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환경의 개선에서, 생활권 도시 구축으로의 전환
2020.5.25
코로나 위기 발생 이후 생활권과 동네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원거리 이동과 통근이 어려워지면서 생활권이 우리가 사는 동네에 좁혀졌기 때문이다. 이 추세가 계속되면 대도시는 다수의 생활권 도시로 분산하고, 중소도시는 원도심을 생활권 도시로 활성화하는 것이 불가피하다. 생활권 도시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도시재생 사업이 중심적 역할을 할 것으로 예상된다. 대부분 원도심 지역에 위치한 도시재생 지역이 생활권 도시의 중심으로 부상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생활권 도시로 전환하면서 가장 많이 고민해야 할 문제가 일자리와 고용이다. 일, 주거, 놀이를 한 곳에서 해결할 수 있는 진정한 의미의 생활권 도시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도시재생을 통해 일자리를 창출하고 기업을 유치해야 한다. 도시재생을 이렇게 생활권 경제 구축을 위한 동력으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도시재생에 대한 기본 철학과 모델을 점검해야 한다.
도시재생의 부상
2010년대 이후 도시재생이 활성화된 배경에는 전통적인 도시발전에 대한 재평가가 있었다. 전통적인 도시발전 방식은 대자본 유치였다. 1960년대 산업화가 시작된 후 전국의 모든 지자체는 대자본 유치를 통해 지역 발전을 추진했다. 산업 분야의 대자본은 대기업 사업장, 국가산업공단, 외국인 투자기업에 투입되는 대기업과 금융 자본이고, 도시 분야의 대자본은 신도시와 산업간접자본 개발에 필요한 대기업과 금융 자본이다.
대자본 주도 지역발전 시대의 중앙과 지역의 관계는 단순했다. 지역은 인재를 중앙과 국가산업에 보냈고, 중앙은 그 대신 대기업 사업장과 국가산단을 지역에 보냈다. 인재와 공장의 교환이 지역과 중앙의 암시적 계약이었다.
그러나 2010년 이후 한국의 주력산업이 불황에 빠지면서 전통적인 중앙-지역 관계는 무너지기 시작했다. 국제 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해 대기업은 해외 투자를 늘려야 했고, 지역에 새 공장을 보내기는커녕 기존 공장도 해외로 이전했다.
공동화 위기에 처한 지역 도시는 이제 국가산업에 독립된 지역산업을 개발하고, 국가산업과 지역 인구의 성장을 전제로 한 신도시 개발을 포기해야 할 상황이다. 중앙과 국가산업에 의존하는, 즉 대자본 주도 지역발전 모델을 더 이상 추진하기 어렵게 된 것이다.
도시환경이 변하자 2010년 대 초반 서울을 필두로 정부가 도시정책 기조를 신도시와 재개발에서 도시재생으로 전환했다. 2017년 집권한 문재인 정부는 기존 도시재생 정책을 대폭 확대, 의욕적인 5년간 50조 규모의 도시재생 뉴딜 사업을 발표한다.
주민 주도 도시재생
신도시 개발과 도시 재개발이 대표하는 대자본 주도 도시개발을 대신해 문재인 정부가 선택한 도시개발 모델은 주민 주도 도시재생이다. 도시재생 거버넌스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당연히 지역 주민이다. 지역과 도시를 '망친' 외부 자본 대신 지역과 도시를 구원할 수 있는 능력자이자, 누구도 도전할 수 없는 지역 대표성을 가진 사람이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누가 주민이 선택하고 주도하는 사업을 반대할 수 있을까?
그런데 현실에서 주민 주도 도시재생은 큰 장벽에 부딪힌다. 가장 큰 문제가 지역 주민의 정의다. 도시재생 관련해 크게 세 가지 유형의 주민 성향을 예상할 수 있다. 첫 번째 유형이 세금 납부로 지역 주민의 의무를 다했다고 생각하는 최소주의 주민이다. 아마도 주민의 절대다수는 최소 참여 주민일 것이다. 두 번째 유형이 지역에 관심 있고 학교, 종교단체, 상권 등 지역사회의 중심지에 참여하는 시민이다. 한국 사회에서 지역사회 참여형 주민조차도 소수에 불과하다. 마지막 유형이 도시재생 사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소수의 주민과 사업자다.
전국의 도시재생지원센터는 주민을 “도시재생사업지역 내에 주민등록을 두고 거주하는 주민과, 주민등록을 두고 있지 아니하나 실제로 생업과 학업 등을 이유로 지역에 생활적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는 사람(해당 동의 직장인, 상공인, 건물주, 세입자, 학생 등)”으로 정의한다. 주민의 범위를 주민등록 거주자뿐 아니라 지역에서 활동하는 이해당사자를 포함시킨 것은 고무적이다. 지역의 범위를 도시재생사업지역에 한정하지 않고 해당 지역이 속한 행정단위로 확대한 것도 개방성에 대한 고민을 반영한다.
