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재생의 시대정신
안녕하세요. 연세대학교에서 오늘의 농촌 문제와 지역 발전에 대해 연구하고 있는 모종린입니다. 오늘 장성에서 지역재생의 시대정신에 대해 생각을 나눌 수 있게 되어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우리 농촌이 직면한 위기의 실체를 직시하고, 이를 돌파할 수 있는 창의적 대안을 함께 모색해 보는 뜻깊은 시간이 되길 기대해 봅니다.
농촌을 둘러싼 환경 변화와 위기
우리 농촌은 그동안 산업화와 도시화의 흐름 속에서 많은 변화를 겪어 왔습니다. 농업 생산성 향상과 소득 증대라는 성과도 있었지만, 이면에는 농촌 공동화와 고령화라는 깊은 상처도 있었습니다. 이농현상이 가속화되면서 농촌은 단순한 인구 유출을 넘어 지역 전체의 활력을 잃어갔던 것이 사실입니다.
정부에서도 이런 문제의식 하에 다양한 농촌 지원 정책을 펼쳐 왔습니다. 농촌 테마파크 조성, 신활력 플러스 사업, 창조적 마을 만들기 등이 대표적입니다. 하지만 대다수가 외부 자본과 도시민 유치에 초점이 맞춰져, 정작 지역민의 자생적 역량 강화에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여기에 전례 없는 저출산 고령화 흐름이 농촌을 직접 덮치면서, 일부 지역은 소멸 위기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반면 외지 자본의 농지 투기와 혐오시설 입지로 인한 갈등도 여전합니다. 농촌이 처한 현실이 결코 녹록지 않음을 실감케 하는 대목입니다.
농촌 위기의 근본 원인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농촌이 처한 위기의 근본 원인은 무엇일까요? 저는 그동안 농촌을 바라보는 정책적 사고의 한계에 가장 큰 원인이 있다고 봅니다. 그동안 우리는 농촌의 미래를 외부에서 찾으려 했습니다. 도시의 대기업과 자본을 유치하면, 농촌도 도시처럼 변할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 말입니다.
하지만 이는 농촌의 고유한 정체성과 내재적 가치를 간과한 발상입니다. 지역공동체의 문화와 전통, 그 속에서 면면히 이어온 주민들의 삶의 방식. 이것이야말로 농촌만의 고유한 자산이자, 도시와 차별화되는 경쟁력의 원천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변화하는 시대 흐름에 맞춰, 농촌의 정주 여건을 개선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 방향은 외부의 것을 그대로 이식하는 것이 아니라, 농촌 고유의 문화와 정체성을 기반으로 그에 걸맞은 방식을 모색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최근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나타나고 있는 일련의 흐름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로컬 문화에 대한 관심 증대, 독특한 라이프스타일 추구, 개성 있고 창의적인 공간에 대한 선호. 이는 획일화된 도시 문화에 대한 반작용인 동시에, 농촌이 가진 차별화된 가치를 재발견하려는 자발적 노력으로 해석될 수 있을 것입니다.
내생적 발전 전략으로서의 로컬 콘텐츠
이처럼 농촌 고유의 자산에서 미래 활로를 모색하고자 하는 흐름. 저는 이를 로컬 콘텐츠에 기반한 내생적 발전 전략으로 규정하고 싶습니다. 로컬 콘텐츠란 그 지역에 뿌리내린 유무형의 자원을 창의적으로 발굴하고 가공해, 경쟁력 있는 상품과 서비스로 만들어내는 것을 말합니다.
제주도를 가 보신 분들이라면 체감하실 겁니다. 올레길을 걷다 보면 산방산과 송악산이 병풍처럼 드리운 너른 들판이 펼쳐집니다. 습득물의 돌담을 따라 걸으면 제주 여인들의 일상을 엿볼 수 있습니다. 골목골목 스며든 동백나무 향기, 돌 틈에 피어난 야생화, 어릴 적 동무들과 뛰놀던 오름의 추억. 이 모든 것이 제주만의 로컬 콘텐츠입니다.
이런 로컬 콘텐츠는 지역 주민들도 잘 모르던 것을 새롭게 발견하게 만듭니다. 일상에 파묻혀 잊고 있었던, 그러나 외부인의 눈에는 너무나 경이롭고 아름다운 것들 말이죠. 오래전 선조들의 삶의 방식, 공동체를 일구며 써 내려온 문화와 예술, 대를 이어 생업으로 삼아온 기술과 노하우까지. 이 모든 것이 소중한 콘텐츠가 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로컬 콘텐츠는 지역 경제 활성화에도 기여합니다. 관광객 유치는 물론, 특산품 판매와 일자리 창출로 이어집니다. 그 과정에서 주민들의 자발적 참여가 이뤄지고 공동체 의식도 높아집니다. 나아가 지역에 대한 자부심을 느끼고, 애향심도 깊어지는 등 선순환 구조가 만들어지는 것이죠.
