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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골목길 경제학자 Apr 05. 2017

글로벌 기업 엡손이 뿌리내린 일본의 소도시 스와

엡손 스토리

도쿄 신주쿠역에서 쾌속 열차를 타고 2시간 만에 목적지 스와(Suwa)시에 도착했다. 예상대로 가미스와(Kami-Suwa) 역은 일본의 다른 소도시 역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간이역 수준의 역사, 수수한 건물 몇 개의 한적한 상권 등 익숙한 모습이었다.


발이 이끄는 대로 바로 스와호로 향했다. 스와는 스와호 동편에 위치한 호반 도시다. 호수 지역에 들어서자 시계 도시라는 명성에 걸맞게 대형 해시계가 보였다. 호수 산책길에는 스와의 산업 역사를 설명하는 조형물들을 볼 수 있었다.


스와의 시계산업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스와호 해시계
스와의 산업 역사의 또 하나의 상징인 제사기계


전통적으로 농업과 임업을 중심으로 살아 온 스와 지역19세기 처음으로 들어온 산업은 실크산업이었다. 스와호 서쪽에 접해있는 오카야는 한 때 일본 최대의 생사 생산지와 수출지였다. 1920년대에 실크산업이 기울기 시작해, 1940년 이후에는 시계와 정밀기계 산업이 제사 산업을 대체하는 신성장산업으로 자리 잡았다.


된장 공장 옆 골목길로 연결된 엡손 본사
스와에 자리잡은 일본 유명 된장 공장 다케야


그 중심에는 글로벌 IT기업 엡손이 있다. 사실 스와를 방문한 목적은 일본 정밀기계산업 대표주자 엡손 본사를 탐방하기 위해서다. 호수 산책길을 따라 걸으니 유명 된장 기업 다케야의 공장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너머에 엡손 본사로 보이는 그리 높지 않은 건물 몇 채가 모습을 드러냈다. 본사가 맞는지 자문할 정도로 건물들이 소박했다. 기대가 높았던 것일까? 내가 맞닥뜨린 엡손 본사는 ‘기찻길 옆 오막살이’ 같았다.  


골목길 따라 정문 앞으로 다가가니 본사 단지가 멀리서 본 것보다는 컸다. 1942년 창업 당시 사용한 건물이 여전히 보전돼 있고, 회사 부설 정보과학전문학교가 존재하는 것도 흥미로웠다. 아마도 소도시의 인재 풀이 제한적이어서 부설 학교를 통해 전문기술자를 직접 육성하는 것으로 보였다.




글로벌 기이 뿌리내린 곳, 스역사


창조인재 육성을 위한 엡손 정보과학전문학교


엡손이 스와에 창업해 자리 잡고 지역 인재를 직접 육성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나라와 같은 아시아 선진국이지만 우리와 달리 일본에는 스와같이 세계적인 기업의 본사를 보유한 지방 도시가 많다.


그중 스와가 특별한 이유는 도시의 규모와 위치다.


스와는 일본의 산업 중심지와 거리가 먼 나가노현 산악지대에 위치한 인구 5만의 소도시다. 이 곳을 찾기 전 읽은 신문기사는 스와의 수자원에 주목했다. "도쿄 북쪽 나가노(長野)현의 스와시는 물이 맑은 것으로 유명한데, 깨끗한 물이 대량으로 필요한 시계·카메라·렌즈 산업 등이 전후(戰後) 크게 번성했다."


일본 친구의 전언에 따르면, 엡손은 제2차 세계대전 중 미국의 폭격을 피해 생산 시설을 스와로 옮긴 세이코시계의 공장으로 시작했다고 한다. 혹시 세이코시계가 스위스의 시계산업중심지인 주라산맥과 비슷한 청정 지역 스와를 찾아간 것은 아닐까? 엡손이 있는 스와의 도시경쟁력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세이코시계의 역사부터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세이코시계와 엡손은 현재 일본 특유의 ‘계열형 기업조직(Keiretsu)’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세이코시계의 제2 공장으로 시작한 엡손


1881년 도쿄 긴자에서 시계 수리점으로 창업한 세이코시계(공식 이름은 세이코사)는 1895년 첫 번째 시계 생산, 1913년 손목시계 라우렐(Laurel) 생산 등 일련의 혁신을 통해 20세기 초 일본을 대표하는 시계 기업으로 성장했다.


