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에이터 경제의 모든 공간은 창조성을 위한 공간이다. 도시 설계자는 집, 오피스, 상업공간, 도시 등 모든 영역에서 구성원의 창조성을 극대화하는 공간을 디자인해야 한다.
인간이 인위적으로 개입하지 않은 자연 공간도 창조성 기준에서 필요성을 평가할 수 있다. 일정 시간 주기적으로 자연과 생활하는 것이 크리에이터의 창조성을 제고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창조성 관점에서 고민되는 공간이 오피스다. 수익 극대화를 목적으로 하는 기업에게 구성원의 창의성이 얼마나 중요한 우선순위일까? 아무리 창의성 중시하는 기업이라도 효율성과 창의성이 충돌한다면 전자를 선택할 것 같다.
실제 작업 공간의 역사는 창의 공간에 대한 기업의지를 의심하게 한다. 산업사회에서부터 하이테크 정보 사회까지 기업이 구축한 작업 공간(사무공간, 공장, 복지시설 등 기업이 직원을 위해 만든 공간을 총칭)은 창조인재가 선호하는 공간이라고 보기 어렵다. 한마디로, 창조인재가 좋아하고 머물고 싶은 공간이 아닌 것이다.
한편으로는 당연한 결과다. 어떻게 고용인이 고용주가 만든 공간을 좋아할 수 있을까? 고용주의 공간에는 불가피하게 통제 요소가 들어가 있다. 또 다른 이유는 일에 대한 노동자의 태도다. 일을 사랑하기를 원하는 고용주의 바람과 달리 많은 노동자가 일보다는 여가에서 만족과 행복을 찾는다. 고용주가 아무리 노동자를 배려한 좋은 공간을 만들어도 고용인에게는 그저 일해야 하는 공간일 뿐이다.
하지만 노동자도 일을 하고 싶기 때문에 일에 대한 부담감으로 회사 공간 기피를 설명하기 어렵다. 어차피 일을 해야 한다면 더 좋은 공간이 있고 덜 좋은 공간이 있다. 자기표현을 중시하는 창조인재는 본능적으로 창조성을 자극하는 공간을 선호한다. 그럼에도 기업이 창조적인 공간을 공급하지 못한다면 그 이유는 간단한다. 기업이 진심으로 창의적인 공간을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산업혁명이 시작할 때부터 기업은 공간을 통해 노동자의 생산성을 극대화하려고 노력했다. 공간 디자인은 단순히 공장과 유동 라인(Assembly Line)의 설계의 문제가 아니었다. 19세기부터 많은 대기업이 생산지에 생산, 복지, 주거를 통합한 새로운 기업 도시를 건설했다.
19세기 말 노동자가 최소한의 삶의 질을 향유할 수 있는 생활환경의 건설은 자본주의 생존의 문제였다. 영국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가 '악마의 맷돌(Satanic Mill)'로 불렸던 산업혁명 시기의 공장으로는 사회주의 혁명을 막기 어려웠다. "(사회주의) 혁명이냐, (아파트) 건축이냐?" 20세기 초 도시건축의 거장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가 자본주의 사회에 요구한 선택이었다. 열악한 환경에서 신음하는 노동자를 위한 아파트 도시를 건설해야 자본주의를 구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신념이었다.
한국 대기업도 포항, 울산, 거제, 평택 등에서 많은 산업도시를 건설했고, 일부는 다른 나라에 모범이 될 수 있는 수준의 생활환경과 복지 시설을 갖추었다. 그러나 본사를 포함 산업도시의 기업 공간을 창의성을 유발하는 공간으로 인식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창조경제 대기업은 다를까?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제조업 대기업과 달리 공간의 창의성을 강조한다. 건축가 천의영은 '그리드를 파괴하라'에서 애플의 스페이스십, 페이스북의 오픈 공간, 구글의 투명 돔, 아마존의 '정글' 룸 등 글로벌 기업들의 새로운 사무 공간을 기존 그리드 구조의 공간을 파괴해 혁신을 유도하기 위한 시도로 설명한다.
교육 전문가 이완 매킨토시는 혁신이 가능한 공간 유형을 개인이 조용한 업무를 보는 사적 공간, 소규모 팀들이 협력하는 집단 공간, 영상이나 작품 등의 결과물을 공유하는 전시 공간, 아이디어를 직접 실험해보는 수행 공간,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사용하는 공공재 차원의 참여 공간, 정보를 얻고 교환하는 데이터 공간, 주변 환경과 활동을 지켜볼 수 있는 관찰 공간 등 7가지로 분류하고 다양한 공간의 융합을 강조한다.
공간 융합, 특히 일과 여가의 통합은 창조경제 기업이 우선적으로 추진하는 공간 융합이다. 전 세계 곳곳에서 전통적인 시장을 해체하면서 그들이 가진 일터들의 형식과 공간을 무너뜨리고 지도에 없던 전대미문의 공간 분화 실험을 통해 일터이자 놀이터를 만들어내고 있다. 그 공간은 놀이터이기도 하고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창조 공간이기도 하다.
