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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골목길 경제학자 Aug 19. 2020

홍대 보헤미안의 저항

‘인문학, 라이프스타일을 제안하다’는 19세기 이후 서구 역사를 부르주아에 대한 반문화 저항의 역사로 기술한다. 19세기 부르주아가 지배계급으로 자리 잡자 보헤미안을 시작으로 히피, 힙스터, 노마드가 연쇄적으로 부르주아의 물질주의에 도전한다.


한국 현대사에서도 보헤미안은 저항세력이었다. 특히, 민주화 과정에서 예술가들은 저항세력의 한 축을 담당했다. 하지만 서양 보헤미안과 달리 한국 보헤미안의 저항은 대중문화와 생활문화로 전이되지 않았다.


예외가 있다면 대중음악이다. 대중음악의 보헤미안은 정치운동을 넘어 인디음악이라 불리는 대안운동을 활발하게 추구했다. 권위주의에 저항하거나 새로운 정치 이념을 지지하는 것이 정치운동이라면, 주류문화에 저항하는 것이 대안운동이다. 대중음악 대안운동의 중심지는 1990년대 홍대다. 미국 펑크 음악의 영향을 받은 아티스트들이 라이브 클럽 중심으로 인디음악 씬을 개척했다.


신현준의 '가요, 케이팝, 그리고 그 너머'에 따르면, 펑크 음악 중심의 홍대의 1세대 인디음악 시대는 오래가지 않았다. IMF 위기와 2000년대가 오자 홍대 지역이 급속도로 상업화되고 홍대 클럽도 댄스 클럽 중심으로 재편된다. 임대료 상승과 경쟁 압력이라는 이중고를 겪은 라이브 클럽 밴드는 점진적으로 홍대 중심부에서 멀어진다. 일부는 '자립음악'과 같은 새로운 대안을 찾아 다른 지역으로 떠났다.


펑크, 얼터너티브 록 등 서구의 카운터 컬처를 수용한 1세대 인디 아티스트들은 한국의 라이프스타일 역사에서 중요하다. 한국에서 반문화를 씬 수준으로 구축한 유일한 그룹일지 모른다. 1970년대에도 히피 문화의 영향을 받은 아티스트들이 있었지만, 1990년대 인디 밴드만큼 집단적인 씬을 구축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1990년대 반문화 대중음악은 대중음악의 조류로서 부상했고, 그것으로 그친다. 반문화를 대중문화 전반이나 생활문화로 확산시키지 못한다. 한국에서 서구식 반문화의 생활화는 미래 세대의 일로 남는다.



홍대 인디음악의 기원과 성장


신현준은 ‘가요, 케이팝, 그리고 그 너머’에서 홍대 인디문화의 기원을 1990년대 라이브 클럽에서 찾는다. 1960-1980년대 한국의 보헤미안 아티스트들은 한국 록, 노래운동, 민중가요를 통해 권위주의 정부에 정치적으로 저항했지만, 주류문화에 공격적으로 저항한 것은 1990년대 인디뮤지션들이 처음이다.


1990년대 인디음악이 저항한 주류문화는 1980년대 형성됐다. 1980년대 말 주류 대중음악은 강남에서 기획/생산되고 여의도 방송가에 의해 매개된 음악이었다. 강남-강변 주류 음악에 대비되는 음악은 대학로-종로-광화문-신촌 축 중심으로 생산된 예술적, 실험적 음악이었다. 서울 구도심의 보헤미안 아티스트들은 포크, 록, 블루스, 재즈 등 다양한 유형의 음악을 실험했고, 주무대는 소극장, 라이브 바였다. “이들은 여의도를 중심축으로 매개되고 조절되는 주류 대중음악의 관심과 행태로부터 거리들 두었다는 점에서 언더그라운드라고 불렸다.”(신현준, p.190)


1980년대 언더그라운드 음악이 주류와 다른 유형의 음악을 실험한 것은 사실이지만, 주류에 대한 새로운 대안을 제시했다고 보기 어렵다. 신현준은 본격적인 대안운동은 1990년대 홍대에서 시작됐다고 설명한다. 1994년 펑크 클럽 드럭(Drug)이 개장으로 시작된 홍대 인디음악은 펑크와 라이브 클럽을 두 축으로 빠르게 성장했다.


