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5월 SERICEO 독서 클럽 다빈치에서 아세모글루와 존슨 MIT 교수의 2023년 작 '권력과 진보'에 대해 4회에 걸쳐 강연했습니다. 강연 내용을 칼럼으로 정리했습니다. 기술을 사회 현상으로 분석하는 시각은 인간 중심 기술을 찾는 과정에서 꼭 필요합니다.
권력과 진보: 기술의 미래에 대한 정치경제학의 통찰
대런 아세모글루와 사이먼 존슨은 '권력과 진보'에서 "기술 발전은 어떤 조건 하에서 '공유된 번영'을 창출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이들은 생산성 향상과 임금 상승이 선순환을 이루는 '생산성 밴드왜건' 메커니즘이 작동할 때 기술의 열매가 사회 전반에 고루 배분될 수 있으며, 이는 노동자의 협상력 제고를 위한 사회경제적 환경 조성을 통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즉 기술이 보편적 이익에 봉사하게 하는 공정한 분배 구조의 토대로서 대항 권력(countervailing power)의 형성이 핵심적이라는 것이다.
저자들은 이러한 가설을 역사적 경험을 통해 뒷받침한다. 18-19세기 영국 산업혁명의 결과는 기술 발전의 열매가 자본가 계급에 집중되고 노동자들은 열악한 조건에 처한 것이었다. 기술은 생산성을 급격히 향상시켰지만, 노동자들의 삶은 오히려 어려워졌다.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는 도시 노동자들에게 산업화는 기계에 종속된 삶을 의미했다. 반면 자본가들은 산업혁명이 낳은 막대한 부를 누렸다.
그러나 19세기 후반 이후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영국에서는 차티스트 운동으로 대표되는 노동운동이 힘을 얻으며 노동조합이 합법화되었고, 보통선거권이 확립되면서 노동자의 정치적 영향력이 점차 커졌다. 한편 전기라는 새로운 범용기술의 도입은 생산 공정의 유연성을 높여 숙련 노동에 대한 수요를 창출했다. 정부 또한 노동자의 처우 개선과 빈곤 문제 해결을 위해 공장법, 빈민법 등 복지 정책을 확대했다. 이러한 노동운동의 성장, 전기 등 범용기술의 발명, 그리고 복지국가의 발전은 기술 진보를 노동친화적인 방향으로 이끄는 제도적 토대가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20세기 초 포드주의적 대량생산 체제에서 가시적 성과를 거두었다. 포드는 컨베이어 벨트로 대표되는 혁신적 기술로 생산성을 극대화하는 동시에, 5달러의 날로 상징되는 노동자 고임금 정책으로 구매력을 창출했다. 즉 생산성 향상과 임금 인상이 선순환을 이루는 이른바 '생산성 밴드왜건' 메커니즘이 작동한 것이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서구에서 본격화된 복지국가 체제와 결합하며 195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의 '영광의 30년'을 견인했다.
이 시기 기술 발전은 숙련 노동자에 대한 수요를 증대시켰고, 노조의 강력한 교섭력에 힘입어 생산성 향상의 과실이 임금 상승으로 이어지면서 불평등이 완화되고 중산층이 확대되었다. 즉 포드주의 체제로 대표되는 20세기 중반의 자본주의 황금기는 기술 발전의 혜택이 사회 전반에 고루 공유되던 '포용적 성장'의 이상적 시기였던 셈이다.
그러나 저자들에 따르면 1970년대를 기점으로 전후의 평등한 성장 모델은 도전에 직면하기 시작했다. 생산성 증가에도 불구하고 실질임금이 정체되는 현상이 나타났고, 노동소득분배율은 하락하는 추세로 돌아섰다. 여기에는 신자유주의적 이념에 입각한 시장중심적 기술관의 영향이 컸다. 주주가치 극대화를 명분으로 효율성 향상에 초점을 맞춘 경영 전략이 확산되었고, 노동절약적 기술 도입이 가속화되었다. 그 결과 자본의 교섭력은 급격히 강화된 반면, 노동자의 협상력은 약화되었다.
이런 추세는 1970년대부터 본격화된 디지털 혁명에서도 관찰된다. 초기 해커들은 기술을 통해 인간을 해방시키고 권력의 탈중심화를 꿈꿨지만, 이러한 이상은 상업화 과정에서 자본의 논리에 포섭되고 말았다. 디지털 기술이 자본에 의해 노동 통제의 수단으로 활용되는 경향이 강해졌다. 사무직 노동의 자동화로 일자리가 감소하는 가운데, 플랫폼 자본은 데이터와 알고리즘을 기반으로 시장 지배력을 강화하며 노동자의 협상력을 약화시켰다. 결국 디지털 민주화를 향한 초기의 열망은 시장만능주의적 기술관에 압도되는 양상을 보였다.
AI 기술의 발전 양상에 대한 저자들의 전망도 낙관적이지 않다. 인공지능은 단순 노동의 자동화를 넘어 전문직 고숙련 노동마저 대체하며 기술실업에 대한 우려를 낳고 있다. 여기에 자본의 이해관계가 결부되면서, AI는 효율성 제고를 명분으로 노동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는 수단으로 활용될 수 있다. 더욱이 AI 예술 생성 기술의 발전은 인간 노동의 창의적 영역마저 위협하고 있다는 비판도 제기된다. 이는 궁극적으로 노동의 자율성과 창의성을 제약할 수 있다는 점에서 경계심을 불러일으킨다.