‘일하면서 즐기자(Work and Play)’는 세계 최대의 인터넷 기업 구글의 철학을 대표하는 구호다. 구글은 '여유롭고 재미있게 일할 수 있는' 환경이 혁신과 창조를 촉진한다는 생각으로 업무 공간에 카페, 커피 바, 피트니스 센터, 테라스 휴식 공간 등을 설치한 것으로 유명하다. 최근 국내에서도 구글의 업무 공간 디자인이 유행처럼 확산되고 있다. ‘저녁이 있는 삶’을 지향하는 사람들은 여가와 여유를 즐기기를 권장하는 구글 문화에 열광한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일하면서 즐기자’와 '저녁이 있는 삶'은 조금 다른 맥락의 이야기다. ‘일’과 ‘즐기기’ 두 단어 중 앞에 있는 단어는 결국 일이다. ‘일하면서 즐기자’라는 구호는 '여가 시간을 늘리자는’ 의미라기보다는 ‘항상 일을 하고 일하는 데서 즐거움을 찾자'는 주장에 가깝다.
구글이 최근 건설한 신사옥에는 호텔까지 만들었다고 한다. 밤샘 일하는 직원을 위한 숙박 시설이냐는 매일경제 신현규 기자의 질문에 구글 관계자는 외부 파트너를 위한 공간이라고 답했지만, 주변에 호텔이 많이 있는데 굳이 사내에 호텔까지 필요한지 질문하게 된다. 오히려 '일하면서 즐기자' 철학을 밤 시간까지 연장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구글 같은 창조 기업이 '일을 통한 창조성 생산'을 주창하는 것은 당연하다. 창조는 절대적으로 많은 시간을 요구하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창의적 아이디어는 오랜 몰입, 사색, 고민, 교류와 대화, 현장 경험을 거쳐야만 얻을 수 있는 결과물이므로 일과 놀이를 동일시하지 않고서는 얻기 힘들다. 말콤 글래드웰이 저서 '아웃라이어'에서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되려면 최소 1만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창조인재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말이다.
창조인재에게 재미와 놀이는 결국 일의 일부분이다. 생각이 막힐 때 물리적인 환경을 바꾸거나 다른 시각을 가진 사람과 협업하는 등 문제에 대해 새롭게 접근하는 ‘차원 이동’ 많은 전문가들이 일의 능률을 높이기 위한 방법으로 권고하는 사항이다. 창조기업에게 재미와 놀이 공간은 차원 이동 수단 중 하나다.
창조적인 노동자에게 단순 노동에서 격리될 수 있는 경제적, 시간적 여유가 필요하다는 생각은 사실 어제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2500년 전 그리스 도시의 시민은 생계를 위해 노동을 하지 않아도 되는 자산가였다. 조선의 선비도 가정 살림을 돌보기는 했지만 생계를 위해 육체 활동을 한 계급은 아니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옛사람들은 육체적 노동에서 자유로운 사람들만이 사회적으로 중요한 이슈를 논의하고 결정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여겼다.
과연 구글이 대기업의 오랜 숙제였던 직원이 선호하는 창조공간 설계 문제를 해결한 것일까? 사옥에 자유롭고 독립적인 공간을 제공하면 창조인재가 창의력을 맘껏 발휘할까?
대기업에게는 불행하게도 구글이 구축한 창조 공간 컨센서스는 팬데믹의 벽을 넘지 못했다. 팬데믹을 거치면서 글로벌 대기업의 창조인재가 회사 공간 자체를 거부하기 시작한 것이다. 팬데믹 경험이 창조 공간에 대한 기존 공식을 무너뜨린 것이다.
글로벌 대기업은 팬데믹에 대응하기 위해 대규모 리모트 워킹 프로그램을 실시하고 도심 사무 공간은 비워 뒀다. 회사 사무실을 떠난 대기업 직원들은 집, 카페 아니면 회사가 마련해준 거점 공간에서 일했다. 리모트 워킹을 실행한 지 2년이 지난 지금, 대기업들은 새로운 공간 기준을 찾아야 하는 상황에 직면한다. 재택근무에 익숙해진 직원들이 회사 사무실 복귀를 거부하기 때문이다.
현재 상황에서 재택근무와 사무실 근무 중 어느 쪽이 더 생산적인지에 대한 연구가 재택근무 대세를 바꾸기 어렵다. 재택근무가 하나의 문화, 하나의 권리가 되어 버린 것이다. 창의인재를 붙들어야 하는 기업은 울며 겨자 먹기로 새로운 환경에 대응할 수밖에 없다. 지금은 주로 재택, 사무실, 하이브리드 등 근무 장소에 대한 논쟁 하지만, 어떤 근무 장소를 선택해도 그에 맞는 공간 디자인에 대한 논의로 넘어간다.
새로운 공간 기준을 찾는 대기업이 기억해야 할 사실은 라이프스타일 변화다. 재택과 하이브리드 근무를 선택한 직원은 실질적인 디지털 노마드다. 디지털 노마드가 원하는 집과 작업 환경은 브런치 에세이 '디지털 노마드의 집'에서 다룬 주제다. 기업이 고민해야 하는 문제는 개인 작업과 거주 공간에 대한 가이드라인과 지원이다.
더 큰 공간적 문제는 디지털 노마드 직원을 위한 공공 공간이다. 비정기적으로 본사를 방문하는 직원을 위해 어떤 공간을 마련해야 하는가? 각 거점에 건설한 거점 사무실은 본사와 어떻게 다르게 설계되어야 하는가?
팬데믹 경제의 오피스 공간 디자인은 막 시작되는 현상이어서 글로벌 기준으로 소개할 사례가 어디인지 아직 확실하지 않다. 그럼에도 하나 분명한 것은 분산 구조의 불가피성이다. 통합 구조로 효율성을 추구하는 방식을 포기해야 하는 지금, 아마도 기업 역사 최초로 분산 구조가 창출하는 창조성 효과를 극대화하는 방법을 찾아야 하는 시점이다. 이제 진정으로 창의적인 공간을 원하는 기업이 나올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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