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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골목길 경제학자 Sep 19. 2017

포스트모던 재팬, 모던 코리아

많은 사람이 한국과 일본의 차이를 기술력과 장인정신에서 찾는다. 하지만 더 심각한 격차는 포스트모던 경쟁력이다.  


조선일보 선우정 기자는 2009년 저서 <일본, 일본인, 일본의 힘>에서 '포스트모던 일본과 모던 한국'의 간격을 단순 명료하게 설명한다.


“한국 정부가 수도 이전과 대운하 건설 등 토목국가적 약속을 할 때, 일본 정부는 ‘문화국가’, ‘환경국가’로의 비전을 선보였다. 그 결과 일본은 지금 21세기 세계 산업을 끌어갈 환경기술의 90% 이상을 쏟아내고 있으며, 패션, 건축, 팝아트 등 상위 문화와 애니메이션, 게임, 캐릭터 등의 오락문화, 그리고 초밥, 가이세키, 라멘 등의 식(食) 문화를 골고루 아울러 ‘Cool Japan(멋진 일본)’이라는 세련된 국가 이미지를 구축하는 데 성공했다.”



포스트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던 경제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철학, 문학, 문화, 비판이론 분야에서 모더니즘이 대표하는 이성, 정형성, 실증주의에 대한 회의를 표현하는 사상적 조류를 말한다.


사회과학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을 도입한 대표적인 학자는 정치학자 로알드 잉글하트다. 1997년 작 '근대화와 탈근대화'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을 탈물질주의로 정의하고 사회와 민주주의 발전을 설명하는 개념으로 사용했다.


포스트모던 사회의 특징은 개인의 자유, 개성, 자아실현, 삶의 질 등 탈물질적 가치에 주목하는 것이다. 탈물질주의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경제적 풍요가 선진국 국민의 삶의 목표에 변화를 가져왔고, 이런 과정에서 물질적 성공, 안전, 근면, 통제를 강조한 물질주의적 가치관을 대체한 개인의 자유, 자기표현, 그리고 삶의 질을 중시하는 가치관을 의미한다.


포스트모던 경제의 기반은 탈물질주의 가치다.


잉글하트 연구가 보여주듯이 탈물질주의 경제를 선도하는 북유럽과 일본은 개인이 자기표현에 적극적인 국가다.


한국은 아쉽게도 자기표현 가치가 선진국과 일본에 뒤떨어지는 것으로 나타난다.


잉글하트 세계 문화 지도 (2000-2014): 자기표현 지수 한국 -0.7, 일본 +0.2



탈물질주의에 기초한 포스트모던 경제는 가치 지향적 소비와 생산 활동을 중시하는 경제다.


소비를 통한 질 높은 삶/문화적 체험/정체성/사회정의의 추구, 친환경 상품과 유기농 먹거리의 대중화, 공유경제의 일상화, 골목상권의 부상 같은 움직임은 모두 탈물질주의 트렌드를 반영한다. 탈물질적 소비는 필연적으로 물질적 성장과 이익을 강조하는 산업사회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산업구조와 비즈니스 모델을 요구한다. 1960년대 이후 탈산업화와 탈물질화를 경험한 선진국은 이미 서비스, 문화콘텐츠, 창조산업 중심의 포스트모던 경제가 자리 잡았다.



포스트모던 경제 선진국 일본  


1980년대부터 일본은 포스트모던 문화현상으로의 사회변화를 감지하고 대응에 나섰으며, 덕분에 상당히 경쟁력 있는 포스트모던 경제를 이뤄냈다.


일본의 포스트모던 경쟁력이 국내에 알려진 것은 2000년대 초다. 현대경제연구원은 일본 경제잡지 <다이아몬드>의 2001년 기사를 인용하며 “포스트모던적 변화로 인해 소비자 그리고 소비에 대한 개념이 본질적으로 변하고 있다. 포스트모던 소비자는 언제나 행위자(Performer)로서 행동하며 항상 주체성과 의미를 찾고 구현하기 위해 제품이나 서비스를 구매한다는 점에서 기존의 일반 소비자와 구분된다. 그러므로 이에 맞춘 포스트모던 마케팅이 필요하다.”라고 제안했다.