도쿄 기업임을 홍보하는 1930년대 세이코 시계 포스터


세이코시계가 나가노현 스와에 제2 공장을 설치한 시기는 1942년이었다. 1941년 태평양 전쟁 발발로 도쿄 지역 기업들이 생산설비를 나가노현, 야마나시현 등 산악지역으로 이전했는데 세이코시계도 같은 이유로 스와를 선택했다.


야마나시현으로 이전한 기업들은 전후 출신 도시로 돌아갔으나 나가노현으로 이전한 일부 기업들은 현지에 잔류했고 이들 기업 중심으로 스와 정밀기계공업이 형성됐다.


그 후 스와의 정밀기계공업은 나가노 산악지역의 건조한 기후와 풍부한 수자원을 경쟁력으로 꾸준히 성장했다. 많은 사람들이 한 때 스위스와 비슷한 자연환경에서 정밀기계산업을 키운 스와를 '동양의 스위스'로 칭하기도 했다.


시계 생산 시설을 스와로 이전한 세이코시계는 점진적으로 시계 판매와 생산을 분리하기 시작했다. 도쿄 본사가 기획과 판매를 담당하고 시계는 스와와 치바 등 다른 지역 공장에서 생산했다.


분업 구조가 공고화되면서 2000년대 중반 세이그룹은 판매 사업을 하는 세이코홀딩스, 시계 생산을 하는 세이코인스트루먼트, 세이코엡손 3개사로 분리됐다. 2009년 세이코홀딩스가 세이코인스트루먼트를 합병해 그룹 구조를  세이코홀딩스와 세이코엡손 2개 기업 체체로 단순화했다.


세이코홀딩스와 세이코엡손은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다. 이 둘은 한 기업이 다른 기업을 지배하는 수직적 관계가 아니다. 엡손이 아직도 역사와 전통에 따라 세이코홀딩스에 시계를 공급하는 장기 계약 관계를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세이코시계 창업자 긴타로 하토리의 후손들이 엡손 주식의 6 퍼센트를 소유하지만 엡손을 지배하지는 않는다.





스와의 지역 중심적 산업 문화


세이코시계의 자회사로 시작한 엡손은 이제 오히려 모기업을 능가하는 하이테크 기업으로 성장했다. 사업 영역도 시계와 시계 부품을 넘어 프린터와 로봇으로 확대했다. 엡손의 2014년 매출은 100억 달러로 세이코홀딩스 매출 20억 달러의 5배였다.


세이코시계가 스와를 선택한 배경에는 지리적 위치나 기후뿐 아니라 산업 문화도 일조했다.


세이코시계가 와를 찾았을 때 이 도시이미 실크산업과 관련된 산업 생태계와 산업 인력 풀이 형성된 산업도시였다. 정밀공업의 모태였던 실크산업의 흔적은 도심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지역 주민을 위해 설립된 가타쿠라관
스와의 좋은 수자원을 활용한 가타쿠라 온천


그중 하나가 일본식 건물이 늘어선 호숫가에 우뚝 서있는 서양식 대형건물 가타쿠라관이다. 19세기 말 일본 최대 생사기업으로 재벌 반열에 오른 가타쿠라공업의 창업자 이치스케 가타쿠라가 1928년에 주민의 후생과 사교를 위해 이 건물을 건설했다.


가타쿠라가 1873년에 실크공장을 창업한 곳이 스와다. 가타쿠라관을 시에 선물하기 8년 전인 1920년에 가타쿠라공업은 본사를 도쿄로 이전했다. 가타쿠라관은 현재 미술관, 온천, 식당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런데 왜 엡손은 가타쿠라공업처럼 입지조건이 더 좋은 곳으로 본사를 이전하지 않았을까? 연 10조 매출의 세계적인 첨단기업으로 성장했지만, 아직도 스와에 본사를 유지하는 이유가 궁금했다. 아무리 일본이라도 엡손이 고립된 소도시에서 첨단산업 인재를 유치해 도시산업 경쟁력을 계속 유지할 수 있을까?


