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리티지 경영

한국 산업의 수수께끼 중 하나가 글로벌 명품 브랜드의 빈곤이다. 경제 규모가 10위권이고 일인당 명품 소비도 세계 최고 수준인데 자신 있게 글로벌 명품 브랜드 반열에 올랐다고 평가할 만한 국내 브랜드를 찾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원인은 기업 경영 철학에서 찾아야 한다. 명품 산업에서 회자되는 명품 경영의 공식은 디자인, 공학, 헤리티지의 결합이다. 예컨대 명품 시계는 디자인, 공학적인 메커니즘, 그리고 헤리티지로 만들어지는 창조물로 인식된다. 명품 경영 요소 중 한국 기업이 부족한 것이 있다면 헤리티지 개발 능력일 가능성이 높다. 디자인과 기술력에서 해외 기업에 뒤진다고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헤리티지 브랜드는 고유한 전통과 스토리로 차별화한 기업이다. 다른 기업이 복제하지 못하는 콘텐츠로 경쟁해야 하는 문화경제 시대에 고객이 인식하고 인정하는 헤리티지를 보유한 브랜드는 시장 경쟁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다.

그런데 한국 대기업에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한국 대기업 역사가 100년 가까이 되면서 기업 전통을 브랜드화하는 움직임이 나타난다. 대표적인 기업이 1970년대 포니 디자인을 복원하는 현대자동차다. 포니를 "현대차의 정신적·경험적 자산"으로 평가한 정의선 현대자동차 회장은 "과거의 여정에서 존재의 답을 찾을 것"이라고 밝혔다. 현대자동차의 헤리티지 발굴 과정에서 사업장도 빠지지 않는다. 최근 현대자동차가 태어난 울산 사업장의 역사를 아카이빙하기 시작했다.

현대자동차는 또한 디자인과 복합문화공간을 통해 헤리티지 경영의 진정성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한다. 럭셔리 브랜드 제네시스의 디자인 콘셉트를 전통 한옥의 기와에서 찾았다. 뉴욕에서는 제네시스 자동차와 디자인뿐만 아니라 한국적인 일상과 미학을 경험할 수 있는 복합문화공간인 제네시스 하우스를 운영한다. 현대자동차 헤리티지 경영의 성과는 제네시스의 브랜드 파워로 입증되고 있다. 해외 시장뿐만 아니라 외국차 선호도가 높은 한국 시장에서도 프리미엄 브랜드로 자리 잡고 있다.

디자인의 고유성을 추구하는 다른 대기업도 앞으로 헤리티지 경영을 강화할 것으로 예상한다. 과거 디자인 콘셉트를 재해석하고 복원하는 작업도 늘어날 것이다.

헤리티지 브랜드가 쉽게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헤리티지 진정성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 필자가 주목하는 진정성 항목은 홈마켓 투자다. 자신이 태어난 고향을 기념하지 않는 기업이 다른 전통을 중시할 가능성은 낮다. 홈마켓이 헤리티지 발굴에 중요한 이유는 단순하다. 기업의 헤리티지가 홈마켓에 가장 많이 축적되어 있기 때문이다.

홈마켓 투자는 헤리티지 진정성 확보 효과에 그치지 않는다. 홈마켓에서 타 기업이 복제할 수 없는 지역 기반 산업 생태계를 구축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나이키, 이케아, 스타벅스, 애플 등 글로벌 라이프스타일 대기업은 공통적으로 자신이 탄생한 도시에서 소비자, 생산자, 기술자, 투자자가 참여하는 산업 생태계를 구축했다. 그 결과가 포틀랜드의 아웃도어 산업, 시애틀의 커피 산업, 스몰란드의 디자인 산업, 실리콘밸리의 스마트폰 산업이다.

헤리티지 경영의 성공은 역사 기록과 스토리텔링을 넘어 헤리티지에 대한 의지를 경영 철학, 기업 문화, 디자인, 공간과 장소, 생태계에 깊이 각인하는 능력에 달렸다. 명품 기업이라면 기업의 모든 것에서 정체성이 배어 나와야 한다. 현대자동차에서 시작된 헤리티지 경영 실험이 전 산업으로 확산되어 한국이 한국 위상에 걸맞은 명품 강국으로 도약하기를 바란다.

출처: 매일경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