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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골목길 경제학자 May 02. 2020

전통문화 산업화의 정석 가나자와

일본 영화 '제로 포커스 Zero Focus'는 한 여인이 결혼한 지 일주일 만에 출장을 떠나는 남편을 기차역에서 배웅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남편은 얼마 지나지 않아 출장지에서 실종되고 부인은 남편을 찾아 나선다. 영화에서 남편이 사라진 도시가 가나자와金沢다. 가나자와는 이처럼 무언가 비밀을 간직한 신비로운 도시로 기억된다.


가나자와는 일본의 중부 호쿠리쿠 지역에 위치한 인구 45만의 도시다. 일본 전통문화를 일상생활에서 손쉽게 체험할 수 있고, 일본 사람이 가장 좋아하는 도시로 손꼽힌다. 그 명성 때문인지 연간 700만 명의 관광객이 가나자와를 방문한다. 가나자와는 시민뿐만 아니라 관광객 역시 가나자와 문화, 라이프스타일을 경험하고 즐기기를 원한다.


일본을 대표하는 전통문화 도시답게 가나자와의 시그너쳐 브랜드는 전통공예다. 가나자와 시정부가 운영하는 전통공예관광(Craft Tourism) 프로그램은 가나자와의 과거와 현재를 보고 배울 수 있는 알찬 재미를 제공한다. 이 관광 프로그램은 가가유젠, 가나자와 구타니, 가나자와 박, 가나자와 칠기, 가나자와 불단, 가가 자수, 오히야키, 가가 상감, 도라, 차노유 가마, 동나무 공예, 가가 미즈히키 세공, 가가 게바리, 후타마타 와시, 가가 데마리 등 전통 공예와 현대 공예를 함께 체험할 수 있도록 구성됐다. 가나자와 전통이 현대적 공예로 재탄생한 모습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 이 관광의 의도다.


일본을 공부하는 외국인에게도 가나자와는 중요한 교육 장소다. 미국의 명문 프린스턴 대학은 매년 50여 명의 대학생을 가나자와로 보내 6주간 집중적으로 일본 언어와 일본학을 교육한다.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 시골 마을 가나자와는 전통문화의 힘만으로 세계적인 대학의 학생을 유치한다. 이러한 전통문화의 힘을 제대로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나만 해도 10년 전에 가나자와 이야기를 들었다면 아마 믿지 않았을 것이다. 왜 프린스턴 대학이 도쿄가 아닌 가나자와에 학생을 파견하느냐고 반문했을지도 모른다.


2013년 늦은 여름에 가나자와를 방문한 나는 이 도시가 작은 규모임에도 큰 도시 부럽지 않은 문화 수준과 주거 환경을 가졌다는 사실에 놀랐다. 국제화 부문에서도 다른 일본 도시에 뒤지지 않았다. 가나자와 곳곳에서 스타벅스, 맥도널드 등 우리에게 익숙한 세계적 브랜드를 쉽게 찾을 수 있다. 시내에는 루이뷔통 매장을 포함한 많은 명품 가게가 모여 있는 ‘로데오 거리’가 있다. 미국에서도 웬만한 대도시가 아니면 보기 어려운 루이뷔통 매장이 가나자와에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외국인에게는 색다른 지역 문화 체험만큼이나 편리한 관광 인프라가 중요하다. 낯선 도시 가나자와에서 만난 친숙한 가게와 음식점이 반갑게 느껴졌다.





