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비부머의 시대적 사명
한국 정치가 혼란기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기성 정치권은 현재 한국 사회의 기존 갈등 구조에서 서로 우위를 점하려는 제로섬 게임에 함몰해 있습니다. 더 큰 정치를 해야 하며, 더 큰 정치란 한국의 넥스트 어젠다를 선점하는 일입니다. 그 어젠다는 시대정신에서 찾아야 합니다. 일부 평론가는 탈이념 시대의 도래를 거론하며 거대 담론의 실종이 시대적 흐름이라고 주장하지만, 거대 담론 부재의 진짜 원인은 시대를 읽고 이를 쟁점화하는 이론가의 부재입니다.
건국세대를 이은 포스트-건국 세대는 건국세대 어젠다를 완성하는데 기여했지만, 한국의 다음 어젠다를 발굴하지는 못했습니다. 한국 현대사의 중심축은 산업화와 민주화이고, 이 축을 이끈 세대는 건국세대입니다. 그 세대가 한국이 자랑하는 산업화와 민주화를 성취했습니다. 건국세대를 이은 포스트-건국 세대는 건국세대 어젠다를 완성하는데 기여했지만, 한국의 다음 어젠다를 발굴하지는 못했습니다. 한국 정치가 분배적 진영 싸움에 빠지고 이를 극복하지 못하는 근본적인 이유입니다.
한국 정치 엘리트가 노력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민주화가 안정기에 진입한 2000년대 초반, 한국 사회는 민주화 이후 시대정신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2002년 대선에서 승리한 노무현 대통령의 86세대 이론가들이 주요 지식인들을 찾아 시대정신이 무엇인지를 질문했습니다. 그들이 어떤 결론을 내렸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무엇이었든 현재 기억되지 않는 것은 확실합니다.
민주화 이후 담론을 선점화한 세력은 오히려 보수 그룹입니다. 박세일 서울대 교수와 뉴라이트는 노무현 정부가 집권한 시기에 선진화를 국가 어젠다로 제시하고, 이를 통해 2007년 대선에서 승리한 이명박 정부의 이념적 토대를 제공했습니다.
하지만 선진화 역시 역사에서 기록될만한 시대정신으로 발전하지 못했습니다. 이명박 정부가 성공하지 못한 탓도 있고, 선진화 개념의 확장성이 제한적인 점도 작용했습니다. 보편적 가치가 아닌 한국의 상대적 위치, 즉 아직 한국이 선진국이 안됐다는 현실 인식에 기초한 한시적인 개념이었습니다.
그 후 한국 정치는 시대정신에 대한 고민을 중단합니다. 대통령으로 선출된 정치 지도자들이 거대 담론을 좋아하지 않았고, 베이비부머, 86세대, X세대 등 포스트-건국 세대가 산업화-민주화 다음 시대정신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돌이켜보면 탈물질주의가 시대정신이었고 아직도 시대정신입니다.
다만 여기서 말하는 베이비부머, 86세대, X세대의 특성은 각 세대의 평균적인 경향성을 나타낸 것임을 분명히 해둘 필요가 있습니다. 세대 내부에는 다양한 스펙트럼이 존재하기 마련이고, 개인의 성향에 따라 물질주의와 탈물질주의의 비중도 다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글에서의 논의는 각 세대의 주된 특성에 기반한 것임을 미리 밝혀둡니다.
시대정신의 구현은 이제 베이비부머 세대의 일이 됐습니다. 2022년 대선 이후 5년은 베이비부머(1955-1963년생)의 시간입니다. 베이비부머가 최초로 대통령이 될 확률이 거의 100%입니다. 국민의 힘 윤석열 후보가 1960년생, 민주당 이재명 후보가 1964년생입니다. 올봄 당선된 서울시장과 부산시장도 1960년생입니다. 이재명 후보가 64년생이지만 정서적으로나 경력적으로 학생 운동권 중심의 86세대보다는 베이비부머 세대에 가깝습니다.