실제 국내외 많은 지역에서 로컬 콘텐츠를 핵심 전략으로 삼아 성공한 사례들이 늘고 있습니다. 의성 세계 코미디아트 페스티벌, 광주 북구 충장로 시장 야시장 프로젝트 등은 주민 주도로 고유한 문화 콘텐츠를 개발해 지역경제에 활력을 불어넣은 국내 사례입니다. 해외에서는 대만의 화산마을, 일본 나오시마의 베네세 하우스 등이 대표적입니다.
로컬 콘텐츠 생태계 구축을 위한 경로 - 원도심에 주목하라
그렇다면 우리 농촌 지역에서 로컬 콘텐츠 발굴과 활용은 어떤 방식으로 전개되어야 할까요. 저는 원도심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고 봅니다. 원도심은 한때 지역의 중심지 역할을 했던 곳입니다. 행정과 경제, 문화의 구심점이자 주민들의 삶이 고스란히 녹아있는 공간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산업화 시대를 거치며 공동화의 길을 걸어왔습니다. 새로운 중심지의 등장과 대형 상권의 확장으로, 과거의 중심성을 잃고 점차 낙후되어 온 것이 사실입니다. 도시 외곽으로의 확장, 대규모 신도시 조성 등 대외적 성장 논리에 밀려 원도심은 정책적 후순위로 밀려났습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이는 원도심이 가진 로컬 콘텐츠의 가치를 오롯이 간직하는 배경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옛 정취를 느낄 수 있는 골목길, 오래된 가게들이 곳곳에 숨어 있고, 주민들의 애환이 켜켜이 쌓여 있습니다. 시장통에는 사라져 가는 장인의 기술이 전해지고, 주민들의 일상적 교류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처럼 오랜 시간의 켜가 고스란히 남아있는 원도심. 침체된 공간이 아니라 지역의 정체성과 고유한 매력이 응축된 잠재력의 공간으로 바라봐야 합니다. 산업단지나 대규모 아파트 조성보다는, 원도심의 문화와 역사를 살려내는 방향의 지역재생 노력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원도심의 로컬 콘텐츠를 발굴하고 연결하기 위해, 다양한 인적·물적 자원을 한 데 모아내는 플랫폼이 구축되어야 합니다. 주민들의 역량을 결집하고 이를 체계적으로 지원하는 중간 지원 조직 역할을 하는 거버넌스 기구를 상상해 볼 수 있겠습니다.
빈 점포와 노후 건물을 활용한 창조적 공간 조성, 골목 정원 및 벽화 조성 사업, 지역 특화 문화관광 프로그램 운영 등 다채로운 실험들이 펼쳐질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에 기존 상권과 연계한 특화거리 조성, 지역 문화예술 자원과 연계한 창작 레지던시 프로그램 운영 등으로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과정이 주민 주도로 이뤄져야 한다는 점입니다. 지역에 대한 애정과 이해가 깊은 주민들이 주체가 돼야, 로컬 콘텐츠의 발굴과 활용이 진정성을 갖출 수 있습니다. 행정은 이를 위한 제도적, 재정적 지원에 힘써야 할 것입니다.
원도심형 로컬 콘텐츠의 방향성
원도심을 기반으로 한 로컬 콘텐츠 발굴과 활용. 그 구체적 방향성은 무엇일까요? 저는 크게 세 가지로 압축할 수 있다고 봅니다.
첫째, 원도심의 역사문화 자원을 브랜딩 하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고유한 역사적 사건, 인물, 설화 등 스토리텔링 요소를 개발하고, 독특한 건축양식과 경관을 자원화하는 일입니다. 단순히 관광객 유치에 그치지 않고, 지역 정체성 확립과 주민 자부심 고취로 이어질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둘째, 주민 참여형 도시재생 프로그램을 통해 공동체성을 회복하고 확장해 나가야 합니다. 주민이 주도하는 문화행사, 시장 활성화 프로젝트, 빈 점포 활용 창업 지원 등 다양한 실험을 통해, 공동의 문제를 협력적으로 해결해 나가는 경험이 축적되어야 합니다. 여기에 청년 창업가, 사회적 기업 등 지역 혁신 인재들의 참여를 독려할 필요가 있습니다.
셋째, 지역 고유의 생활양식과 생태적 가치를 브랜딩해야 합니다. 전통시장과 골목상권의 활력을 되살리고, 지역 특유의 먹거리와 농특산물을 관광 상품화하는 한편, 전통 기술과 생태 지식을 보존·계승하는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것도 중요한 과제가 될 것입니다.