엡손의 스와 본사는 형식적인 본사가 아니다. CEO와 최고경영진이 실제로 본사에서 주도적으로 다양한 사업을 추진한다. R&D를 포함한 엡손의 주요 시설과 공장도 모두 스와 주변에 위치해 있다.


1960대 프린터, 1980년대 PC와 빔프로젝터 개발로 글로벌 IT 기업으로 도약한 엡손의 미래 비전도 의욕적이다. 우스이 미노루 사장은 최근 “고효율·초소형·초정밀 기술을 통해 프린팅, AR·VR을 포함한 비주얼 커뮤니케이션, 웨어러블, 로봇 분야에서 혁신을 이루고 동시에 인공지능(AI) 등의 소프트웨어(SW) 개발도 본격 추진할” 계획을 발표했다.


엡손의 기본 경쟁력은 이처럼 모노즈쿠리로 대변되는 장인정신다. 가치 중심적 기업 철학도 엡손의 장점이다. 엡손 글로벌 커뮤니케이션 담당자는 "엡손은 단순한 프린터 회사가 아니다. 우리 목표는 우리 기술이 요긴하게 쓰여 고객과 사회, 인류의 삶을 개선하는 것이다"라고 밝혔다.

스와 지역의 산업 생태계와 지역 사회의 전폭적인 지지도 엡손의 경쟁력으로 작용한다. 지역을 대표하는 글로벌 기업으로서 지역이 제공할 수 있는 최고의 인재와 자원을 공급받는다.  





스와의 또 다른 장점: 도시와 기업 문화


스와를 처음 가본 사람은 한적한 소도시 경관의 이 도시를 과소평가할 수 있다. 스와는 일본에서 유명한 온천 휴양 도시이며, 주변은 일본의 알프스라고 불리는 아름다운 산악지역과 고원지대로 둘러싸여 있다. 질적인 라이프스타일을 추구한다면, 아웃도어와 휴양을 즐길 수 있는 스와만큼 좋은 도시도 많지 않다.


인구가 5만 밖에 안 된다는 주장도 사실 오해의 소지가 있다. 스와의 인구는 5만에 불과하지만, 스와 시민의 실제 생활권은 인구 20만에 이르는 ‘스와분지’ 전체를 포함한다. 스와가 자랑하는 정밀기계 중소기업들이 스와분지 전역에 분포돼 있다.


무엇보다 스와에는 일본의 다른 산업 도시에서 찾아 볼 수 없는 독특한 기업가 정신과 산업 문화가 살아있다.


스와의 정밀기계공업은 이런 지역적 특성을 이어받아 일본에서도 독특한 산업 문화를 가진 산업 생태계로 평가받는다. <교토식 경영>의 저자 스에마쓰 지히로는 이렇게 설명한다.


"나가노현에 있는 스와오카야의 공업집적지대에도 고유한 지역적 특성을 배경으로, 독특한 경영자를 가진 기업들이 많다. 이곳의 공장들은 세이코시계, 산쿄정밀기계, 올림푸스카메라, 교세라 등에 대한 하청 작업을 통해 고도의 정밀가공기술을 제공해왔다."


소도시 기찻길 옆 골목길에서 제4차 산업혁명 기술을 개발하는 글로벌 기업 엡손, 그리고 엡손을 키운 지역 산업 생태계가 신성장동력을 찾는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간단하다.


작은 도시라도 지역 자원을 효율적으로 동원하고 연결하면 스와분지와 같이 세계적인 첨단산업 생산지로 성장할 수 있다.


산업전략 권위자 마이클 포터가 주장한 대로, 지역 산업 경쟁력은 단순히 도시 규모로 결정되지 않는다.




아래는 참고한 글입니다.


스에마쓰 지히로, 교토식 경영, 아라크네,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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