2019년까지만 해도 베이비부머는 잊힌 세대였습니다. 그런데 2019년부터 격화된 86세대와 2-30대 갈등의 어부지리를 얻었습니다. 전혀 예상 못한 방식으로 베이비부머가 86세대를 뛰어넘어 정치 지도자로 올라선 거죠. 역사는 가정을 허용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조국 사태가 없었으면 양당이 86세대를 대선 후보로 선출하지 않았을까요?
역사의 중심에 진입한 베이비부머, 무엇을 해야 할까요? 새로운 것을 창조하거나 수명이 다한 산업화와 민주화 담론으로 회귀하지 말고, 시대가 요구하는 탈물질주의 사회로 가는 과정을 관리하는 관리자가 되어야 합니다. 베이비부머 세대에게는 아쉽지만 다음 역사를 본격적으로 열 세대는 MZ세대입니다. 탈물질주의란 효율, 조직, 경쟁, 성과를 강조하는 기성세대 문화와 대비되는, 개성, 다양성, 삶의 질, 사회적 윤리(공정, 상생)를 중시하는 가치관입니다. 탈물질주의는 이미 MZ세대 문화로 자리 잡았습니다.
베이비부머의 탈물질주의 지원은 자신의 부정에 가까운 용기 있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베이비부머가 자신의 정체성으로 자리 잡은 물질주의를 과감히 포기하고, 시대적 사명으로 떠오른 탈물질주의를 적극적으로 지원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한국 역사 진보를 위해서는 다른 선택지가 없습니다. 베이비부버 정치의 생존에도 필요합니다. 베이비부머 세대가 과거처럼 물질주의와 스카이캐슬을 고집하면 2-30대의 지속적인 지지를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역사에서 베이비부머 세대의 위상은 불안합니다. 건국세대의 과업을 지원하고 완성했다고 자위할 수 있으나, 독립적으로 뚜렷한 경제나 정치적인 성과를 보이지 못한 세대입니다. 베이비부머 세대에서 글로벌 기업을 창업한 사람으로는 미래에셋 박현주 회장이 유일하다고 합니다.
지금은 86세대(1963-1970년생)가 기득권의 상징으로 비판받지만, 86세대 뒤에서 2-30대 공격의 포화를 피하고 있는 베이비부머 세대도 안전하지 않습니다. 베이비부머에 대한 후배 세대의 시각은 결코 긍정적이지 않습니다.
한 언론인이 지적한 '베이비부머의 죄목'입니다:
욕망을 깔고 앉은 욕심쟁이 세대
사교육 열풍을 주도한 세대
부동산 시장 버블 조장
시민의식 부족으로 사회공공재 마련 소홀
한마디로 베이비부머를 아파트 세대, 사교육 세대로 맹공합니다.
한국 베이비부머 세대는 미국과 일본의 베이비부머로부터 배워야 합니다. 일본 서점 츠타야를 창업한 마스다 무네야키의 '라이프스타일을 팔다'를 읽으면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일본 리테일의 프리미어 에이지는 일본의 베이비부머인 단카이 세대(1947-1956년생)다. 일본 생활산업을 고도화한 세대가 단카이 세대라고 합니다. 청년층을 유치하기 위해 노력하는 한국과 달리 일본 유통업계는 구매력도 있고 멋도 아는 단카이 세대를 유치하는 것이 우선이랍니다.
무네야키는 생활산업의 고도화를 '생활의 패션화'로 표현합니다. 전세대와 달리 풍요로운 환경에서 자란 일본의 베이비부머가 성장에서 삶의 질로 넘어가는 탈산업화 과정에서 결정적인 기여를 한 거죠. 일본을 대표하는 라이프스타일 브랜드의 창업 연도를 보시죠:
1969년 Commes des Garson 창업
1971년 Issey Miyake 창업
1974년 Beams 창업
1979년 소니 워크맨 출시
1980년 무인양품 창업
1983년 츠타야 1호점 오픈
1984년 유니클로 1호점 오픈
미국의 베이비부머(1946-1964년생)는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현대 전 세계를 지배하는 미국 라이프스타일 산업을 개척한 세대입니다. 라이프스타일을 근본적으로 혁신한 히피 세대의 주축도 베이비부머입니다.
