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고야 메이지 무라(明治村)
재개발로 철거되는 옛 건물과 사라지는 그 문화는 어떻게 해야 할까? 서울의 피맛골처럼 새로 짓는 건물의 일부에 원모습을 보전하는 것이 답일 수 있다. 그렇지만 피맛골 모델로는 만족 못하는 사람은 질문할 것이다. 왜 건물이나 거리 전체를 이전해 보존하지 않는지를.
일본에 한 시대의 건물을 모아 놓은 건축 박물관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나고야의 메이지 무라(明治村) 박물관이다. 메이지 무라는 말 그대로 메이지 시대 건축물을 모아 놓은 마을이다. 사람이 살지 않고 인위적으로 건설된 마을이니 테마파크로 표현하는 것이 정확하다.
메이지 무라를 반나절 돌아본 후의 감회는 아쉬움이었다. 맞다, 건물을 옮긴 정성은 존경해야 한다. 하지만 건물을 옮긴다고 해서 문화와 분위기를 옮길 수 없다는 상식은 여전히 통했다.
아이치현 이누야마市에 있는 메이지 무라를 찾아가는 길은 나고야에서 시작한다. 나고야역에서 북쪽으로 급행열차를 타고 30분 정도 흐르면 역에 도착해, 다시 버스를 타고 20분을 가야 메이지 무라에 도착한다. 이 곳에 메이지(1867-1912), 다이쇼(1912-1926), 초기 쇼와(1926-1945) 시대 건물 65 개가 30만 평의 넓은 부지에 복원돼 있었다.
메이지 무라는 두 친구의 노력으로 탄생했다. 1962년 도쿄 야마노테 전철을 타고 가던 건축가 다니구치 요시로와 메이테츠(나고야철도) 임원 츠치카와 모토오는 메이지 시대 건축의 상징인 로쿠메이칸이 철거되는 모습을 보고 근대 건축물을 보전하는 방법을 찾기로 의기투합한다. 대학 동창인 이 두 사람의 설득으로 메이테츠는 부지를 매입, 3년 간의 준비 기간을 거쳐 1965년 3월 박물관마을의 문을 열게 된다.
필자는 에드워드 사이덴스티커(Edward Seidensticker)의 저서 『도쿄 이야기』를 읽으면서 처음으로 메이지 무라의 존재를 알게 됐다. 그는 책 곳곳에서 미국 건축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Frank Lloyd Wright)가 1923년 건설한 메이지 시대의 대표 건축물 데이코쿠(제국, 임페리얼) 호텔이 철거된 점에 대해 아쉬움을 표했다. 그래서인지 데이코쿠 호텔의 본관과 로비 일부가 나고야의 작은 마을로 옮겨졌다는 사실을 독자에게 알려줬다.
사이덴스티커가 소개한 데이코쿠 호텔 철거 에피소드는 일본 도시 문화에 대한 필자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누구보다 장인정신과 보전 정신이 강한 일본이 왜 메이지 건축물을 제대로 보호하지 못한 걸까?
보다 흥미로운 쟁점은 도쿄 도시 역사에서 메이지 시대가 차지하는 위치다.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는 일본을 대표하는 메이지 시대의 위상이 도시 분야에서는 공고하지 못하다. 도쿄를 거닐어도 전근대(에도)와 현대가 근대(메이지)를 압도함을 느낄 수 있다.
메이지 건축 문화의 위축은 크게 세 가지 원인에서 찾을 수 있다. 첫째, 잦은 천재지변으로 인해 건축물을 보전하는 전통이 다른 분야에 비해 약하다는 점이다. 두 번째는 재개발 논리와 건설산업의 영향력이다. 한국만큼 건설과 부동산 투자에 의존하는 일본 경제에서 건설산업의 재개발 논리가 도시 정책을 지배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세 번째 가설은 메이지 건축물에 대한 자격지심이다. 민족주의 정서가 강했던 1950--60년대에 일본은 서양 건축을 비판 없이 수용한 메이지 건축물을 보존하는데 소극적이었다.
일본 도시의 역사는 반복되는 파괴와 재건축의 역사다. 20세기만 해도 도쿄는 관동대지진, 미군 대공습, 도쿄올림픽 등 최소 3회에 걸쳐 시가지 전체를 재건축하는 대규모 도시 개발을 시행했다. 이런 역사 속에서 메이지 시대를 포함한 특정 시대의 건축물을 적극적으로 보호할 특별한 이유와 여유가 있었을까? 세 번에 걸친 대대적인 도시개발은 일본의 근대 건축물의 존재를 약화시켰다.
