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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골목길 경제학자 Aug 27. 2023

어른의 종말

어른의 종말. 헤이세이 시대(1989-2019년) 일본 사회에 대한 요나하 준의 한 문구 평가다. 쇼와 시대 일본 지식계가 의존한 두 명의 아버지인 쇼와 천왕(1926-1989년)과 소비에트주의가 각각 1989년 천왕 사망과 1987-1991년 소비에트 체제 붕괴로 끝나면서 시작된 헤이세이 시대가 결국 아버지를 잃고 어른이 되지 못한 아이처럼 행동하는 시대가 됐다는 것이다.


잃어버린 30년(1991-2021년), 일본의 우경화로 기억하는 헤이세이 시대가 아이의 시대였다고? 일본이 국제사회에서 무게감이 없다는 것은 알았지만, 일본 사회 전체를 그리 가볍게 평가하는 것은 의외였다. 최근 한국 사회에서 ‘좋은 어른’ 논의가 부상한 것이 흥미로운 차에, 일본의 좋은 어른 논의는 어떻게 진행되는지 궁금해졌다.


물론 650 페이지에 달하는 ‘헤이세이사’를 어른-아이 구도로 설명하는 것은 나의 선택이다. 내 관심사로만 한정해도 이 책은 포스트모던 우파의 지적 빈곤, 포스트모던 사회 전환의 실패, 학자와 지식인의 몰락, 일본 정체성의 양극화 (문화 정체성의 도약과 정치 정체성의 혼미), 지역과 지역 정치의 역할 (스타 정치인 배출) 등 다양한 테마로 읽힐 수 있다.


먼저 정의의 문제다. 저자가 어른과 아이를 한 곳에서 정리하지 않기 때문에 여러 곳에 흩어진 정의를 모으는 작업이 필요하다. 책의 대부분을 헤이세이 시대 일본 정치인, 지식인, 문화예술인의 어른답지 못함을 설명하는데 할애하기 때문에, 어른답다고 평가한 극소수의 인물의 평가에서 작가의 어른관을 찾는 것이 빠르다.


요하나가 높이 평가한 거의 유일한 지식인은 1993년 사망한 무라카미 야스스케다 (p86-89, p259-262). 1992년작 ‘반고전의 정치경제학’에서 무라카미는 신자유주의를 민족주의, 경제적 자유주의, 기술 낙관론의 삼위일체로 정의하고, 신자유주의의 성공은 방위비 증대와 신기술 개발에서 파생되는 보호무역주의와 내부 모순과 갈등을 불확실한 테크놀로지의 미래에 맡기려는 충동을 극복하는데 달렸다고 주장한다. 요하나는 이를 2016년 트럼프 대통령 승리로 시작된 자유무역체제의 위기를 예측한 선경지명으로 높이 평가한다.


무라카미의 지식인 철학도 언급한다. 지식인이라면 “일관성(integrity)이 부족하다는 걸 느끼고 일관된 조리를 추구”해야 한다. 이에 대해 요하나는 “무라카미가 말하는 일관성이야 말로 냉전체제 당시 마르크스주의 사회과학을 내거는 진보파와 대치해 온 체험이 있었기에 제시할 수 있었던, 21세기형 새 어른 모델이었다고 할 수 있다”라고 말한다.


무라카미의 전작 ‘신중간대중의 시대’(1984년)도 1990년대 고이즈미 현상을 예견한 탁월한 저서로 평가한다. ‘1억 총 중류’라는 신조어를 띄운 이 책은 일본 사회를 이해하는 열쇠를 패전 후 인구의 10%에 불과했으나 60년대 후반에는 90%로 늘어난 신중간층(중류계급)의 정치 성향에서 찾는다. 이들 신중간대중은 “자신이 누리는 풍요로움이 유지되기를 바라는 점에선 보수적이지만, 타인이 얻는 기득권에는 엄격해서, 혁신정당 이상으로 개혁을 요하는 것이다” (p.261). 요하나는 이런 신중간대중의 보신성과 비판성 때문에 신자유주의와 내셔널리즘을 내건 고이즈미 혁명이 가능했다고 본다.


무라카미 평가에서 엿본 요하나가 원하는 세상은 높은 지적 능력과 소명의식을 가진 지식인이 주도하는 사회다. 이런 그에게 쇼와 시대에는 외국이 만들어준 소비에트주의와 헌법 9조(평화헌법)에 의존하고 헤이세이 시대에 와서는 서양에서 유행한 컬스터(컬처럴 스터디스)와 포스코로(포스트콜로니얼리즘)를 따라가기에 바빴던 좌파 지식인은 조롱의 대상이다.


미국과 영국의 자유주의와 전통주의를 신봉하면서도 1970년대 이후 미국 사회와 경제를 견인한 반문화(카운터컬처, 히피자본주의)를 퇴폐주의로 폄하하고 생활문화로 내재화된 영국식 보수주의를 이해하지 못하면서, 천왕주의, 쿨문화 또는 에도시대의 다원성과 평화주의에서 대안을 찾으려는 일본 우파 지식인의 무능력도 비판한다.


한마디로 일본 사상과 철학에 근본이 없기 때문에 임시방편적으로 의존한 쇼와 천왕과 소비에트주의가 사라지자 포퓰리즘, 이합집산과 패거리의 가벼움, 캐릭터와 인플루언서 정치, 탈이데올로기, 각자에 적합한 시야로 하고 싶은 말하는 감성 문화가 난무한 ‘역사 없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일본이 “전체 구도를 그려내며 우리가 무슨 일을 하는 건가라는 점을 깨닫게 하는 것이 학자나 언론의 역할이라고 생각하는” 근대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에 대한 해석은 기계 장치라는 새로운 신에게 맡기는” 탈근대로 가고 있다는 것이 저자의 인식인 듯하다 (p.19).


결국 요나하에게 어른은 자신의 공동체를 위해 주체적으로, 그리고 주체적인 역사와 서사를 쓰고 이를 현실에서 주도하는 일관된 삶을 사는 지식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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