작지만 강한 기업, 가타니산교


시내를 관광한 후, 여행의 목적지인 가타니산교를 찾아 나섰다. 가나자와 성에서 북쪽으로 똑바로 걸어 올라가면 아사노 강 대교를 만난다. 다리 입구에서 왼쪽을 바라보면 강변을 따라 나란히 서 있는 고풍스러운 목조 건물들이 보인다. 가나자와의 3대 차야(찻집) 거리 중 하나인 가즈에마치다. 가즈에마치 도로변에 있는 조그만 건물 중 하나가 내가 찾던 세계적인 금박 회사 가타니산교의 본사였다. 본사 건물은 동네 잡화점이 아닌가 생각하고 기웃거릴 정도로 평범했다. 미닫이문을 밀고 들어가면 기념품 가게가 나오고 그 너머에는 금박 공예품을 직접 만들어볼 수 있는 금박 체험실이 있다. 점원에게 사무실은 어디냐고 물으니 계산대 옆의 문을 가리켰다. 살짝 열린 문을 통해 보이는 사무실에는 젊은 남자 직원들이 일하고 있었다. 가타니산교가 중소기업인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작은 회사인 줄은 몰랐다.


사람과 마찬가지로 기업도 외모로만 판단하면 안 되는 것 같다. 작아 보이지만 이래 봬도 가타니산교는 세계적 강소기업이다. 1899년에 창업한 이후 1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장수한 이 기업은 250여 명의 규모로 꾸준히 연 80억 엔의 매출을 올린다. 작은 고추가 맵다는 말을 이럴 때 쓰나 보다. 가타니산교는 세계에서 최고로 좋은 품질의 금박을 비롯해 은박, 알루미늄박, 전사박과 금은사를 생산한다.


가타니산교는 작지만 강하고 빠르다. 수공업에 익숙했던 다른 금박 제조업체에 앞서기 위해서 1940년대 후반에 기계화를 도입했다. 1950년대 후반에는 일본 경제의 불황으로 금박 수요가 감소하자, 전사박 생산에 새로운 기술을 도입했다. 폴리에스테르 필름 등에 금속을 기화시켜 얇게 입히는 증착법을 개발해 대량생산 시대를 연 것이다. 새로운 기술의 도입은 가타니산교의 사업 분야를 전통 공예품 소재에서 산업용 자재로 넓히는 전환점을 마련해주었다.


요즘 이 기민한 기업은 일반 소비자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고자 생활용품에도 금박을 적용할 방법을 고민하고 있다. 전화카드, 실내장식용품, 전통주, 과자, 화장품 등 제품의 경계를 지우고 금박을 입히려는 가타니산교의 시계는 오늘도 쉬지 않고 돌아간다. 가타니산교에는 국가의 경계 역시 없다. 주요 고객은 세계적 기업인 소니, 마쓰시타전기, 샤프, 도요타, 삼성 등의 전자 업체를 비롯해 프랑스의 화장품 업체까지 다국적으로 퍼져 있다. 현재 가타니산교는 미국, 프랑스, 중국 광둥, 상해, 홍콩,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등에서 판매를 담당하는 외국 지사를 운영한다.



문화적 자원을 내발적 발전에 활용한 가나자와


가나자와에는 가타니산교처럼 오랜 역사를 가진 금박 제조업체가 많다. 일본 전체 금박 생산량의 99퍼센트 이상이 가나자와에서 생산된다. 여기서 생산된 금박은 다른 지역 금박보다 월등하게 품질이 좋기로 정평이 나 있다. 고온다습한 여름, 좀처럼 영하로 내려가지 않으면서도 눈이 많이 내리는 겨울, 1300년 전통을 지닌 야시미로 온천 등이 보증하는 좋은 수질이 가나자와를 일본 금박 제조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금박 제조 공정을 소개하는 과정도 가나자와의 중요한 관광 자원이다. 금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화장품, 청주, 스시 등에 들어간 금박과 금가루를 무척 귀하게 생각한다. 사실 나는 금이 들어간 음식을 좋아하지 않는다. 금속을 먹는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금가루가 들어간 음식이라면 아무리 고급 요리라고 해도 먹지 않는다. 어쨌든 개인적인 기호는 잠시 접어두고, 다시 금박 제조 공정에 집중해보자. 금박 제조 과정을 체험할 수 있는 대표적인 장소는 히가시차야 옆에 있는 야수예금박공예관이다. 이곳에서 놀랄 만한 사실을 많이 배웠다. 금 1킬로그램으로 금박을 무려 2만 5000장을 만들 수 있다고 한다. 이는 제법 큰 빌딩도 금으로 도금할 수 있을 만큼 많은 분량이다.


