000년의 역사를 가진 사찰과 신사가 2000여 개나 남아 있다. 그중 히가시혼간사(東本願寺), 니시혼간사(西本願寺), 긴카쿠사(金閣寺), 긴카쿠사(銀閣寺), 난젠사(南禪寺), 도사(東寺), 고류사(廣隆寺), 류안사(龍安寺), 기요미즈(사淸水寺), 헤이안신궁(平安神宮) 등 무려 17개가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교토의 문화 자원은 유형문화에 그치지 않는다. 교토는 다도, 가부키, 꽃꽂이 등 다양한 무형문화도 잘 보존하고 있으며, 현대 교토인은 이러한 전통문화를 일상생활의 한 부분으로 생각하고 취미 삼아 즐긴다.


교토는 도시 개발을 포기한 것처럼 보일 정도로 고집스럽게 전통 가옥, 건물, 거리를 보존한다. 일본에서, 아니 세계에서 최고로 엄격한 건축 규정을 고집하는 도시다. 그래서 교토의 첫인상은 화려하지 않다. 현대적인 건물에 익숙한 서울 사람에게 교토 건물과 거리는 오히려 낙후되어 보이기도 한다. 교토인은 전통문화 보호를 위해서라면 적지 않은 불편을 감수한다.


교토인은 축제(마츠리)를 열어 집단으로 자신이 교토인임을 자축한다. 전통을 고집해서인지 축제 참여 자격을 교토인으로 제한한다. 5월, 7월, 10월에 열리는 아오이마츠리, 기온마츠리, 지다이마츠리는 교토 3대 축제다. 그중 전염병 퇴치 의식에서 기원한 기온마츠리는 7월 한 달 내내 진행되며, 그 규모와 짜임새 측면에서 가히 일본 최고의 축제이다. 하지만 내가 주목한 것은 참여 인원이 700명에 불과한 지다이마츠리다. 교토가 일본 수도가 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시작된 지다이마츠리는 지역에 대한 교토인의 자부심이 잘 느껴지는 축제다. 비록 규모는 크지 않지만, 교토가 수도였던 약 1100년 동안의 풍속을 시대별로 나누어 재현하는 행렬은 지역민을 하나로 묶고 자부심을 심어주는 지역 축제의 취지에 잘 부합한다.


전통과 현대의 공존은 교토 여러 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헤이안신궁 주변에는 서양식 건축 양식의 도서관과 미술관들이 교토의 신사나 사찰과 조화를 이루며 자리 잡고 있다. 교토국립박물관은 교토의 역사적 유물을 아름다운 서양식 건물에 전시하고 있어 전통과 현대의 조화를 완벽히 이루었다는 찬사를 얻고 있다. 세계적인 여행 작가 피코 아이어(Pico Iyer)는 에세이 '부조화 속의 삶(Living Among Incompatibles)'에서 교토인들이 겉으로는 서양문화를 즐기지만 속으로 진정 좋아하는 문화는 일본 문화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나는 교토에서의 전통과 현대의 관계는 ‘이중성’보다 ‘시너지’ 차원에서 설명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교토에선 전통이 곧 현대이고, 오늘을 사는 경쟁력의 원천이 곧 전통이다.


현재 교토 기업의 혁신과 경쟁력에서 전통의 힘을 발견할 수 있다. 교토는 긴 세월 동안 세라믹, 순수 미술, 디자인에 대한 경험을 축적했고, 이렇게 축적된 과거의 지식과 경험은 기업가 정신과 도전 정신으로 이어졌다. 칩 가공과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링 등 첨단산업 분야에서의 경쟁력은 갑자기 나온 것이 아니다. 과거부터 쌓아온 경험과 연륜이 있었기에 꼼꼼하고 정밀한 완벽성이 요구되는 산업 분야에서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


역사와 전통만 앞세워서는 시장에서 오랜 기간 살아남을 수 없다. 교토 기업은 안이하게 전통에만 기대지 않았다. 살아남기 위해서 비교우위인 전통을 바탕으로 경영 혁신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교토 기업의 경영 혁신을 이끈 원동력은 바로 독창성에 대한 헌신이다. 산요 회장 카케히 테츠오는 1999년 미국 비즈니스 잡지 비지니스위크(Business Week) 인터뷰에서 교토 기업의 성공은 독창성을 중시한 창업자와 경영진이 일군 성과라고 말했다. 교토는 과거 천황에게 바치는 진귀한 물건을 만들던 장인이 모여 살던 도시다. 한 가지만을 끈기 있게 거듭하여 완벽함을 추구하던 그 기질은 결국 지금의 기업에 전수됐다.



