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인가 로컬이란 단어가 일상어가 됐습니다. 필자의 기억으론 시작은 2000년대인 것 같습니다. 해외여행을 많이 하면서 현지 문화를 즐기게 됐고 맛집이 대표하는 현지 문화를 로컬이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2010년대 로컬이 한국에 들어오는데 이 과정에서 제주, 제주 이민이 큰 역할을 합니다. 특히, 2013년 가수 이효리 씨가 제주로 이주하면서 제주 이민이 급격히 늘고 제주 인구도 증가하기 시작합니다.
이 무렵 전국 각지에서 어반플레이, 로컬스티치, 재주상회, 컬처네트워크, 도시여행자, 론드리프로젝트, 브루웍스, 빌드, (주)지방 등 다양한 플레이어들이 로컬 창업을 시작합니다. 대부분 특별히 다른 유형의 비즈니스를 창업을 한다고 생각하기보다는 자신이 사는 곳에 재미있는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강했습니다. 로컬 문화를 콘텐츠로 인식해 이를 공개적으로 사업화한 기업은 어반플레이, 로컬스티치 등 홍대 지역 기업입니다.
제가 아는 한 어반플레이가 로컬 크리에이터라는 이름을 처음으로 사용했습니다. 로컬 콘텐츠, 동네 매니지먼트, 동네 매거진 등 현재 로컬 분야에서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단어의 기원도 어반플레이입니다.
이제 전국 곳곳에서 로컬 크리에이터와 로컬 크리에이터 기업이 활동합니다. 로컬 크리에이터는 간단하게 로컬 문화를 창조하는 크리에이터로 정의할 수 있습니다. 정부는 로컬 자원을 연결해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지역 기반 기업으로 정의하고요.
비수도권 소도시에서 시작된 로컬 현상이 코로나를 거치면서 전국적으로 확산됩니다. 장거리 이동이 어려워지고 동네 중심으로 살다 보니, 로컬의 의미도 지방이 아닌 자신이 사는 동네가 됩니다.
저는 로컬을 독립적으로 문화를 창출하는 최소 생활권 단위로 정의합니다. 어디든지 다른 곳에 찾을 수 없는 문화를 만드는 지역은 규모와 관계없이 로컬입니다.
로컬이 앞으로 계속 성장한다고 믿는 이유는 많습니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라이프스타일의 변화입니다. 자유롭고 독립적으로 살고 싶은 사람이 급격히 늘고 있고 그런 사람에게 자신이 살고 싶은 곳에서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만큼 매력적인 일이 없습니다.
수요도 늘어납니다. MZ세대 중심으로 앞으로 많은 사람이 다양한 라이프스타일, 다양한 라이프스타일 콘텐츠를 요구할 것입니다. 지금도 사람들은 어디 가든지 그 지역 로컬을 찾습니다. 한국 소도시, 동네는 이제 온라인이 대체할 수 없는 로컬 콘텐츠 없이 여행객을 유치하기 어렵습니다. 여행자뿐이 아닙니다. 여행자를 유치하는 콘텐츠 없이 지역 인재를 붙들 방법도 없습니다. 관광산업, 지역산업 개발을 위해 로컬은 반드시 필요한 인프라로 부상했습니다.
로컬을 앞으로 어떻게 지원해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를 하기에 앞서 현재 로컬의 의미를 통사적으로 정리하는 중요합니다.
단행본 수준의 연구가 필요하지만 저는 현재, 즉 2010년 이후 한국 로컬 현상을 제4의 물결로 표현합니다.
1차 물결 - 1920년대 농촌계몽운동(풀무학교)
2차 물결 - 1960년대 농민운동과 농촌운동(가나안농군학교, 새마을운동)
3차 물결 - 1970년대 농활운동
4차 물결 - 2010년대 로컬운동
4차 물결에는 3가지 지류가 있습니다.
4A - 일본 마을 만들기와 지역재생 모델
4B - 영국 문화기획과 도시재생 모델
4C - 미국 독립기업과 대안문화 모델
로컬 크리에이터가 활동하는 분야는 4C, 미국 뉴욕, 포틀랜드에서 시작된 로컬 브랜드, 독립기업, 스몰 브랜드 운동입니다. 농촌보다는 도시가 중심이 되는 로컬 운동입니다.