금박 제조 과정은 생각보다 간단하다. 금을 롤러로 편 뒤 6센티미터 길이로 자르고 종이와 종이 사이에 1700장을 넣어 기계로 두드린다. 그러면 두께가 1000분의 1밀리미터에서 1만 분의 1밀리미터로 얇아진다. 이렇게 얇아진 금박을 종이에서 떼어낼 때 고도의 기술이 필요하다. 자칫하면 어렵게 만든 금박이 찢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떼어낸 금박을 가로세로 약 10센티미터의 규격으로 잘라내는 것이 금박 제작의 마지막 공정이다.


금박 산업은 가나자와에서 오랜 전통을 가진 산업이다. 에도 시대 가나자와의 영주였던 마에다 가문이 18세기 전반에 타지의 금박 공예가를 초청하면서 금박 산업이 시작됐다. 메이지유신 이후, 타 지역의 금박 산업이 소멸하면서 가나자와는 일본 금박 산업의 중심지로 올라섰다. 가타니산교에서 가나자와는 단순히 본사가 있는 장소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가나자와는 기업 정체성의 일부다. 금박 판매로 얻는 수익이 회사 전체 매출의 20퍼센트에 불과하지만 가타니산교의 뿌리는 금박 산업이다. 서영아와 천광암의 저서 '믿음을 팔아라'에서 가타니산교의 회장인 가타니 하치로蚊谷八郞가 금박 생산에 가진 애정을 엿볼 수 있다. 그는 “아무리 시대가 바뀌어도 우리 회사의 뿌리는 금박 제조다. 가나자와 본사를 고집하는 것도 이곳에 우리의 뿌리가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다른 가나자와 기업들도 가타니산교와 마찬가지로 지역사회에 남다른 애정을 품고 있다. 가나자와에는 일본의 ‘마치즈쿠르(지역 가꾸기)’ 전통이 유난히 강하다. 지역 기업과 일반 시민이 동참하는 ‘도시경관 트러스트’ 운동이 좋은 사례다. 1980년대 도시 개발에 소외된 오와리 거리가 쇠퇴하자 여러 지역 기업들이 ‘노점·문학·로망의 마을운동 동우회’를 결성하여 가나자와의 모습을 보존하는 거리 부흥 운동을 시작했다.


전통문화 보호에 대한 가나자와의 의지도 남다르다. 1962년 일본 정부가 ‘신新산업 도시건설계획’을 발표하여 가나자와를 신산업 도시로 지정하려고 했을 때, 가나자와의 경제 지도자들은 “일본의 안방이라고 할 수 있는 가나자와에 굴뚝에서 검은 연기를 내뿜는 공장은 어울리지 않는다”라는 이유로 이를 반대했다.


가나자와는 공예 산업과 중소기업을 중심으로 발전한 도시다. 중소기업의 점유율이 99.7퍼센트에 이를 정도로 가나자와의 주요 사업장은 모두 중소기업이다. 가나자와 기업들은 지역 고유의 문화에서 지역 경제가 발전할 수 있다는 신념으로 가나자와를 창조 도시로 발전시킨 주역이다. 1957년에 설립된 가나자와 경제동우회는 도시의 전통 공예, 음식, 문화 등을 계승하고 도시경관을 보존하는 것이 지역 경제 발전의 토대가 된다고 주장해 왔다.


가나자와의 기간산업이 섬유와 기계에 집중되어 있을 때도, 이 지역 기업인들은 주요 고객을 에도 시대의 경관이 잘 보존된 가나자와에 초대해서 비즈니스를 논의했다고 한다. 오래전부터 도시 문화를 마케팅 전략으로 활용한 것이다. 고향의 고유성을 소중하게 여기는 기업인들은 지금도 정부 및 학계와 함께 가나자와 창조도시회의, 가나자와학회를 구성하여 가나자와의 발전을 위해 노력한다.


