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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보리 Sep 17. 2018

시아버지와 나는 가족이 될 수 있을까

현실을 납득하고 실무 진행 체계로 빠르게 넘어가는 법

우리는 왜 하나도 쉬운게 없을까. 아버님의 치매 소식과, 그래서 우리집 근처로 모셔와야 한다는 사실을 납득하기 위해 나는 세상이 떠나갈 것처럼 울었다. 우울증은 한 달 정도 지속되었는데, 아주 짧고 강렬했다. 마치 내가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인 것 같고,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가볍고 행복하게 하루하루를 즐기는 것 같아서 타인의 행복을 볼 때마다 질투가 났다. 왜 나만 불행한 거야!


나는 일단 우울하면 나에게 달고 짜고 기름진 것을 충분히 먹여준다. 체중계 따위 던져버리겠다고 생각하면서 실컷 먹는다. 아침에는 따뜻하고 부드러운 모카빵, 점심에는 크리피하게 익은 삼겹살을 잘 익은 김치와 노릇하게 구워진 마늘에 싸먹고, 저녁에는 서브웨이 진리의 BLT 15cm에 베이컨 추가. 환상적이다. 비 오는 어떤 날에는 숯불 닭갈비가 먹고 싶어서 무려 2km를 걸어가(버스로 가기에는 약간 애매한 거리라) 혼자서 2인분을 석세스하고 돌아왔다. 혼자 치킨도 시켜 먹고, 피자도 시켜 먹고, 왕 비싼 초밥도 먹었다.


그렇게 먹다 보면 문득 체중계가 걱정되기 시작한다. 체중계가 걱정되기 시작하면 우울증 스텝 1이 완료되었다는 뜻이다. 여기까지 오면 이제 사람들의 경험담과, 나를 위로할 수 있는 문장들을 찾아다닌다. 위로가 될 때까지. 보통 이 정도 오면 우울증에서 졸업해 정상 생활로 돌아오게 되는데, 이번에는 평소와는 다른 레벨의 충격이라 그런지 무언가가 더 필요했다.


남편이었다.


남편을 볼 때마다 치받는 그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처음 몇 번은 남편 앞에서 엉엉 목놓아 울다가, 그래도 정신을 차리고 남편도 위로해주고 현실적인 일들도 같이 처리했다. 그런데 자꾸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나는 왜 이런 일이 벌어질 거라고 예상을 못 했을까, 남편은 왜 그런 예상을 못했을까. 우리 집은 산 근처에 있는데, 어느 날은 저녁밥 잘 먹고 갑자기 길맥이 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우리 동네는 5~60대 등산객 맞춤형 상권이기 때문에 내가 원하는 힙한 분위기의 술집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딱 한 군데 있는데 10시도 안 되어서 문을 닫는다. (사장님, 술집이 10시에 문을 닫으면 어쩌자는 건가요. 저 정말 실망했습니다. 제발 최소 새벽 1시까지는 열어주세요...... 술집이잖아요...)


암튼 길거리를 방황하다가 등산로 초입에서 맥주를 깠다. 그리고 남편에게 이렇게 말했다.


- 다시 옛날로 돌아간다면 나는 오빠랑 결혼 안 했어. 그치만 뭐 했으니 어떻게 해. 열심히 살아야지.


남편은 아무 말도 없이 맥주만 홀짝거렸다. 나는 내가 이렇게 말하면 미안하다거나, 잘 하겠다거나 이런 얘기를 바랬는데.


- 왜 아무 말도 없어?

- 내가 여기에서 무슨 말을 해?

- 미안하다거나, 잘 하겠다거나 그런 말?

- 미안하지. 너한테 폐를 끼치는 것 같아서 너무너무 미안해. 그런데 오빠가 어떻게 할까? 네가 그렇게 말하면, 내가 너를 떠나보내줘야 되겠구나. 결혼한 게 잘못되었구나. 그런 생각만 들어. 보리야, 내가 만약 반대였으면 어떻게 했을 것 같아?

- 걱정하지 말라고 해줬을 것 같은데.


이 말을 내뱉으면서 만약 오빠가 나한테, 내가 오빠한테 했던 말들을 했다면 어땠을까 상상했다. 날카로운 통증이 나를 쿡 쑤셨다가 지나가는 것 같았다. 나한테도 그런 일이 벌어지지 말라는 법은 없는데. 그런 나에게 오빠가 이런 말들을 하면 나는 어떤 심정이 될까.


거기까지 생각이 드니 급반성이 되면서 비굴 쭈굴 모드가 되어 오빠에게 싹싹 빌었다. 오빠는 괜찮다고 했다. 속상했던 건 사실이지만 너도 속상할테니 이렇게 얘기하고 풀자고. 그리고 등산로에서 집까지 손을 잡고 걸어 내려왔다.