그렇다면 우리는 기술발전의 과실을 보다 균형 있게 배분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할까. 저자들은 무엇보다 기술변화의 방향성 자체를 규정하는 민주적 의사결정 체계의 구축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노동조합의 역할 강화, 정부-기업-시민사회 간 협력적 거버넌스 구축, 그리고 적극적인 시민 참여 등이 요구된다는 것이다. 특히 노동의 권익을 보호하고 대변할 수 있는 집단적 역량을 제고함으로써 자본과 기술에 대한 견제와 균형을 모색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교육과 노동시장 정책, 사회안전망 확충을 포괄하는 종합적인 사회정책 또한 기술변화에 대한 사회적 대응력을 높이는 데 긴요하다. 더불어 조세개혁 등을 통해 소득 재분배를 강화함으로써 기술발전의 성과를 보다 고르게 나누는 방안도 모색되어야 할 것이다.
이상 살펴본 바와 같이 '권력과 진보'는 기술과 노동, 그리고 자본의 역학 관계 속에서 형성되는 불평등의 메커니즘을 역사적 맥락에서 치밀하게 추적하고 있다. 특히 기술발전의 방향성을 결정짓는 사회경제적 권력관계에 주목하며, 기술혁신의 지향점 자체를 민주적으로 통제하고 공익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이끌어가기 위한 정책적, 제도적 처방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이 책의 문제의식은 돋보인다 하겠다.
다만 평자의 눈에는 저자들의 진단과 해법이 다소 거시적 차원에 머무는 것은 아닌가 하는 아쉬움도 남는다. 가령 '권력과 진보'에서는 창의 노동의 부상으로 대표되는 최근의 경제 흐름은 상대적으로 소홀히 다뤄지는 경향이 있다. 물론 전통적인 자본-노동 관계를 전제로 한 정치경제학의 렌즈로는 자본의 통제에서 자유로운 개인들의 자발적 창작 활동을 온전히 포착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디지털 기술에 기반해 네트워크로 연결된 개인들이 자신의 창의성과 전문성을 바탕으로 새로운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분석틀을 뛰어넘는 혁신적 접근이 요구된다. 크리에이터 경제로 대표되는 이러한 새로운 생산양식은 자본에 종속되지 않는 자율 노동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동시에, 기술을 창의성 증진과 자아실현의 계기로 활용할 수 있음을 시사하기 때문이다. 특히 예술과 기술의 융합을 통해 노동의 의미를 재정의하려는 시도들은 효율성 일변도의 기술관에 맞서는 대안적 상상력의 토대를 마련해 준다. 지식정보사회의 도래와 함께 창의성이 부의 핵심 원천으로 부상하고 있는 만큼, 주류 경제학계에서도 크리에이터 경제의 동학에 보다 많은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어 보인다.
우리가 기술과 노동의 미래를 전망함에 있어 '권력과 진보'가 제기한 문제의식과 통찰은 반드시 새겨들어야 할 것이다. "누구를 위한 기술인가", "기술 발전의 과실을 어떻게 분배할 것인가"라는 화두는 단순히 거시적 제도개혁의 방향성만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미시정치적 실천 속에서 구체화될 때 비로소 답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디지털 기술을 자율과 연대의 가치 실현을 위한 도구로 전유하려는 개인들의 노력 또한 기술 민주화의 토대가 될 수 있다.
따라서 디지털 창의 노동자로서 크리에이터의 잠재력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네트워크로 연결된 개별 주체들의 자발적 창작 활동이 새로운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양상은, 자본-노동의 전통적 관계를 넘어서는 대안적 생산 모델의 단초를 보여준다. 물론 크리에이터 경제가 자본주의의 모순에서 자유롭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창의성과 자율성에 기반한 개인들의 협업이 경제적 역동성의 원천이 될 수 있다는 사실 또한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기술발전에 수반되는 권력 불평등의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노동의 집단적 권익 보호를 넘어 개인의 창의성과 자율성이 발현될 수 있는 기술 문화를 육성하는 일 또한 중요해 보인다. 자본의 지배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창작 활동의 영역을 제도적으로 보장하고, 창의적 개인들의 네트워크가 확장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는 것은 기술 민주화의 핵심 과제 중 하나일 것이다. 더불어 디지털 크리에이터로 대표되는 창작자들의 권익을 옹호하고, 이들이 공정한 대가를 받으며 지속가능한 생태계 속에서 활동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정책 또한 요구된다 하겠다.
기술과 민주주의의 관계를 재정립하기 위해서는 자본과 국가, 시민사회가 총체적으로 관여하는 사회적 숙의와 합의의 과정이 전제되어야 한다. 거대 자본과 기술관료의 이해관계가 아닌 다수 시민들의 목소리가 기술의 방향성을 결정하는 데 반영될 때 우리는 비로소 '공유된 번영'을 향해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디지털 시대의 새로운 권력으로 부상하고 있는 크리에이터 정신은 이 같은 기술 민주화 운동의 중요한 동력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크리에이터소아이어티 #제3의응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