한국 베이비부머는 어떤가요? 베이비부머가 본격으로 사회에 진출한 1980년대와 1990년대 초에 일본과 미국의 베이비부머와 같이 탈산업화와 라이프스타일 혁신을 주도했나요? 굳이 답하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86세대는 어떨까요. 86세대의 공은 적지 않습니다. 86세대는 2004년 총선 이후 베이비붐 세대를 제키고 정치의 중심 세력으로 부상했습니다. 경제적으로도 인터넷, 화장품, 유통, 연예 산업 등 한국의 새로운 기간산업을 개척했습니다. 미국에 히피 자본주의가 있다면, 한국엔 386 자본주의가 있습니다.
그런데 왜 86세대가 존경받지 못할까요? 86세대가 주도한 1980년대 학생운동은 처음부터 정치운동이었고 지금도 86세대는 기본적으로 정치 세력으로 영향을 행사할 뿐, 미국의 히피 세대처럼 삶의 질, 탈물질주의, 대안적인 삶을 제시하는 문화 세력으로 발전하지 못했습니다.
스티브 잡스가 2005년 스탠퍼드 대학 졸업식 연설에서 '1960년대 구글'로 소개한 '전지구 목록(The Whole Earth Catalog)'을 발행한 스튜어트 브랜드(Stewart Brand)가 이런 말을 합니다. "1960년대 뉴레프트는 우리에게 풀뿌리 정치권력의 행사를 요구했지만, 우리는 그 대신 풀뿌리 직접 권력(Direct Power)의 행사를 밀었습니다. 즉, 생활의 도구와 스킬입니다." 자급자족, 생태계, 홀리즘, 대안교육, DIY로 대표되는 생활 혁신을 실천할 수 있는 상품을 소개한 카탈로그가 전지구 목록입니다. 스티브 잡스의 Stay Hungry, Stay Foolish도 전지구 목록 커버 카피를 인용한 것입니다.
‘히피와 반문화’의 저자 크리스티안 생-장-폴랭도 60년대 반문화를 빈곤, 불평등, 인종차별, 베트남 전쟁, 정치체제를 거부한 정치운동(뉴레프트)과 미국 중산층의 생활양식을 겨냥한 히피를 구분합니다. 둘 다 "산업사회의 문화로 요약되는 주류적 사고방식과 상반되는 정치적 견해, 생활양식, 그리고 철학적 개념"을 추구했으나 뉴레프트는 정치적 표현, 히피는 사적 표현을 지향한 거죠.
제가 위에서 설명했지만 히피 세대가 추구한 '일상에서의 문화혁명'은 그 후 미국과 선진국 사회에 지대한 영향을 미칩니다. 뉴레프트는 금방 사라졌지만 (최근 다시 돌아옵니다) 히피 세대의 라이프스타일 혁신은 현대 모든 선진국의 생활양식을 지배합니다. 유기농, 스페셜티 커피, 명상, 미니멀리즘, DIY, 반려견, 자급자족 공동체 등 거의 모든 생활 트렌드의 기원을 히피 세대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86세대는 문화적으로 그전 세대인 베이비부머가 쌓아 올린 물질주의와 스카이캐슬을 따라갑니다. 대안 문화에 대해서는 적대적이었습니다. 1970년대 자생적으로 형성된 한국의 히피문화를 민중문화로 제압합니다.
베이비부머 세대와 86세대가 라이프스타일 혁신의 기회를 놓쳤다면, 그 일은 누구의 몫이 됐을까요? 트렌드 전문가 김용섭은 사운즈한남, 피크닉 등 서울에서 밀레니얼이 열광하는 공간을 건축한 '영 포티'를 주목합니다.