하지만 지역 주민을 개방적으로 정의한다고 해서 도시재생 거버넌스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대다수 주민등록 거주자는 지역에서 활동하는 비거주자를 주민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이념적 주민 인식도 개입된다. 일부 주민, 특히 도시재생에 적극적인 활동가들은 건물주, 프랜차이즈 상공인 등 사회적 강자로 여기는 주민을 도시재생의 파트너로 포용하지 않는다.
더 큰 문제는 주민의 참여 수준이다. 개인주의가 팽배한 현대 사회에서 주민 중 누가 도시재생 계획을 수립하고 사업시행 과정을 관리하는 주민협의체에 적극적으로 참여할까? 일반 주민에게 더 기대하기 어려운 것은 도시재생 사업을 수행하기 위해 조직하는 사업협의체(협동조합 등)에 참여하는 일이다. 참여한다고 해서 무조건 반가워할 일도 아니다. 기득권을 보호하기 위해 참여하는 주민들이 재원을 독점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전통시장 지원 재원이 경쟁력 있는 신규 사업자 유치보다는 주차장 공사, 시장 축제 등 기존 상인의 이익을 위해 쓰이는 이치와 동일하다.
우리가 도시재생의 주체를 고민해야 하는 이유는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필요한 새로운 도시발전 모델을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대자본 주도 도시개발은 더 이상 대안이 아니고, 주민 주도 도시재생도 한계는 존재한다. 대자본 주도 도시개발이 난개발, 환경파괴, 미분양 아파트, 신도시 상권 공동화를 초래한다면, 주민 주도 도시재생은 주민 이기주의, '주민 없는' 주민 공동체, 성과 부진의 위험을 내포한다.
주민 주도 도시재생의 한계를 극복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하나의 방법은 사업 성격에 맞게 주민을 정의하는 것이다. 혁신적인 민관 협력이 필요하고 기존 지역 행정이 커버하지 못하는 분야인 상권 재생의 경우, 재생 주체를 주민에서 지역 사업자(로컬 크리에이터)로 전환해야 한다. 지역 창업과 지역 일자리 창출을 조건으로 출신 지역과 관계없이 인재, 기업, 기관을 유치하고 상권 등 이들과 기존 사업자가 경쟁하는 생태계를 지원하고 관리하는 것이 효과적인 상권 재생 방식이다.
공공임대 주택 공급, 낙후 주택 개보수, 도로 정비, 생활 인프라 확충 등 공익성이 강한 사업은 현재와 같이 주민 중심의 도시재생이 바람직하다. 주민 주도 모델에서 사업자 주도 모델로 전환되면 도시재생과 고용창출에 기여할 수 있는 외부 인재가 더 많이 참여할 것이다. 이 과정에서 기존 주민과 외부에서 유입되는 주민의 통합이 새로운 과제로 등장한다. 기존 주민의 역량을 키우고 신규 주민 역량과 결합하는 일이 도시재생의 성패를 결정할 것이다.
주민 책임 문제, 중간지원조직인 도시재생센터의 역할에 대한 논의도 필요하다. 주민 주도 모델이 성공하려면 주민의 권한과 더불어 책임이 중요하다. 주민에게 권한을 주면, 이에 따른 책임을 추궁해야 하는데 아직 구체적인 책임 추궁 메커니즘이 도입되지 못한 상황이다.
도시재생지원센터도 역량 있는 사업자를 유치하고 지원하는 일을 넘어 도시재생에 필요한 자원과 자본을 결집하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 지역자본은 경제적 자본뿐 아니라, 인적자본, 문화자본, 혁신자본을 포함한다. 지역자본 관점에서 보면, 정부가 강조하는 주민도 지역자본의 하나인 인적자본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골목상권이 한국형 도시재생 모델
도시재생의 범위와 중점 분야도 재론해야 한다. 도시재생을 생활권 사업으로 확대한다면 상권 활성화를 중심 사업으로 추진해야 한다. 상권이 도시재생에 중요한 이유는 자명하다. 아무리 작은 지역이라도 최소한의 상업 시설이 있어야 생활권으로 기능할 수 있다. 생활권 조성은 주민들이 일상적으로 찾는 거점인 상업시설의 활력을 회복해야 달성할 수 있다.
상권 활성화의 파급효과도 중요하다. 도시재생에 대한 많은 연구가 상권 활성화가 주거 활성화를 촉진하지만 그 반대 효과는 크지 않음을 강조한다. 상권과 주거 지역 활성화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전자를 선택해야 함을 시사한다. 젊은 층이 스타벅스 매장이 있는 지역을 의미하는 '스세권'을 주거지로 선호한다는 사실이 상업시설의 중요성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무엇보다 도시재생의 지속 가능성 요건이 상권 활성화를 불가피하게 만든다. 시장에서 자생할 수 있는, 즉 지속 가능한 사업은 구조적으로 상업시설 개발에서 나올 확률이 높다. 상업시설을 토대로 문화산업, 창조산업을 유치할 수 있는 점도 상권 기반 도시재생의 지속 가능성을 높인다.