일본의 문화를 맛보는 요리, 교료리


‘교’는 일본에서 프리미엄 브랜드다. 교 자가 붙으면 상품의 품격이 높아진다. 교 브랜드가 주는 경제적인 혜택을 고려할 때 교토 사람이 물건과 유행에 교 자를 붙이지 않는다면 오히려 그것이 이상하다. 대표적인 기업들도 교토의 높은 지명도를 이용한다. 양준호 저서 '교토의 글로벌 경쟁력'에서 찾은 옴론 회장인 타테이시 카즈마의 발언이 인상적이다. “해외 시장을 고려할 경우, 도쿄를 경유하는 것보다 교토에서 직접 물건을 파는 것이 ‘교토’의 높은 지명도로 큰 장점을 얻을 수 있다.” 이나모리 교세라 회장도 자서전에서 교토가 “역사가 깊고 전통적인 일본의 도시로 이미 잘 알려진 터라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서 회사 이름에 ‘교’를 붙였다고 설명한다.


일반인에게 아주 익숙하고 쉽게 접할 수 있는 교 브랜드는 교토 요리, 즉 교료리다. 일본을 가기 전이었던 1990년대 말에도 교토에 가서 꼭 체험해야 할 일로, 사찰과 신사를 방문하는 일과 더불어 가이세키(정식 요리)를 맛보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서울에서 일본 음식점을 운영하는 친구에게서 교토 사람들은 스시를 ‘천박한’ 도쿄 음식으로 우습게 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서 교토 음식에 대한 호기심이 더욱 커졌다.


일본 요리는 전통적으로 관동과 관서 요리로 나뉜다. 교토가 속해 있는 관서 지방은 재료의 맛을 최대한 살리기 위해 노력하고, 관동 지방은 재료의 맛을 강조하기 위해 조미를 하는 것을 요리의 기본으로 인식한다. 이 두 지역의 차이는 자연환경과 관련이 있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인 교토는 구하기 어려운 생선보다는 채소를 사용하는 요리가 발달했다. 반면 바다에 인접한 도쿄는 항상 어패류와 생선이 풍부하다. 이런 이유로 교토는 채소와 소금으로 간을 한 생선 정식 요리, 도쿄는 선어를 이용한 스시 중심의 음식 문화가 발전했다. 개항 이후 환경의 변화도 교토와 도쿄 음식 문화에 영향을 미쳤다. 도쿄는 외국인의 취향에 맞춰 가볍고 간단한 음식을 만들었고, 외국의 영향을 덜 받는 교토는 전통적인 요리 방법을 고수했다. 교토 사람들은 음식 문화 이외의 다른 분야에서도 도쿄가 외국 문화에 ‘오염’되었다고 생각한다.


가이세키 요리는 전채(前菜), 국물, 회, 조림, 구이, 국, 안주, 밥, 된장국, 일본 김치 등 보통 10가지로 구성된 코스 요리다. 내가 기온의 교료리 거리에서 맛본 가이세키 요리는 솔직히 한 번도 맛보지 못한 음식은 아니었다. 재료 맛에 충실하고 간이 싱거웠다는 점 외에는 음식 구성과 요리 방식이 예전의 서울에 많았던 전통 개성 한정식 식당의 음식과 비슷했다. 외국 사람들이 가이세키 요리에 감동하는 이유는 맛 외에도, 음식과 그릇의 모양 및 장식이 거의 예술품에 가깝기 때문이다.


한국 사람으로서 교료리의 맛과 분위기에 마냥 감탄만 할 수는 없었다. 일본 요리에 못지않은 한국 요리가 해외에서 그만큼 인정받지 못하는 것 같아 속상했다. 대학원 시절 지도교수의 사모님은 한국에 왔을 때 비빔밥, 잡채, 파전 등 한국 음식을 찾았지만, 사실 우리 음식보다 교토 음식을 더 좋아했다. 그분에게 가이세키 요리는 음식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가격이 아무리 높더라도 반드시 경험해야 할, 일종의 성지 순례 코스였다. 일본 요리사는 단순히 음식만을 팔지 않는다. 음식과 더불어 그에 따른 문화를 판매한다. 서양인에게 스시는 단순히 요리가 아니다. 만드는 과정, 음식을 내는 스타일, 먹는 방식, 식당 분위기, 종업원 복장 등을 통해 고객들에게 일본 문화를 총체적으로 경험할 기회를 준다.