이 모든 과정을 관통하는 핵심 가치는 '지속가능성'입니다. 단기적 성과에 급급한 이벤트성 사업이 아니라, 주민들의 일상과 밀착된 지속가능한 활동으로 정착시켜 나가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궁극적으로는 원도심 고유의 매력을 바탕으로, 외부인과 지역민이 함께 어우러지는 살아 있는 공간을 만드는 것. 그것이 지향해야 할 로컬 콘텐츠의 미래상이 아닐까 싶습니다.
로컬 크리에이터 육성이 관건
원도심을 기반으로 한 로컬 콘텐츠 전략. 그 성패를 좌우할 관건은 결국 '사람'입니다. 지역의 내재된 가치를 재발견하고, 이를 매력적인 콘텐츠로 만들어내는 창의적 인재가 있어야 합니다. 저는 이들을 '로컬 크리에이터'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로컬 크리에이터는 행정 용어로 표현하기 어려운, 자유로운 영혼을 지닌 사람들입니다. 관습적 틀에 얽매이지 않고 낯선 시도를 즐기며, 문화와 예술을 삶의 일부로 여깁니다. 무엇보다 지역에 대한 깊은 애정을 지니고, 새로운 지역 가치를 만들어가는 데 보람을 느낍니다.
이런 로컬 크리에이터를 육성하고 지원하는 일, 단순히 지자체만의 역할은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민간 부문과의 적극적 협력이 필요한 영역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지역 기업의 사회공헌 프로그램, 대학과 연계한 인재 양성, 중간지원조직의 역량 강화 등 다양한 접근이 요구됩니다.
로컬 크리에이터들이 원도심에 둥지를 틀고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도록 적정 수준의 임대료와 창작 공간을 지원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나아가 창업 컨설팅, 멘토링, 네트워킹 등 창의적 실험을 뒷받침할 성장 기반을 체계적으로 구축해야 할 것입니다.
저는 이런 로컬 크리에이터들이 상호 자극을 주고받으며 성장하는 게 중요하다고 봅니다. 이들이 한 데 모여 시너지를 낼 수 있는 플랫폼이 절실히 요구되는 이유입니다. 축제, 포럼 등 이들의 활동을 가시화할 수 있는 계기를 지속적으로 만들어 나가야 하겠습니다.
상상하라, 100년 후 장성의 미래를
존경하는 장성군민 여러분. 지금까지 농촌과 원도심의 위기를 직시하고, 그 돌파구로서 로컬 콘텐츠의 가능성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저는 오늘 이 자리가 장성의 새로운 미래를 상상하는 출발점이 되길 소망합니다.
돌이켜보면 우리 장성에도 자랑스러운 로컬 콘텐츠가 무궁무진합니다. 청렴결백의 상징인 필암서원, 우리 선조들의 정신세계가 응축된 백양사. 100년 묵은 장성 삼백년 숲, 황룡강 생태공원, 축령산 편백 숲 등 청정 자연이 주는 감동.
이 모든 것이 우리에겐 익숙한 일상이지만, 외부인의 눈에는 얼마나 매혹적으로 비칠까요? 선조들이 이어온 공동체 정신과 화합의 삶, 지역 특유의 정겨운 인심과 넉넉한 인심. 이 모든 것이 우리 장성만의 특별한 자산입니다.
이런 로컬 콘텐츠에 새로운 가치를 불어넣고, 독특한 방식으로 활용하는 일. 그것은 분명 우리에게 낯설고 버거운 도전이 될 것입니다. 익숙한 것을 버리고 새로운 길을 모색한다는 건 누구에게나 두려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가진 잠재력을 믿습니다. 천년 고찰을 일구고, 선비 정신을 계승해 온 장성 사람들. 기나긴 역사를 이어오며 수많은 도전을 극복해 온 저력 있는 공동체. 우리는 새로운 시대를 개척해 나갈 역량과 지혜를 충분히 지녔다고 확신합니다.
중요한 것은 모두가 함께 한다는 마음가짐입니다. 관 주도의 일방적 계획이 아니라, 주민들이 참여하는 열린 장성. 농촌과 도시, 원주민과 귀촌인, 기성세대와 청년이 서로의 장벽을 허물고 융합하는 포용의 장성. 그것이 우리가 지향해야 할 공동체의 미래상이 아닐까요.
여기 계신 모든 분들이 바로 장성의 미래를 이끌어갈 로컬 크리에이터입니다. 한 분 한 분이 가진 열정과 재능, 그리고 애향심을 모아내는 일. 먼 미래를 내다보는 혜안과 끈기를 갖고 긴 호흡으로 협력하는 일. 그 길을 함께 걸어가는 동행에 여러분이 함께해 주시길 소망합니다.
출처: 2023년 7월 6일에 열린 제1165회 21세기 장성아카데미 강연의 원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