지역 경제학자인 미야모토 켄이치 교수는 가나자와를 ‘내발적 발전’의 대표적 사례로 소개한다. 내발적 발전이란 외부에 의존하지 않고 지역의 기술, 산업, 문화 등의 자원과 인재를 중심으로 지역 스스로 성장하는 것을 말한다. 지역이 가진 전통과 비교우위를 살려 유기적인 지역 산업 구조를 만들고, 지역 산업에서 얻은 이익을 다시 지역에 투자하는 선순환 구조가 중요하다. 내발적 발전 덕분에 가나자와는 대규모 공업 단지를 유치하지 않아도 되었고, 아름다운 자연경관과 고즈넉한 도시 양식을 즐길 수 있는 도시가 되었다.


가나자와 경제의 또 다른 매력은 대학, 박물관, 자료관 등의 방대한 문화 자원이 지역 산업으로 연결된 점이다. 가나자와는 문화적 집적을 통해 문화 산업을 발전시키고 있다. 수준 높고 다양한 연구개발 기관, 공예와 장인 정신, 그리고 지속적인 혁신이 가나자와 문화 산업의 키워드다. 문화적 집적이 산업으로 연결되기는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니다. 가나자와가 어떻게 문화 자원을 축적해왔는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에도 시대로 돌아가야 한다.



마에다 가문의 문치주의가 남긴 영향


가나자와는 뚜렷한 사계절과 풍부한 강수량으로 벼농사가 발달해 술과 과자 분야의 특산품이 많다. 다도의 발달은 자연스럽게 일본 전통 과자의 발달로 이어졌다. 가나자와는 일본의 3대 과자 생산지 중 하나다. 화과자는 1600년대부터 생산해 왔다고 하니, 도시의 역사와 함께 이어져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6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일본 전통극인 ‘노能’는 가나자와를 300년간 지배한 마에다 가문의 사랑을 받은 까닭에 유독 잘 보존되었다고 한다. 무용, 극, 시, 음악이 어우러진 세계 최고의 무대 예술인 ‘노’의 존재만으로도 가나자와의 품격이 높아진다.


격조 높은 카가 요리가 발달한 가나자와는 맛의 도시이기도 하다. 가나자와의 가가 요리는 도쿄의 아카사카, 교토의 기온과 함께 일본의 3대 가이세키 요리로 손꼽힌다. 가나자와가 자랑하는 세계적 가이세키 식당이 제니아다. 호텔 안내원에게 예약을 부탁하자, 제니아는 몇 달 전에 예약해야 갈 수 있는 식당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제니아는 한국에 분점을 둔 유일한 일본 가이세키 음식점이다. 서울 청담동에 있는 ‘쥬안’이 제니아가 한국 파트너와 공동으로 운영하는 정통 가이세키 식당이다. 제니아의 2대 사장인 다타기 신이치로 사장은 세계적인 스타 요리사다. 신이치로 사장은 일본 황실 관계자, 유명 정치인, 기업 경영자 등 제니아를 방문한 수많은 일본 및 세계의 유명 인사들과 친분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가나자와가 문화 도시로 발전한 데에는 에도 시대 마에다 가문의 문치주의文治主義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마에다 가문은 전국에서 학자, 명인을 초빙하여 학술, 공예, 예능을 장려하고 보급했다. 에도 시대에 가나자와는 풍부한 수자원과 비옥한 토지를 바탕으로 일본의 5대 경제 중심지 중 하나였다. 이러한 경제적 풍요가 학술과 예술 진흥의 물적 토대가 됐다. 마에다 가문은 에도나 교토의 인재를 초빙하여 기술을 전수받고 새로운 기술을 개발했을 뿐만 아니라 기술개발을 위해 다양한 교육기관도 설립했다.