이명박 정부는 뒤늦게나마 한식 세계화의 중요성을 인식했다. 하지만 나는 정부의 한식 세계화 정책이 성공하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일부 고깃집을 제외하곤 우리나라에는 아쉽게도 고급 한식 문화가 없는데, 없는 것을 해외에 수출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예전에 고급 한식당의 역할을 한 한정식집은 1990년대 이후 ‘밥집’으로 전락했다. 우리는 일식, 양식, 중식에는 많은 돈을 쓰면서 한식에는 비싼 가격을 낼 만한 가치가 없다고 생각한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재능 있는 요리사는 한식을 피하고 다른 음식으로 전문성을 키우려고 한다.


교토에서 교료리는 고급 음식이다. 많은 교료리 식당이 일 인당 수십만 원이 넘는 세계 최고 수준의 가격을 요구한다. 교료리 성공의 토대는 교토가 최고라고 생각하는 요리사의 ‘교 정신’이다. 교료리는 탄탄한 국내 시장을 바탕으로 성장한 요리 산업으로서, 교료리의 지위는 세계적으로 인정받는다. 전 세계 식당의 점수를 매기는 잡지로 제일 권위 있고 신뢰도가 높다고 알려진 미슐랭가이드는 2013년에 무려 14개의 간사이 식당에 최고 등급인 별 셋을 부여했다. 미슐랭가이드의 본국인 프랑스에서도 별 셋을 받은 식당은 28개에 불과하다.


한식이 해외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중앙정부보다는 각 지역의 한식 요리사들이 직접 나서야 한다. 지역 문화와 전통에 대한 자부심이 가득한 교토 요리사처럼 한식 요리사도 자신이 사는 지역의 음식을 개발하고 이를 세계에 알려야 한다. 한식을 세계 최고의 음식이라고 여기는 국민의 공감대가 먼저 형성되어야 함은 말할 것도 없다.



교토 대학을 주축으로 한 산업 생태계


교토 태생 기업이 단순히 지역에 대한 자긍심만으로 교토에 머무는 것은 아니다. 교토의 산업 생태계 또한 지역 기업이 세계적 기업으로 성공한 후에도 여전히 고향에 남고 싶어 할 만한 환경을 제공한다. 대학, 학생, 학술 도시로 유명한 교토에는 교토 대학을 비롯해 대학이 36개나 모여 있고, 인구의 10퍼센트가 학생과 연구자다. 도시 풍토가 기술자, 연구자, 학자를 우대하여 예부터 많은 인재가 교토에 정착했다.


우수한 지적 인프라는 기술개발 기능과 인재가 열세인 중소기업에 기술적인 정보와 자문을 쉽게 얻을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한다. 교토 특유의 선후배 기업 관계는 기술, 정보, 인재가 대기업과 중소기업 사이에서 자유롭게 이동하는 상생 패러다임을 구축하는 데 기여한다. 교토 산업의 또 하나의 특징은 전통 산업과 첨단산업의 융합이다. 양준호 교수는 교토의 강점 중 하나로 전통 산업을 지적한다. 그동안 축적한 높은 수준의 자기, 직기 등의 전통 공예 기술이 기술 집약형 기업에 유리한 환경을 제공했다고 한다. 호리바제작소, 삼코, 무라타제작소, 롬 등의 첨단산업 기업은 성장 과정에서 지역적 전통과 기술 자원의 혜택을 많이 받았다.


정부와 기업의 긴밀한 협력도 산업 생태계의 장점이다. 교토 시는 ‘교토 시 벤처감정위원회’를 설립하여 창업 초기 단계를 집중적으로 지원한다. 사업가의 비즈니스 모델을 평가한 후 유망한 기업을 선별하여 자금을 제공한다. 교토 부도 산학협력 연구개발, 산학 공동 연구비 등을 지원한다. 지역 산업 생태계의 핵심 고리는 일본에서 가장 활발한 산학협력이다. 산학협력 생태계에서 대학은 기술 혁신과 인재 공급에 주도적 역할을 해왔다. 앞에서 소개한 시마즈제작소는 회사 창립 초기부터 교토 대학과 꾸준하게 산학협력을 추진했다. 많은 기업이 시마즈제작소의 경험을 본받아 산학협력을 핵심 전략으로 활용하고 있다.