한국에서는 4C가 골목상권 현상과 맞물려 4차 물결의 원동력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미국 대안문화(힙스터)가 상륙하기 전에도 홍대, 삼청동, 이태원, 가로수길 등 한국 일부 지역에서 예술가 문화가 살아있었습니다. 이들 예술가 아지트 문화가 독립 브랜드 문화와 결합돼 오늘날의 상권 기반 로컬 경제를 만들었습니다.
4C가 유독 한국에서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이유는 한국 특수성입니다. 오랜 산업화 과정에서 주류 물질주의 문화가 한국 사회를 광범위하게 지배하고, 이에 대한 반작용, 반문화가 주류 문화와 대비되는 원도심, 비수도권, 동네를 새로운 대안으로 부각했습니다.
4C는 1, 2, 3, 4A, 4B 등 한국의 다른 로컬 전통과 충돌하지 않고 성장했고 앞으로도 충동할 가능성이 높지 않습니다. 4C가 지역에 새로운 성장 동력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다른 영역을 보완하는 분야입니다.
갈등 요소가 있다면 정부 예산 배분을 놓고 발생할 수 있는데, 4C는 다른 영역과 달리 기본적으로 민간, 플레이어 영역입니다. 정부는 인재 양성, 원도심 건축과 보행 환경 개선, 문화 시설의 전략적 배치 등 간접적인 수단으로 지원해야 합니다.
한국에서 정부 차원의 로컬 크리에이터 생태계는 공식적으로 2016년 미래부 '지역 라이프스타일 산업 육성을 위한 기반 조성 연구 용역'으로 시작됩니다. 미래부가 이 용역을 기반으로 2016년 지역생활문화 청년혁신가 사업을 시작합니다. 미래부가 이석준 차관 중심으로 아모레퍼시픽 등 생활산업 주요 기업의 의견을 수렴해 추진한 사업입니다. 미래부 고경모 실장, 이옥형 과장이 정책 라인에서 지원했습니다. 저는 사업 준비 단계에서 연구 용역을 수행했습니다.
청년혁신가 사업은 2017년 중기부로 이관되어 2018년 로컬 크리에이터 지원 사업으로 재탄생합니다. 미래부-중기부 사업 추진 과정에서 전정환 제주창조경제혁신센터장, 한종호 강원창조경제혁신센터장이 제주, 강원뿐 아니라 전국 커뮤니티를 구축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합니다. 충북 센터도 심병철 책임 중심으로 충북 생태계를 구축합니다.
로컬 생태계의 또 다른 축이 AURI 윤주선 박사가 2015년부터 구축한 도시재생 스타트업 커뮤니티입니다. 현재 로컬의 선두 기업 대부분이 AURI 사업에 참여했습니다.
도시재생 스타트업이 암시하듯이 로컬 크리에이터는 하나의 정부 정책 영역에서 활동하지 않습니다. 중기부, 국토부뿐 아니라 문체부, 행안부 등 중앙 정부의 다양한 지역 활성화 사업에 참여합니다.
로컬 생태계가 활성화되면서 로컬 미디어(비로컬), 로컬 크리에이터 투자회사 등 창업 생태계의 모습을 보입니다. 최근 트렌드는 지역 정부의 로컬 크리에이터 지원 사업입니다. 중앙 정부와는 별개로 대구시는 2020년 명품 골목상권 육성 사업, 부산시는 2021년 소상공인 산업화 지원 사업, 서울시는 2021년 로컬 브랜드와 로컬 브랜드 상권 양성 사업을 통해 로컬 크리에이터를 양성하고 로컬 크리에이터 기업을 지원합니다.
윤석열 정부는 로컬 크리에이터 지원을 국정과제로 선정했습니다. ‘지역사회의 창조역량 강화’로 명명된 국정과제 119번이 로컬 크리에이터 지원 사업입니다. 지난 9월 23일 연희동 연남장에서 열린 ‘기업가형 소상공인 육성 포럼’에서 중기부, 국토부, 행안부, 우정사업본부가 각 부처의 국정과제 사업을 소개했습니다.
주축은 중기부입니다. 중기부는 기업가형 소상공인 육성과 행복한 로컬 상권 조성을 통해 지역의 창조역량 강화에 기여할 계획입니다. 이 두사업에서 로컬 크리에이터가 중축적인 역할을 하게 됩니다. 로컬 크리에이터가 로컬 브랜드로 성장하면 기업가형 소상공인으로 자리 잡고, 이들이 상권의 앵커 역할까지 확장되면 로컬 브랜드 상권이 되는 그림입니다.