문예 증진에 대한 마에다 가문의 동기가 순수하지만은 않았다. 에도시대에 부유한 지역 중 하나인 가나자와를 지배하고 있었기에 마에다 가문은 항상 중앙의 도쿠가와막부를 위협하는 존재였다. 도쿠가와막부는 지역 유력 가문의 자녀를 에도에 살게 하거나 경쟁 관계에 있는 지역을 상호 경계하게 하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지역의 유력 가문을 감시했다. 이런 환경에서 마에다 가문은 군사력 강화에 무심한 모습을 보여야 했다. 그래서 중앙에 군사적으로 도전할 의사가 없음을 보이기 위해 문치주의를 선택한 것이다.


시내 중심에 있는 가나자와 성에서 마에다 가문은 가가 번(가나자와 주변 지역)을 지배했다. 가나자와 성은 메이지유신 이후 몇 차례 수난을 겪었다. 일본 군부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성을 군사령부로 사용했고 전후에는 가나자와 대학 캠퍼스로 사용됐다. 1989년 가나자와 대학이 교외로 이전한 후에야 성 복구 작업이 시작되었고, 덕분에 지금은 과거에 위용을 뽐내던 가나자와 성의 일부를 볼 수 있게 됐다.


복원된 가나자와 성 앞에는 일본 3대 정원 중 하나인 겐로쿠엔兼六園이 있다. 마에다 가문이 오랫동안 가꾼 공간이다. 1874년부터 대중에 개방된 겐로쿠엔의 유명한 다리를 건너면 가나자와 성의 정문이 나온다. 정문은 가나자와 성에 속한 건물 중에서 유일하게 원형을 유지하면서 자리를 지킨 건물이다. 제1관문을 통과하면 사방이 성벽으로 둘러싸인 공터가 나오고 그 오른쪽에 성 안으로 들어가는 제2관문이 있다. 제2관문을 통과하면 비로소 거대한 성 안의 풍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엄청난 규모의 성은 과거 마에다 가문의 위용을 짐작하게 한다.



모두를 예술가로 만드는 문화 도시의 진면목


에도 시대와 메이지유신 이후 지금까지 계속되는 지역 리더들의 아낌없는 문화 지원은 가나자와 정체성 형성에 중요한 토대가 되었다. 에도 시대에 가나자와 영주는 무사 문화를 확립시키는 동시에 미술공예와 학술을 장려하여 가나자와가 교토, 도쿄와 함께 에도 문화의 중심지가 되도록 힘썼다. 고유 사상, 미술공예, 전통문화, 음식 문화 등 다양한 분야의 문화예술을 중시하며 나아가 인재 정착에도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가나자와는 현재 자신만의 고유한 브랜드를 개발하기 위해 매일 노력하고 있다.


가나자와의 400년 도시 역사와 전통은 문화 자원을 활용한 산업을 통해 도시 활성화에 기여했다. 가나자와 문화가 시민의 라이프스타일에 흡수된다면 도시의 문화적 정체성은 더욱 오래갈 것이다. 가나자와 시 주요 정책 담당자는 전통문화가 새로운 문화와 결합하여 현대적 전통으로 재탄생하는 것과 더불어 문화예술이 시민의 생활에 스며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지적한다. 이를 위해서 가나자와는 전략적으로 문화예술 시설을 만들었다. 우타츠야마공예공방, 시민예술촌, 21세기현대미술관이 대표적인 문화 공간이다.