산학협력 시스템의 중심에는 교토 대학이 있다. 이 대학은 산학협력을 위해 여러 부문에 기관을 설치하여 다각도에서 산업을 이끌고 있다. 교토벤처비즈니스연구소, iPS세포연구소, 국제융합창조센터는 교토 대학이 만든 기관이다. 대학에서 이뤄지는 우수한 연구는 선후배 학자들이 서로 네트워크를 유지해 함께 연구를 이어나가면서 진화하고 있다. 교토에 있는 연구자는 외국에 나간 동료, 선후배를 통해 연구 내용을 보완하고 수정하면서 학계의 발전을 꾀한다. 미국 국립보건원에는 300명의 일본인 연구원이 있는데, 그중 100명은 교토 대학과 협력 관계를 맺고 있다.


교토 대학은 교토가 자랑하는 최고의 교 브랜드다. 일본의 노벨상 수상자를 보면 알 수 있다. 일본은 지금까지 총 19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했는데, 그중 교토 대학 출신은 8명으로 도쿄 대학의 6명을 능가한다. 일본 최초 노벨상 수상자인 유카와 히데키(1949년 노벨물리학상)는 현재 교토 대학 이학부 교수다. 두 번째 노벨상 수상자도 교토 대학 출신 물리학자 도모나가 신이치로다. 교토 대학은 화학, 물리, 생리의학 등 자연과학 분야에서 우수한 연구 실적을 자랑한다. 최근에는 교토 대학 iPS세포연구소 소장인 야마나 신야가 2012년 노벨생리의학상을 받았다. “도쿄 대학은 관료를 배출하고 교토 대학은 연구자를 배출한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교토 대학은 도쿄 대학에 뒤지지 않는 명문 대학이다.





내면의 힘을 길러주는 사색과 철학의 길


교토의 역사, 전통 행사, 벚꽃, 물 등은 수많은 예술 작품의 소재가 되어 살아 숨 쉰다. 일본 최초의 고전 작품인 '겐지 이야기'의 무대인 노노미야 신사는 영화 '게이샤의 추억'에도 등장했다. 일본 최초의 노벨문학상을 받은 '설국'의 저자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그의 소설 '고도'에서 “고목이 된 단풍나무의 줄기에 제비꽃이 피어 있다”는 문장을 통해 교토가 가진 이중성, 즉 전통과 격식, 현대와 야생을 은유적으로 표현했다.


교토는 전통문화 유적을 세계 최고 수준으로 철저하게 보호하는 도시다. 그러나 교토의 진정한 저력은 내면에서 나온다. 교토는 일본의 대표적인 지식인 도시로서, 교토 사람들은 ‘철학의 길’을 관광 명소로 갖고 있을 정도로 사색을 즐긴다. 철학의 길은 교토의 유명한 철학자 니시타 카라로가 즐겨 걷던 산책로다. 이름과 달리 산책로 주변에는 이렇다 할 만큼 철학적으로 의미 있는 장소는 없다. 그래도 나는 긴카쿠지(은각사)에서 시작하는 철학의 길을 따라 헤이안신궁까지 걸으면서, 이렇게 지성을 기념하는 거리가 있는 것이 부러웠다.


인문학 배경 때문인지 교토는 일본 문단을 대표하는 작가를 많이 배출했다. 특이하게 ‘교토 작가’는 주류 장르에서 벗어난 판타지 소설 분야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교토의 천재’라고 불리는 모리미 포미히코는 교토 대학 재학 중에 '태양의 탑'이라는 작품으로 일본 판타지 소설 대상을 받았다. 그는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 등의 소설에서 교토를 배경 도시로 묘사한다. 또 다른 교토 작가인 마키메 마나부는 '로맨틱 교토, 판타스틱 호루모'에서 교토 젊은이의 일상과 밤 문화를 다뤘다.


교토는 내가 방문한 도시 중에서 중심도시와의 차별성을 가장 강조하는 도시였다. 많은 사람은 그 차별 정신을 교토의 반골 정신, 우월 정신으로 표현한다. 나는 이를 ‘교 문화’로 표현한다. 중심도시에 대한 경쟁심이 추상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실제 생활에서 ‘교’라는 단어로 구현되기 때문이다.


이 도시는 또한 차별화된 라이프스타일이 어떻게 작은 도시에서 큰 기업을 만드는 데 기여하는지를 대단히 명확하게 보여준다. 교 문화로 무장한 교토 기업은 도쿄 기업에 이기려는 경쟁심을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해외 시장 개척, 창업 기업 지원, 지역사회 발전 기여 등의 구체적인 행동으로 중심도시와는 독립된 기업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출처: 작은 도시 큰 기업, 2014

매거진의 이전글 채플린과 네슬레의 정체성을 정의하는 브베의 심플 라이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