여러 가지 이유에서 중앙 정부가 큰 그림을 그리기 어려운 상황입니다. 오히려 지역 정부가 국정과제 119번을 주도적으로 추진할 수 있습니다. 앞으로 저도 기회가 있으면 지자체에 지역 단위 로컬 브랜드 생태계 구축 사업을 제안할 계획입니다. 지역 창조역량 강화 사업의 성패는 인재 육성과 커뮤니티 지원에 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제가 구상하는 로컬 브랜드 생태계는 사람, 학교, 상권, 생산지 단지, 도시 인프라를 연결하는 새로운 유형의 창조도시입니다. 커피산업 도시로 자리 잡은 강릉이 좋은 모델입니다. 저는 이 생태계에서 로컬 스쿨과 거점 상권이 중요하다 생각해 지역 단위 사업의 제목을 '로컬 스쿨과 거점 상권 중심의 로컬 브랜드 생태계 구축'으로 잡아봤습니다.
위에서 언급했지만 로컬 크리에이터 지원 사업의 궁극적인 목표는 창조도시입니다. 하이테크, 문화예술, 로컬 크리에이터 산업 등 다양한 방법으로 창조도시가 될 수 있습니다. 현재 한국 상황에서 절대다수의 지방 도시는 창조적인 소상공인, 그러니까 로컬 크리에이터 중심의 창조도시가 실현 가능한 모델입니다.
로컬 크리에이터 -> 로컬 상권 -> 지역 특화 산업 -> 창조도시가 제가 상상하는 문화창조경제시대의 지역발전 모델입니다. 로컬 크리에이터 창조도시의 중심에는 로컬 브랜드 상권이 있습니다. 상권이 도시를 견인하는 구조입니다.
로컬 브랜드 상권과 생태계는 본질적으로 크리에이터가 주도하는 경제이기 때문에 정부의 역할은 제한적이어야 합니다. 상권 사업으로는 상권 관리, 건축 인프라와 보행환경 개선, 앵커 문화시설 유치, 로컬 크리에이터 양성과 커뮤니티 지원 정도가 적합합니다.
그동안 저는 국내 사례 중심으로 연구하고 정책 대안을 개발했습니다. 우리가 쉽게 말하는 골목상권, 들어다 보면 만만한 생태계가 아닙니다. 현재 제가 인지하는 8개 골목상권 모델입니다. 다양한 방식으로 골목상권이 탄생하고 성장한다는 의미입니다. 정부가 로컬 교육과 로컬 크리에이터 양성에 조금만 투자하면, 로컬이 알아서 지역에 적합한 생태계를 구축할 것으로 믿습니다.
현 정부 로컬 사업의 차별성은 경제성입니다. 소프트웨어 중심의 소규모 투자 사업입니다. 정부가 전열을 정비해 범정부 차원에서 추진한다고 해도 연 1,000억 원 이상을 쓰기가 어려운 분야입니다. 지역에 막대한 예산을 투입하는 사업 모델은 이제 지양해야 합니다. 지역도 다른 영역과 마찬가지로 문화, 창조력, 소프트웨어로 승부해야 합니다.
최근 정부가 지역 공동체 사업 예산을 감축하고 로컬 크리에이터 사업을 강조하면서 로컬 크리에이터에 대한 관심과 우려가 높아지고 있습니다. 건전한 비판과 토론은 필요하지만 과연 로컬 크리에이터가 견제의 대상인지는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막 시작되는 로컬 크리에이터 실험이 성공하려면 지역사회의 지원이 필요합니다.
많은 분이 우려하는 대로 로컬 크리에이터 커뮤니티와 산업이 지역사회와 격리되어 성장하면 머지않아 ‘그들만의 리그’로 끝날 수 있습니다. 로컬 크리에이터가 주민 공동체, 대자본 등 기성세대 산업과 커뮤니티와 적극적으로 협업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누가 강자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앞으로도 지역사회의 주류는 기성세대일 것입니다. 로컬 크리에이터가 노력해도 기성세대가 포용하지 않으면 지역사회 연대는 불가능합니다.
지역사회 연대가 성공하려면 크리에이터, 주민, 대기업 등 지역사회의 주체가 각자의 역할과 기능을 명확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지역을 살리는 방법은 세 가지입니다. 창조도시, 공동체도시, 혁신도시의 건설입니다. 각각 로컬 크리에이터, 주민, 대자본이 주도해야 하는 영역입니다. 창조도시, 공동체도시, 혁신도시가 서로 보완하고 공존해야만 지역의 지속 가능한 성장이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