심현준에 따르면, 1990년대 홍대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도 인디음악은 펑크 음악으로 시작했다. 1970년대 말 서구에서 유행한 펑크 음악이 한국에 1990년대 상륙한 것이다. 홍대 인디음악이 1970년대 펑크만 수용한 것은 아니다. 동시대 미국을 휩쓸던 얼터너티브 록/그런지 록도 홍대 인디음악의 중요한 소재였다.


하지만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홍대의 펑크 시대는 1997년 IMF 경제위기를 거치면서 쇠락한다. 경제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출현한 사회 전반의 신자유주의는 문화산업의 구조조정과 대형화를 유도, 인디음악의 입지를 어렵게 만들었다. 홍대 내부에서도 댄스 클럽이 라이프 클럽의 경쟁자로 등장, 2000년대 중반에 가면 라이브 클럽을 중심부에서 밀어낸다.



홍대 보헤미안은 왜 라이프스타일 세대가 되지 못했나


홍대의 펑크 세대(1994-2008)가 주변부화되는 과정에서 ‘라이프스타일’ 이슈가 등장한다. 2000년대 중반 홍대가 상업화되면서 임대료가 상승하고, 댄스 클럽과의 경쟁에서 우위를 상실한 인디 아티스트는 자신의 공간을 지키기 어렵게 된다. 일부 1세대 인티 아티스트들은 개발사와 건물주를 대상으로 투쟁했다. 흥미로운 점은 인디 아티스트가 지키려 한 것은 홍대 중심으로 형성된 자신의 공간이라는 사실이다. ‘인문학, 라이프스타일을 제안하다’가 제시한 보편적 가치 기반의 라이프스타일은 아니었다.


홍대 1세대 인디음악과 2000년대 골목문화의 관계도 새로운 시각이 필요하다. 신현준은 2000년대 골목문화를 상업화의 일부로 해석했지만, 한국적 맥락에서는 독립서점, 스페셜티 커피, 유기농. 크래프트로 시작된 골목문화는 주류 대량생산, 대량소비문화와 대비되는 대안문화다.


한국의 골목문화는 미국에서 2000년대 본격적으로 시작된 힙스터 문화와 맥을 같이 한다. 홍대 펑크가 홍대 힙스터와 연대했다면, 즉 공간 창업에 대해 보다 유연한 자세를 보였다면 홍대 문화는 어떻게 진화했을까? 역사는 가정을 허락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홍대가 한국의 브루클린이나 포틀랜드와 같은 힙스터 중심지가 됐을 가능성이 높다. 물론 펑크 세대만의 책임이 아닐 수 있다. 2000년대 홍대 힙스터가 '90년대의 꿈을 이어간다는' 포틀랜드 힙스터처럼 1990년대 홍대 저항문화를 계승하기 위해 노력했다고 보기 어렵다.


라이프스타일 역사 관점에서 홍대 펑크 세대의 부침은 한국 반문화의 가능성과 한계를 동시에 보여준다. 1990년대 홍대는 한국과 같이 부르주아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반문화 공간을 여는데 성공한다. 2000년대 홍대는 1990년대에 열린 반문화 공간을 지탱하는데 실패했다. 홍대가 반문화 대중음악을 반문화 라이프스타일 운동으로 전환할 기회를 놓친 것이다.


홍대에서 인디음악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다양한 유형의 인디음악이 홍대의 인디 전통을 유지하고 있다. 신현준은 이들을 '여성 친화적인' 싱어송라이터와 한국식 록밴드로 표현한다. 하지만 1990년대 펑크 세대만큼 반문화 요소가 강하지 않다. 홍대의 인디음악이 지속 가능한 대안음악으로서 발전하려면, 반문화와 라이프스타일로의 전환은 불가피하다. 아티스트, 팬, 생산자가 모두 자신의 음악을 단순히 문화활동으로 제안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음악이 대표하는 라이프스타일을 직접 일상에서 실천하고 연대와 혁신을 통해 새로운 경제적 기회를 창출하는 라이프스타일 비즈니스로 발전시켜야 한다. 인디음악만으로 인디음악의 안식처를 만들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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