그렇다면 자생적인 골목상권은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 <골목길 자본론>은 골목상권의 성공 조건으로 문화 인프라(Culture), 임대료(Rent), 기업가 정신(Entrepreneurship), 접근성(Access), 도시 디자인(Design), 정체성(Identity) 등 여섯 가지 조건을 꼽고 이를 ‘C-READI’ 모델이라고 칭한다. C-READI는 문화가 준비된 곳을 뜻하며 문화 자원과 이를 통해 형성된 정체성이 골목상권의 핵심 경쟁력인 것을 보여주는 분석 모델이다.
문제는 정부의 역할이다. 성공한 상권 대부분이 시장에서 자생적으로 발전했기 때문에 정부 개입으로 상권을 활성화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정부가 꼭 해야 할 일이 있다면 낙후 상권에 투입될 로컬 창업가를 육성하는 사업이다. 일본의 경우, 장인학교나 현장의 장인 밑에서 오랫동안 도제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자신의 가게를 창업한다. 한국도 자영업을 꿈꾸는 젊은이들이 창업 전 몇 년간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장인대학’ 프로그램이 필요하다. 단기적으로는 문화 시설과 접근성 개선을 위한 투자가 효과적이다. 특히 대중교통을 확대해 외부 접근성을, 골목상권 내의 보행로를 확충해 내부 접근성을 제고하는 것이 정부의 적합한 역할이다.
현실적으로 골목상권 활성화의 가장 큰 장애물은 젠트리피케이션 논쟁이다. 실효성 있는 젠트리피케이션 방지 방안이 마땅치 않기 때문에 정부가 적극적으로 골목상권에 투자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재 상황이다. 그러나 젠트리피케이션 우려의 상당 부분은 골목상권 용어에 대한 오해에 기인한다. 골목상권은 현재 영세 상인이 활동하는 근린상권, 프랜차이즈와 독립 상점이 경쟁하는 먹자골목, 그리고 젊은 층이 선호하는 ‘여행 가는’ 골목상권 등 다양한 의미로 사용된다. 젠트리피케이션에 적절하게 대응하기 위해서는 골목상권을 지역발전 수준에 따라 근린상권, 문화지구, 여행상권, 창조산업단지로 재분류할 필요가 있다.
근린상권은 주민에게 재화와 서비스를 제공하는 동네상권이다. 문화지구에는 상업시설과 더불어 문화예술 시설이 집중돼 있고 젊은 예술가들이 모여 활동한다. 여행상권은 주민뿐만 아니라 외부 관광객을 유치하는 상업지역을 말한다. 2000년대 중반 뜬 골목상권이 여행상권 범주에 속한다. 홍대, 성수동, 이태원 등 골목상권 중 골목상권을 기반으로 창조산업을 유치한 상권이 창조산업단지다.
젠트리피케이션은 도시가 성장하고 소비자 선호가 변함에 따라 근린상권과 문화지구가 여행상권과 창조산업단지로 '발전'할 때 발생한다. 따라서 젠트리피케이션 방지를 위한 노력은 생활 인프라가 중요한 근린상권과 상업화가 문화 정체성을 훼손할 수 있는 문화지구를 중심으로 세심하게 다뤄지는 것이 바람직하다. 젠트리피케이션 발생 가능성에 따른 차별적인 정책도 가능하다. 예컨대, 위험도가 높은 지역에서는 장인대학 설립, 민관협력체계 구축, 지역관리회사 운영 등 상권 공동체 구축에, 낮은 지역에서는 골목상권 기획사, 대기업, 부동산 개발사 등 외부 투자 유치에 우선순위를 둘 수 있다.
전통적으로 주민들이 일상에서 자주 찾는 학교, 상가, 종교단체가 지역사회의 구심점으로 기능했다. 도시재생 사업으로 학교와 종교단체의 역할을 강화하기 어렵다면, 상권을 활용하는 것이 순리다. 젠트리피케이션이 유발한 반자본정서가 반상권정서, 반상인정서로 확산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요약하면,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생활권 도시는 도시재생 모델의 전환을 요구한다. 현재의 주민 주도의 생활환경의 개선에서 일, 주거, 놀이가 한 지역에서 가능한 생활권 도시의 구축으로 전환해야 한다. 생활권 도시의 건설이 목표라면 도시재생 주체와 범위의 재조정이 중요하다. 도시재생의 주체를 주민에서 사업자로, 범위를 낙후지에서 생활권으로 확대해야 한다.
출처: 서울특별시도시재생지원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