미니멀라이프를 대표하는 유통 기업 무지



일본 포스트모던 경제의 특징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우선,


일본은 우리나라처럼 제조업 중심이지만, 서비스업, 문화산업, 창조산업 등 탈물질주의적 산업도 강하다.


컨설팅 기업 PWC는 2010년 일본의 연예미디어산업 시장 규모가 2,000억 달러에 달하며이는 363억 달러 규모인 한국 시장의 5.5배에 해당하는 수치라고 소개한 바 있다. 또 문화산업의 경쟁력을 측정하는 국가 브랜드 인덱스(Country Brand Index)도 2014-15년에 일본을 세계 1위(한국은 20위)로 꼽았다.



선우정 기자의 지적처럼


모던 경제의 중심이 제조업이라면 포스트모던 경제에서는 고령산업, 환경산업, 문화산업 등이다. 1980년대부터 이미 여기에 적극적으로 투자해 온 일본은 단연 세계 최고의 경쟁력을 갖춘 상태다.



2010년 이후에는 탈물질주의 소비문화를 겨냥한 라이프스타일 산업에 투자해 산업 혁신을 선도한다.


특히, 유통시장은 '모든 기업이 라이프스타일 기업이다'라고 주장할 만큼 라이프스타일 제안형 매장 중심으로 재편됐다.


그 결과 츠타야, 무지, 빔스 등 새로운 생활문화를 제안하는 혁신적인 기업을 배출하는 라이프스타일 산업 선진국이 됐다.




정체성도 포스트모던 자산이다


모든 산업에서 '일본 다움' 즉 일본적 가치를 강조하고 일본적 디자인을 선호하는 것도 포스트모던적인 현상이다.


건축, 디자인, 미술에서 현대적 미니멀리즘(minimalism)으로 표현되는 일본 스타일은 벌써 글로벌 스탠더드의 하나로 자리 잡았다.



미술과 건축에서 출발한 일본적 디자인은 자동차, 전자제품, 패션 등 주요 수출 상품에도 이식돼 해외시장을 휩쓸고 있다.



교토가 배출한 글로벌 기업 교세라의 창업자 이나모리 가즈오



일본은 또한 지역 문화 정체성이 강한 나라다.


세계화 시대에는 역설적으로 지역 문화 정체성이 포스트모던 경쟁력이다.



교토, 오사카, 나고야 등 일본의 지역 도시는 고유의 문화를 바탕으로 세계적 글로벌 기업을 육성한 대표적인 '라이프스타일' 도시다. 특히, 교토는 일본 문화의 중심지로서 일본이 자랑하는 10대 전자부품 기업 중 6개를 보유한 과학기술 도시다.



교토가 지방 도시로서 도쿄에 버금가는 첨단산업을 개척한 배경에는 지역 문화에 대한 교토의 남다른 자부심이 깔려있다.


교 료리, 교 야사이(야채), 교 스시, 교 야끼(도자기) 등 교토 시민들은 의도적으로 교토 상품 이름 앞에 ‘교’ 단어를 붙이고 이를 프리미엄 브랜드로 만든다. 천황에 진상한 제품을 만들어왔다는 장인정신과 자부심, 다른 지역 기업과 활발히 협력하는 오픈마인드, 거기에 신생기업을 아낌없이 지원하는 후원 정신으로 지역을 대표하는 첨단산업을 육성해온 것이다.


혹자는 일본을 두고 오랜 경기침체에서 벗어나기 위해 국수주의적 정책으로 일관하고 있는 딱한 나라라고 말한다. 현실은 그렇지 않다.


일본은 세계가 인정하는 원천기술을 기반으로 첨단산업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고, 한편, 최고 수준의 서비스업과 문화산업을 보유한 포스트모던 경제의 모델이기도 하다.



탈물질주의 가치 수용이 우선이다


한국이 일본과 선진국 수준의 문화산업과 창조산업을 원한다면, 자기표현, 삶의 질, 정체성 등 그에 필요한 탈물질주의 가치를 수용해야 한다. 법제도 등 물질주의 개혁만으로는 부족하다. 특히, 아시아 국가로는 유일하게 포스트모던 경제로 진입한 일본을 적극적으로 연구해야 한다. 그래야만 한국 경제의 최대 난제인 '포스트모던 재팬, 모던 코리아'의 격차를 좁힐 수 있다.





출처. 라이프스타일 도시. 위클리비즈.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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