우타츠야마공예공방은 1989년 가나자와 시제 시행 100주년 기념으로 설립됐다. 이곳에서 학생과 시민은 시민 공방 프로그램과 공예 교실 등에 참여하여 문화 체험을 할 수 있다. 공방 연수 프로그램이 특히 인상 깊다. 31명의 국내외 연수생은 도자기, 칠기, 염색, 금속공예, 유리공예 분야에서 3년간 연수를 받는다. 연수생 대부분은 외지 출신이지만, 교육 과정을 수료한 이후에는 외국 유학이나 가나자와 시내에서의 화방 또는 개인 공방 창업 비용을 지원받을 수 있다. 이들 중 절반 정도는 가나자와에 정착한다고 한다. 창업 비용뿐만 아니라 일본과 외국의 공예 인재 간 아이디어 교환, 협업, 그리고 꾸준한 전시 기회도 연수생들이 가나자와에 정착하게 하는 요소이다. 공예에 대한 높은 관심과 이해도를 지닌 가나자와 시민은 공예 작품의 좋은 소비자가 되므로 가나자와는 예술가들이 정착하기에 무척 매력적인 환경이다.


예술에 대한 높은 안목을 가진 가나자와 시민은 문화예술을 스스로 즐기는 데 무척 익숙하다. 문화예술을 즐긴다는 말에는 그림, 연극, 공연을 보고 듣는 것으로만 그치지 않고 스스로 창작하고 공유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가나자와 시에서 모두를 예술가로 만드는 공간이 바로 가나자와 시민예술촌이다. 원래 1919년에 설립된 방적 공장이었던 이곳은 섬유 산업의 쇠퇴와 함께 1993년에 문을 닫았다. 가나자와 시는 이 공장을 인수해 시민의 문화 공간으로 재탄생시켰다. 시민예술촌에서 가나자와 시민은 1시간에 2000원이라는 저렴한 비용으로 9만 7000제곱미터의 넓은 공간을 연중무휴, 하루 24시간 동안 즐길 수 있다. 삭막했던 방적 공장이 음향과 조명 등 전문 설비를 갖추고 음악, 연극, 미술 등의 창작 활동 공간으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가나자와 시민은 각자가 감독이 되어 다양한 예술 활동 연습과 발표를 함으로써 시민예술촌 운영을 주도한다. 시 전체 인구 45만 명 중 한 해 25만 명의 시민이 이용한다니, 청년과 중장년층 대부분이 시민예술촌의 ‘촌인’인 셈이다.



가나자와 21세기현대미술관


가나자와 미술계의 중심지는 21세기현대미술관이다. 2004년 10월에 개관한 이 미술관은 현대 문화를 대표하는 공간이다. 시민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공원처럼 꾸며져 있으며 120개의 통유리로 이뤄진 외관을 통해 외부 전경을 360도로 볼 수 있게끔 설계됐다. ‘정원처럼 들어가기 쉬운 미술관’은 전시, 도서관, 강의실, 키즈 스튜디오로 구성돼 있다. 시민은 미술관 안내, 어린이 프로그램 보조, 전시 기획 등을 통해 미술관 프로그램에 참여할 수 있다.



학술 도시의 단면을 보여주는 이시카와근대문학관


가나자와는 일본에서 유명한 문학 도시이기도 하다. 시내에는 이시카와근대문학관을 비롯해 가나자와 3대 문호로 불리는 도쿠다 슈세이, 이즈미 교카, 무로 사이세이 기념관이 세워져 있다. 이시카와근대문학관은 가나자와의 학술과 문화를 상징하는 공간이다. 가나자와 3대 문호 외에도 수십 명이 넘는 가나자와 출신의 근현대 소설가, 시인, 사상가를 기념한다. 가나자와의 문학 전통은 지금도 계속된다. 이즈미 교카상을 통해 요시모토 바나나, 유미리 같은 인기 소설가를 발굴하고 있다.


미술공예 분야에는 가나자와 출신 인간문화재나 예술원 회원이 많다. 인물화로 유명한 다카미쓰 기즈야를 비롯해 마쓰다 곤로쿠, 우오즈미 이라쿠, 기무라 우잔 등이 가나자와 출신이다. 도자기, 칠기, 금공, 염색, 목공예, 죽공예 같은 전통 공예 분야에서 수많은 인재를 배출한 도시가 바로 가나자와다. 문화예술계 인재를 육성하는 기관은 일본에서 손꼽히는 명문 미술대학인 시립미술공예대학이다.