X세대(1970년대생)로 알려진 영 포티는 K-Pop, 골목길 등 한국의 문화산업이 태동한 1990년대 초반에 20대와 10대를 보낸 세대입니다. 서태지, 오렌지족, 클럽문화가 X세대를 대표하는 문화 아이콘입니다. K-Pop 산업에 대한 X세대의 기여는 두드러집니다. 1952년생 이수만이 1995년 SM을, 1972년생 박진영이 1996년 JYP를, 1969년생 양현석이 1998년 YG를, 1972년생 방시혁이 2005년 빅히트를 창업했습니다.
X세대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도 나오기 시작합니다. 톱클래스 편집장 김민희는 남다른 밈(meme·문화유전자)의 세대, 사회학자 김호기는 한국 최초의 개인주의 세대, 경영학자 이은형은 윗세대와 아랫세대를 모두 이해하는 포용적 세대로 평가합니다.
X세대가 한국의 라이프스타일을 획기적으로 혁신한 세대로 기록될지는 아직 미지수입니다. 라이프스타일 소비를 주도한 것은 확실하지만, 광범위한 창업을 통해 세계적으로 경쟁력 있는 라이프스타일 산업을 건설했다고 평가하기는 어렵습니다. 2021년 정치 지형에서 한쪽 진영에 편중되어 있는 X세대가 한국 사회의 균형추 역할을 하기가 어렵습니다. 무엇보다, X세대가 한국의 라이프스타일 세대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선진국의 보편적인 가치로 자리 잡은 탈물질주의를 더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합니다.
현재 한국 상황에서 한 세대가 라이프스타일 혁신을 주도하기를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라이프스타일 감수성이 높은 MZ세대가 지도층으로 본격적으로 진입하기 전까지는 한국의 모든 세대가 삶의 질을 높이는 라이프스타일 혁신에 동참해야 합니다. 부르주아 라이프스타일에 보다 많은 보헤미안, 히피, 보보, 힙스터, 노마드를 더해 다양한 라이프스타일이 서로 경쟁하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 한국이 라이프스타일 강국이 되는 길입니다.
그렇다면 베이비부머의 역할이 명확합니다. 성장기 라이프스타일 혁신이란 시대적 사명을 저버리고 스카이캐슬을 건설했다면, 성숙기를 맞은 지금은 기득권 포기와 세대 통합을 통해 라이프스타일 혁신을 후원하는 세력으로 승화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개방성과 포용력입니다. 은퇴를 앞둔 세대로서 새로운 라이프스타일을 개척하기보다는, 아래 세대가 원하는 대안적 라이프스타일을 수용하고 이들이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줘야 합니다.
구체적으로, 주력산업, 첨단산업은 대기업이 알아서 잘할 테니 규제 완화, 기업 환경 개선을 조용히 추진하고요. 대외적으로, 그러니까 비전과 정부 역량은 청년의 일자리와 삶의 질에 집중해야 합니다. 미래 일자리의 핵심은 개성과 다양성 가치를 실현할 수 있는 자유롭고 독립적인 일입니다. 프리랜서, 창작자, 1인 기업, 디지털 노마드, 로컬 브랜드가 미래 세대에 맞는 일자리입니다.
삶의 질도 아파트 단지, 자동차 도시, 광역 철도, 대형 상업시설 등 대형 건설 사업이 아닙니다. 여유 있게 일상을 즐기고 이웃과 소통할 수 있는 그런 소소한 일상 환경을 만들어야 합니다. 1인 주택, 친환경, 보행 환경, 반려견 시설, 공원, 독립서점, 지속 가능한 상권 등이 청년 삶의 질에 중요합니다.
라이프스타일, 즉 삶의 질 중심으로 한국 사회를 재편하는 일이 마지막 기회를 얻은 베이비부머 리더의 시대적 사명입니다.
Photo by Rahul Bhosale on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