물론 여기에서 끝난다면 해피엔딩이라고 볼 수 있겠지만, 현실은 현실이다. 나는 사실 우울증인 상황에서도 실무를 처리해야 했지만, 현실을 납득한 이후로는 10배 이상의 실무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장기요양등급 신청, 보고서 작성, 담당자 설득, 공부, 등급 판정 후 내방하여 등급 심사표 수령, 틈날 때마다 아버님 이사하실 집 알아보기, 부동산에 전화 돌리기, 치노사모 까페 가입, 필요한 리스트 체크하기, CCTV 구입 등등...


나는 그래도 젋고, 이 쪽으로 공부도 하고 있고, 실습도 해 봐서 행정적인 일들을 처리하는데 크게 어렵지 않았다. 그런데 보통은 이런 것들을 5~60대들의 장년층 자식들이 하는데, 너무 복잡하고 고단하지 않을까. 그렇게 따지면 나도 건강하고 오빠도 건강하고, 재정적으로도 큰 어려움이 없는 이 순간에 이런 일이 닥친 게 차라리 낫지 않을까. 그런 생각도 들었다.


아무튼, 집을 구하는 게 정말 힘들었는데 나의 시아버지는 까탈왕이라 우리가 어떤 집을 보여드려도 다 싫다고 하셨다. 탁 트인 전망에, 최소 2층 이상이어야 되고, 아파트가 아닌 사람냄새 나는 주택이어야 하며, 월세가 많지 않고 보증금도 많지 않아야 하는 상황. 방은 최소 2개여야 하고 하나는 넓찍해야 하며 앞뒤가 도로가 아닌 집. 이런 집이 서울에 그 예산에 있을까? 직방과 다방과 피터팬에 올라온 매물들을 빠짐없이 훑다가 아버님께 거절당하고 그로기처럼 누워있던 1달... 아버님은 분명히 본인이 퇴짜를 놓으셨으면서! 전화할 때마다 오빠에게 빨리 이사가고 싶다고 여기는 지옥이라고 짜증을 내셨다! 아버님!!!!!!!!!!!!!!!!!!!!!!!!!!!!!!!!!!!!!!!!!!!1


우리 아빠였으면 백번도 더 싸웠지. 암튼,

오빠는 옛날 같으면 다 포기해버릴만한 상황에서 꾸준하고 묵묵하게 아버님을 달래면서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지옥 속에서도 자신을 위로할 꽃을 찾을 수 있다는 말이 기억나는 순간이었다.

어쨌든 고집의 끝판왕 아버님을 설득할 수 있는 사람으로 오빠가 거듭난다면, 최소한 나에게도 깔깔이를 팔 수 있을 만한 영업왕으로 레벨업하겠지. 아니면 설득킹왕짱이 되어 책을 한 권 써서 그게 베스트셀러 및 스테디셀러가 되어 인세로 푸짐하게 먹고 살 수 있는 삶을 살 수 있게 되지 않을까. 그랬으면 좋겠다.


이 일을 겪으면서 나는 시아버지와 내가 가족이 될 수 있을까. 아버님이 돌아가시면 진심으로 꺼이꺼이 울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나에게 수없이 물었. 나는 아직 그 질문에 답을 찾지 못했다. 나는 내 개인적인 영역이 무엇보다 중요하고, 세상에 나보다 더 중요한 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니까. 그리고 여전히 아버님은 친구 아빠 정도로만 느껴져서 나의 시간과 노력과 정성과 돈을 드려야 하는 이 상황들이 마음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냥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미지근한 온도를 유지하고 싶을 뿐인데 그러기에는 상황이 아스트랄해서 정신적으로 혼란한 상황이랄까.


그런데 며칠 전에, 시아버지 친척 쪽의 장례식에 갔다가 이런 인사를 들었다. 나로서는 먼 관계에 있는 분들이라 사무적으로 웃고 의례적으로 인사하다가 나온 자리였다. 아무런 슬픔도 없고, 아무런 궁금증도 없고, 단순히 예의와 도리만 있는 자리. 참, 어른들이란 이런 자리에서도, 심지어 처음 만난 사람에게도 애를 언제 낳을 거냐고 물어보는구나. 기가 막혔던 자리였는데.

선하고 현명한 며느리를 두 시간 동안 코스프레하다가 나오는 자리에서 이런 말을 들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이 인삿말이 자꾸 기억에 남는다.


"자주 놀러와요, 우리는 이가족이니까"


(물론 자주 놀러갈 생각은 전혀 없고 경조사 때만 보는 관계가 되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일면식도 없는 저 사람들과 이미 가족으로 묶어있구나. 내가 가족이라고 생각하든 아니든 우리는 가족이라는 테두리 안에 있구나. 그건 참 기묘한 느낌이었다. 처음 보는 가족이라니.


아무튼 나의 삶은 전혀 상상할 수 없었던 방향으로 자꾸만 흘러간다. 이미 흘러가는 건 어쩔 수 없으니 끝이라도 (끝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좋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 끝에는 치킨과 삼겹살과 숯불닭갈비, 그리고 로또가 기다리고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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