1923년 9월 1일 발생한 관동대지진은 일본 역사상 가장 큰 피해를 준 지진이었고, 시타마치로 알려진 도쿄 구도심 5개 구의 90%를 파괴했다. 지진 자체보다 지진의 여파로 발생한 대규모 화재가 목조건물이 밀집된 시타마치를 폐허로 만들었다. 이때 신바시역, 아사쿠사의 12층 탑 료운가쿠 등 대표적인 메이지 건물들이 소실됐다.
1944년 본격적으로 시작된 미군의 폭격은 또 한 번 도쿄 원도심을 잿더미로 만들었다. 1945년 3월 9-10일 소이탄을 사용한 폭격의 피해가 가장 컸다. 7만 명에 가까운 도쿄 주민이 희생됐고, 공장과 산업 시설이 모여있던 스미다강 동쪽 혼조와 후카가와 지역이 큰 피해를 입었다. 게이오 대학 건물 등 다수의 근대 건축물도 폭격으로 사라졌다.
전후 복구 과정도 근대 건축물에 유리한 환경은 아니었다. 전후 일본 건축계에 미국식 신기술이 들어왔고, 나고야, 도야마, 후쿠이 등 산업 도시들이 대형 도로와 블록 중심의 새로운 미국식 도시로 재개발됐다. 도쿄는 1964년 올림픽을 준비하면서 다시 대규모 도심 재개발을 추진했다. 마루노우치 지역의 대지주인 미츠비시 부동산은 1920년대 '런던 타운'의 영국식 붉은 벽돌 건물을 미국식 고층 오피스 건물로 재건축했다. 마로노우치 근대식 건물 중 온전히 보전된 건물은 도쿄역과 도쿄은행협회 두 건물뿐이다.
그러나 일본의 근대 건축물이 많이 사라지는 것을 모두 불행한 역사의 탓으로 돌리기는 어렵다. 도쿄올림픽 이후에도 일본이 지속적으로 근대 건축물을 철거하고 있기 때문이다.『Defining Urban Design』의 저자 에릭 멈포드(Eric Mumford)는 이런 현상을 동아시아적 특징으로 설명한다. 그는 2015년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동아시아에서 오래된 건축을 다루는 건 낡은 옷을 다루는 태도와 같아, 오래됐다고 생각되는 것들은 가치를 잃어 대체되고, 그래서 도쿄에는 주로 1980년대의 건축물 밖에 남아있지 않다”라고 전한다.
가장 최근에 철거됐고 현대 건축사에서 중요하게 다뤄지는 건물이 롯폰기 오쿠라 호텔이다. 1962년 설립된 오쿠라 호텔은 1960년대 일본의 건축양식을 대표하는 일본 모더니즘 걸작으로 꼽힌다. 리처드 닉슨(Richard Nixon), 지미 카터(Jimmy Carter)부터 버락 오바마(Barack Obama)에 이르기까지 미국 정상들과 세계 유명 스타들이 즐겨 찾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오쿠라 호텔은 유구한 전통과 명성에도 불구하고 2015년 충격적인 철거 소식을 맞이한다. 본사는 2020년 도쿄올림픽을 앞두고 호텔 본관 자리에 고층 복합 건물을 건설할 계획이다.
현재 2020년을 준비하는 도쿄는 1964년 올림픽 때와 버금가는 대규모 도심 재개발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오랫동안 지역 주민의 사랑을 받아온 유라쿠초, 시나가와, 간다의 골목길들도 철거되고 있다.
반복되는 재개발을 통해 대규모 쇼핑센터, 사무실, 주거 빌딩을 지속적으로 건설하는 도쿄를 설명하는 단어는 서울과 다르지 않은 토건주의다.
선우정 조선일보 기자는『일본, 일본인, 일본의 힘』에서 일본의 토건주의가 다나카 가쿠에이 전 수상이 주도해 1953년 시작한 '도로 특별재원' 제도에서 본격화됐다고 설명한다. 이 제도를 통해 일본 정부는 휘발유세를 반드시 도로 건설에 사용하도록 의무화했고, 건설업계와 정치권은 휘발유세 수입으로 일본 전역에 엄청난 규모의 도로망을 건설했다.
건설업계와 정치권의 유착관계는 도시 재개발 사업에도 영향력을 행사했다. 특히, 버블 경제가 붕괴한 1990년대 이후 일본 정부는 건설업계의 도시 재개발 사업을 경제 활성화 정책으로 적극 지원했다. 그 결과 도쿄는 롯폰기 힐즈(2003), 도쿄 미드타운(2007), 신마루노우치 빌딩(2007), 그란 도쿄(2007) 등 대규모 대형 쇼핑단지로 이어진 도시가 됐다.