가나자와는 에도 시대부터 학문으로 유명했다. 전국에서 책을 모아 소장했기 때문에 많은 책을 가진 도시라는 뜻으로 ‘서부書府’라고 불리었다. 가나자와는 메이지유신 이후에도 인재 도시의 지위를 유지했다. 메이지 정부는 현대식 인재 육성을 위해 일본 전역에 5개의 공립 고등학교를 설립했는데, 그중 제4고등학교를 가나자와에 세웠다.


제4고등학교의 옛 본관이 현재 이시카와 근대문학관으로 사용되는 건물이다. 제4고등학교의 많은 졸업생이 가나자와의 작가와 사상가가 되었다. 빨간 벽돌로 지어진 유서 깊은 건축물인 이곳에서 가나자와를 문학과 인재의 도시로 만든 제4고등학교 졸업생들의 발자취를 더듬을 수 있다.



식문화와 식품공업의 조합


가나자와의 별명은 ‘작은 교토’이다. 가나자와에는 히가시차야와 가즈에마치처럼 교토에서 볼 수 있는 찻집 거리가 많다. 찻집 거리 주변에는 잘 보존된 전통 일본 가옥도 많아서 영화 촬영지로도 유명하다. '게이샤의 추억', '마이코 한Maiko Haaaan' 등 교토를 배경으로 만들어진 많은 영화가 실제로는 이곳, 가나자와에서 촬영됐다. 많은 사람이 가나자와를 교토와 비슷하고 교토만큼 전통문화가 잘 보존된 도시로 기억한다. 가나자와의 한 기업인은 가나자와를 "약 4백 년간에 걸쳐 전화(戰火) 및 자연재해가 없어 오랜 문화유산들이 그대로 보존될 수 있었고, 귀족적인 교토 문화와 서민적인 에도문화가 함께 살아있는” 도시로 소개한다(전북일보, 2004/6/25).

 

가나자와와 교토의 유사성은 전통문화와 전통산업에 그치지 않는다. 교토가 지역 자부심을 바탕으로 세계적인 첨단산업을 개척했다면, 가나자와는 식문화를 바탕으로 굴지의 식품공업을 개척했다. 회전초밥집주인이면 누구나 갖고 싶어 하는 '명품' 컨베이어 벨트를 생산하는 기타니혼카코,  아사히맥주, 기린맥주, 코카콜라 등에 자동생산장비(보틀링 기계)를 공급하는 시부야공업주식회사가 가나자와를 대표하는 식품공업 기업이다. 식문화가 단순히 외식, 식품 가공업, 도소매업을 넘어 기계산업의 기반이 될 수 있는 지역 문화임을 가나자와에서 배울 수 있다.


소비재와 소비재를 생산하는 기계산업의 조합은 가나자와의 전통적인 섬유산업에서도 관찰할 수 있다. 섬유산업의 글로벌화로 쇄락하기 시작한 1980년대 전까지 가나자자의 섬유공업은 섬유기계공업과 지역 내에서 상호 보완적으로 발전했다. 지역이 내발적 발전을 추구하는 데 있어 전통산업의 육성과 더불어 그 산업의 전후방에서 새로운 산업을 개척해 전통산업을 확장하는 것이 중요하다.  


에도 시대에 중앙정부의 견제에 맞서 가나자와는 정치 세력화라는 ‘직진’ 대신 중앙정부와 대립하지 않는 선에서 살아남으려고 문화 진흥을 택했다. 중앙과 거리를 두었기 때문에 지금의 문화를 이룩하고 이를 바탕으로 공예, 섬유, 기계, 식품 산업을 개척할 수 있었다. 중앙과 차별화된 지역 정체성이 어떻게 지역발전의 도구가 되는지를 교과서적으로 증명하는 도시다.




출처: 작은 도시 큰 기업, 2014


1차 수정 202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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