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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골목길 경제학자 Aug 21. 2023

영국적인, 너무나 영국적인

모든 지역이 그 지역만의 라이프스타일을 구현하고 이를 경제 자원으로 활용하는 것이 문화창조 시대의 지역 발전 전략이라고 주장하는 나에게 특정 국가의 정체성에 대한 연구는 항상 흥미로운 주제다. 국가도 지역과 마찬가지로 정체성을 발굴해 국민을 통합하고 경쟁력을 강화해야 하기 때문이다.


지난달 한 모임에서 선배 한 분이 나에게 박지향 교수의 ‘영국적인, 너무나 영국적인’을 추천했다. 영국도 국가 정체성을 확립하는 과정에서 지역에 눈을 돌린 좋은 사례임을 지적했다. 책에 따르면 영국에서 국민 정체성이 완성되는 시기는 19세기 초다. 그 무렵에 이르러 영국인들이 일상에서 ‘이러이러하게 행동하는 것은 영국인답지 않다’라는 말을 통용했다 (p6).


영국의 ‘영국인 만들기’ 작업은 19세기 이전 오랜 기간에 걸쳐 진행됐다. 박지향 교수는 영국인 정체성에 영향을 미친 요인을 환경, 몸, 신화, 정신 등 4개 분야로 나누어 다양한 사례를 소개한다.


영국이 한국과 다른 점은 인물 설정이다. 영국은 브리타니아, 존 불 등의 가상 인물, 아서 왕, 로빈 후드와 같은 신화적 인물, 엘리자베스 1세, 처칠, 조지 오웰 등 실제 인물을 영국을 대표하는 인물로 설정해 존경한다. 특정 인물뿐 아니라 ‘정중한 신사,’ ‘강건한 기독교인,’ ‘남자다움’ 등 영국인이 추구해야 할 인재상과 가치를 강조한다.


정체성과 산업의 관계도 예상대로 명확하다. 영국인의 여가와 소비문화는 영국인 정체성을 보완한다. 축구, 공원, 가드닝, 차, 사립학교 교육 등 영국인이 성장 과정에서 습득한 생활 문화 덕분에 영국이 각 분야의 세계적인 중심지가 됐다. 영국인 정체성을 구현하는 산업이 영국의 대표적인 수출 산업이 된 것이다.


나에게 가장 흥미로운 챕터는 I부 3장 ‘대니얼 디포가 밟은 영국의 땅’이다. 이 장에서 우리에게 ‘로빈슨 크루소’의 작가로 익숙한 대니얼 디포가 평생 영국 곳곳을 여행하면서 남긴 여행기가 영국 정체성 확립에 크게 기여한 사실을 알게 됐다. 영국이 국가적 성공에 자신감을 갖는 성숙기를 맞아 “이제 스스로를 발견하는 나라, 그 자신의 세력과 민족성을 의식하기 시작하는 나라가 되었는데,” 그 시점에 디포의 여행기(1724)가 나온 것이다.


디포의 집필 의도는 국민 통합이다. 디포는 새롭게 정치적으로 통합한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를 문화적으로 통합하기 위해 영국인이 공유하는 문화와 비전을 제시하고 싶었다. 그가 강조한 것은 경관과 상인 정신이다. 어디에 가도 ‘전원적 잉글랜드’ 이상에 걸맞은 자연과 건축물을 찾을 수 있는 영국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디포가 가장 강조한 영국인 정체성은 상업이다. 그에게 상업이야 말로 영국의 정체성을 정의하고 영국의 미래를 담보할 수 있는 대표적인 자산이다. 경제적으로 흥하는 지역에서는 공통적으로 왕성한 상업 활동, 그렇지 못한 지역에선 상업의 낙후를 목격할 수 있었다. 영국이 하나의 국가로 성공하기 위해서는 상업 발전이 필수 조건이라는 것이 그의 소신이다.


디포가 경계한 것은 전통적인 귀족과 노동자 문화다. 그는 영국의 미래를 새로운 지배계급으로 부상한 상인 계급에서 찾았고, 상인 계급이 활동하는 지역, 그리고 그들이 사는 주거지를 영국의 지역 모델로 상정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디포 여행기의 파급 효과는 작지 않았다. 특히, 여행기가 발행된 후 영국에서 국내 여행 붐이 일어났다고 한다. 추정컨대, 자녀를 유럽 대륙 그랜드 투어에 보냈던 상류층이 디포 여행기 성공을 계기로 국내 여행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현재 한국의 지역 정체성 문제는 18세기 영국만큼 절실하다. 과연 한국 엘리트가 18세기 영국 엘리트와 같이 지역에 눈을 돌려 지역에서 새로운 정체성과 경제적 가치를 창출할 수 있을까? 그 과정에서 필요한 지역 여행기는 어떤 여행기일까? 디포가 18세기 초 지역의 상업과 경관을 강조했다면, 동일한 야망을 가진 한국 여행 작가는 현재 지역의 무엇을 강조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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