흥미롭게도 도쿄가 도시재생을 위해 모든 건물을 희생시키지 않는다. 근대 메이지 건축물에는 '가혹'하지만 에도시대 유산은 유달리 보호한다. 도쿄가 에도문화를 적극적으로 복원하고 홍보하는 모습을 도시 전역에서 목격할 수 있다. 도쿄 관광 책자에서 가장 많이 홍보하는 지역도 가와고에, 아사쿠사, 오차노미즈, 야나카 등 에도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도심과 근교 지역이다.
스미다 지역에 있는 도쿄 역사박물관의 이름도 '에도도쿄박물관'이다. 도쿄의 역사에서 에도시대를 중요시하는 것이다. 전시관 공간의 대부분도 에도시대 전시물에 할애했다. 또한 오다이바의 오오에도 온천 등 에도시대 거리를 재연한 '민속촌'을 여러 곳에 건설했다.
새로 디자인한 하네다 공항의 상가도 에도 상가로 디자인했다. 이 상가의 하이라이트는 에도 상가로 들어가는 입구에 설치한 실물 크기의 니혼바시 복제물이다. 니혼바시는 에도 시대에 에도를 방문하는 여행객이 에도로 진입하면서 통과하는 첫 관문이었다. 서울로 비교하면 도쿄의 명동이 바로 니혼바시이다. 에도가 시작되는 니혼바시 건너편에 일본은행, 증권거래소, 미스코시 백화점도 들어섰다.
그런데 실제 니혼바시를 방문하면 그 위를 지나가는 고속도로 모습에 깜짝 놀란다. 일본이 어떻게 에도의 관문이라는 니혼바시 위로 고속도로를 건설할 수 있을까? 난개발로 유명한 서울도 남대문 위에 고가도로를 건설할 생각은 하지 않는다.
우리는 일본 정부로부터 '홀대'를 받은 니혼바시가 메이지 시대에 개축된 메이지 건축물이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현재의 니혼바시는 메이지 정부가 1603년 건설된 목조 구조물을 1911년 철제와 석조를 혼합한 다리로 재건축한 다리이다.
건축학적 관점에서 사라진 메이지 건물 중 가장 아쉬운 건물은 역시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데이코쿠 호텔 본관 건물이다. 이 건물은 관동대지진의 공격에도 무너지지 않은 몇 안 되는 대형 건축물이었다. 개인 스캔들로 내리막 길을 걷던 라이트의 커리어도 데이코쿠 호텔의 지진 내구성 덕분에 다시 살아났다고 한다.
한국 건축계가 지금까지 한국 근대 건축사를 주로 서양식 건축의 비자발적 수용이라는 관점에서 비판해 근대 건축가를 높이 평가하지 않는다. 이상헌 교수는 “한국 건축의 근대성의 특징은 크게 보아 피동적 근대화로 인한 전통의 단절과 식민지화로 인한 주변성”으로 설명한다.
1950-60년대 일본 건축계도 두 가지 이유에서 근대 건축물을 보호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지 않았다. 첫째, 메이지 시대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이 팽배했다. 군국주의로 귀결된 메이지 시대에 대해 비판적인 진보적 비평가들이 건축물을 포함한 그 유산을 보호하는 것을 지지하지 않았다. 둘째, 문화계 전반에 확대된 민족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당시 일본 건축가들은 전후 손상받은 민족적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해 보다 일본적인 건축 양식을 지향했다.
메이지 건축물에 대한 최근 인식은 다르다. 2000년대에 들어서 건축과 디자인의 레트로(Retro) 붐이 일어났고, 메이지 건축물도 이를 계기로 복원되기 시작했다.
반나절을 소요해야 다 둘러볼 수 있는 광활한 메이지 무라에서 이전된 메이지 건축의 상징 데이코쿠 호텔은 인상적이었다. 중심 지역의 언덕에 위치해 아름다운 호수가 한눈에 내다보이며, 외벽 또한 마치 마야 사원에 온 것처럼 현란하고 섬세했다.
그렇지만 데이코쿠 호텔 건물을 보며 한번 사라진 것은 돌아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사람이 살지 않은 건물은 말 그대로 껍데기 같이 공허하고 쓸쓸하게 느껴졌다. 오래된 건물을 이전해 보전하는 방법이 궁금해 찾아왔지만, 오히려 재개발과 철거 자체를 하지 않는 것이 맞다는 확신을 얻는 기회였다.
덤으로 얻은 수확은 도쿄 건축의 역사다. 메이지 건축물의 안식처가 된 메이지 무라의 역사를 통해 도쿄가 왜 메이지 시대 건축물 보호에 오랫동안 소홀했는지를 알게 됐다. 일본인에게 메이지 시대는 한국인에게 있어서의 근대처럼 순수하게 그리워할 수 없는 대상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