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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골목길 경제학자 Aug 23. 2020

도서정가제는 지역발전정책이다

동네 중심으로 살고 여행하는 사람에게 동네서점은 단순히 책을 사는 매장이 아니다. 여유롭게 일상을 즐기고 이웃과 소통하는 문화공간이다. 그런데 평소 평화롭기만 한 동네서점에 위기의식이 팽배하다. 정부가 도서정가제 폐지를 검토하기 때문이다.


도서정가제는 책을 정가 이하로 판매하는 것을 제한하는 제도로서 독립서점의 생존에 필수 조건이다. 책 가격의 책정이 자유로워지면, 대형서점은 지금보다 더 많이 할인된 가격으로 책을 공급할 것이고 이에 대응할 여력이 없는 지역서점이 퇴출되는 것은 쉽게 예상할 수 있는 결과다.


실제로 독립서점이 현재 수준으로 늘어난 것도 도서정가제 덕분이다. 2014년 강화된 도서정가제가 독립서점의 창업을 촉발한 것이다. 2020년 5월에 실시된 독립서점 현황 조사에 따르면, 현재 전국적으로 총 583곳의 독립서점이 영업한다. 2015년 97곳에 비해 500%나 증가한 숫자다. 대형 서점과 다른 책을 판매하는 독립서점의 진입으로 출판시장에 유통되는 책의 종류도 다양해졌다.


도서정가제로 책문화 생태계가 다양해졌다면, 소비자 가격의 폭은 좁아졌다. 소비자 관점에선 책을 더 싼 가격에 구매할 수 있는 기회를 제한하는 도서정가제는 비효율적인 제도다. 정부가 소비자 후생 차원에서 도서정가제 완하를 고려하는 이유다.


문제는 소비자 후생의 정의다. 과연 현재와 같은 문화경제 시대에 소비자 편익을 가격만으로 정의할 수 있을까? 소비자가 독립서점에서 얻는 편익은 책에 담긴 콘텐츠에 한정되지 않는다. 책방 주인의 개성과 취향을 반영한 공간과 큐레이션, 서점 중심으로 형성된 동네의 책문화를 동시에 구매한다. 현대 리테일 이론은 소비자 후생의 요소로 가격과 더불어 다양성과 체험을 강조한다. 도서정가제 폐지로 독립서점이 사라지면 소비자는 독립서점이 창출하는 다양한 지역문화를 소비할 기회를 상실한다.


독립서점이 생산하는 지역문화를 가장 쉽게 목격할 수 있는 곳이 골목상권이다. 독립서점은 베이커리, 커피전문점, 게스트하우스와 더불어 골목상권이 갖춰야 할 필수 업종 4개 중 하나다. 독립서점 없이는 골목상권을 조성할 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골목상권에서 독립서점의 일차적 기능은 동네 여행 가이드다. 단적으로 동네에서 동네 지도를 자발적으로 만드는 업소가 어디인지를 질문하면 된다. 어느 동네에서나 그곳이 독립서점일 가능성이 높다. 독립서점은 또한 지역 콘텐츠를 모으는 것부터 시작해 독서모임, 북 토크, 책 만들기 수업 등 다양한 행사로 지역의 책문화를 활성화한다.

 

독립서점이 동네 자체를 바꾸기도 한다. 갤러리, 팝업 스토어, 동네 축제로 교토의 이치조지 지역을 재생한 작은 서점 게이분샤와 같은 곳이 한국에도 늘어나고 있다. 게스트하우스, 카페, 독립서점을 미술관 등 기존의 문화 자원과 연결해 통영 봉평동의 작은 골목을 여행자가 찾는 관광 명소로 만든 독립 출판사 '남해의 봄날'이 대표적인 사례다.

 

독립서점은 이제 골목상권을 넘어 리테일 산업 전체에 중요한 문화자원이 됐다. 라이프스타일을 이해하는 부동산 개발사라면 독립서점의 입점은 필수다. 네오밸류는 앨리웨이 광교에 책발전소, 오티디코포레이션이 성수연방에 아크앤북스, 에머슨퍼시픽이 아난티코브에 이터널저니를 유치했다.


신세계가 코엑스몰에서 별마당 도서관을 운영하는 것도 리테일에서 책문화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준다. 대기업뿐만이 아니다. 북카페를 운영하는 카페, 공예 도서를 전시하고 파는 공방, 요리책을 판매하는 식당 등 일반 상점도 책을 상점 정체성을 구현하는 콘텐츠로 활용한다.

 

서점을 라이프스타일 비즈니스로 개척한 기업은 일본 기업 츠타야다. 기존 서점이 잡지, 단행본, 문고본 등 유통업자 입장에서 편리하게 기계적으로 책을 진열해 판매했다면, 이 서점은 고객 입장에서 테마별로 모든 상품을 재분류해 제공한다. 예를 들어, 여행이라는 테마를 하나 선정하면 그와 관련된 모든 서적과 CD, DVD를 한자리에 모으고 거기에 덧붙여서 가전제품이나 기타 관련된 여러 상품까지 한꺼번에 제공해 원스톱으로 모든 준비를 마칠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츠타야는 고객이 관심 있는 테마와 관련된 라이프스타일 일체를 한꺼번에 해결해줄 수 있는 설루션을 제공하는 것을 서점 사업의 본질로 인식한다.

 

이처럼 독립서점은 그곳에서 판매되는 책 이상의 문화 공공재를 생산한다. 정부가 산출하는 소비자 후생에 책 가격과 함께 지역문화라는 외부효과가 추가돼야 한다. 정부가 소비자 편익을 제대로 산출하면, 독립서점을 긍정적 외부효과를 고려해 보조금을 지급하는 교육과 연구 기관과 같은 수준으로 대우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도서정가제는 출판산업의 문제만이 아니다. 지역 문화와 산업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해야 하는 지역발전의 문제다. 도서정가제가 독립서점의 생존에 필수적이고, 독립서점이 지역발전과 라이프스타일 산업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는 문화자산이라면 다른 지역발전 사업에 비해 비용이 크게 들지 않는 현행 도서정가제를 유지해야 한다.

 

현재 한국은 인구를 분산하고 지역경제와 국내여행 활성화하기 위해 지역의 삶의 질을 높여야 하는 상황이다. 지역에서 사는 청년에게는 골목상권과 독립서점이 일자리만큼 삶의 질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이다. 우리 사회가 도서정가제 논쟁을 새로운 지역발전 방식을 논의하는 기회로 삼기를 기대한다.


#도서정가제가_사라지면_동네책방도_사라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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