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친구들은 나보다 똑똑하다
마지막으로 글을 쓴 지 1년이 지났다. 1년 동안 글을 썼다, 지웠다, 그러다 잊어버렸다. 지난 1년 동안의 삶을 한 마디로 말하자면, 바야흐로 싹퉁머리 없는 슈퍼스타의 막내 매니저 느낌이랄까. 나의 스타는 요새 세상의 모든 불행과 악은 다 나에게서 비롯되었다고 믿게 된 것 같다. 처음에는 당황스러웠지만 지금은 그러려니 한다.
하루는 아버님의 집에 가서, 무엇이 부족한지 살펴보던 중이었다. 그러다 안 읽는 책들이 한 가득 꽂혀 있길래, 친해질 요량으로 영어책을 한 권 달라고 해서 집으로 가져왔다. 그리고 또 어느 날, 요양보호사 선생님이 아버님에게 내 칭찬을 했다. 며느리가 참 아버님을 많이 챙기던데요, 기특해요. 그랬더니 아버님 왈.
처음에는 착한 줄 알았더니 아주 못 쓰겠단 말이에요. 착한 며느리면 내가 먹을 거 딱딱 챙겨줘야 하는데 그것도 없고, 와서 돈만 뜯어가고, 아들을 딱 붙잡고 살아서 아들이 기도 못 펴고 산다니까. 아주 몹쓸년이야.
CCTV를 돌려보다가 마음이 탁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우리 집 근처로 모셔오고, 용돈도 드리고, 가스비 때문에 한 겨울에도 가스를 안 쓰시길래 우리 돈으로 가스비 내드리면서 바닥도 따뜻하게 해드리고, 근처 복지관과 연결시켜서 매일 도시락 배달오게 하고, 요양보호사 선생님 오셔서 매일 바둑과 장기를 두실 수 있도록 한 건 난데?! 그리고 제가 언제 아버님 돈을 뜯어갔다고.....? 여태까지 뜯기기만 했는데………?????!
치매는 참 이상하고 고약한 병이어서, 저 사람이 환자라는 것을 시시때때로 잊게 만든다. 아버님은 지금 치매 중기를 막 시작한 시점으로, 본인의 나이와 계절과 날씨에 대한 인식이 흐릿하다. 가끔씩은 용변을 실수하기도 하고, 같이 간 중국 여행에서는 인천 앞 바다를 보고 싶으니 지금 당장 인천에 가자고 조르기도 하시는 정도. 그런데 문제는, 대부분의 시간에서는 정상처럼 보인다는 것. 그냥 평범하디 평범한 90살의 노인 정도로만 보인다. 그래서 저런 말을 들으면 순간적으로 무너진다. 아무런 다짐을 했더라도. 어떤 마음을 먹었을 지라도.
이런 일을 몇 번 겪으면, 아무리 내가 사회복지사라고 해도, 상대방이 아무리 외롭고 쓸쓸하고 병든 노인일지라도, 오빠랑 내가 헤어지면 그 뿐 아닌가! 그럼 나는 자유의 몸이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든다. 나야말로 개호구 아닌가. 내가 왜 이 배 나온 아저씨를 좀 사랑한다는 이유로 세상의 별 욕을 다 들어가면서 살아야 하는지...?
한 번은 구체적으로 플랜을 세워 본 적도 있었다. 우리가 모아둔 재산을 5:5로 나눠, 좋아하는 다른 동네에 가서 원룸 전세를 얻어야지. 여섯시 반에 일어나서 회사를 가고, 퇴근해서 집 근처에서 요가를 하고 간단하게 김치만두를 쪄서 먹고, 가뿐하게 잠이 드는 날들을. 아버님이 또 싸움을 걸어서 놀라고 당황한 집주인 아주머니의 전화를 받지 않아도 되고, 아침마다 걸려오는 요양보호사 선생님을 위로해 주지 않아도 되고, 매달 큰 액수의 용돈을 아버님에게 뺏기듯이 보내지 않아도 되는 삶(!)
이혼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시뮬레이션은 너무나 빠르게 돌아가서 이혼한 후 신규남과 결혼해서 여행 다니며 룰루랄라 사는 삶까지 그려지는데, 그 신규남의 얼굴이 그려지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거기에 해리포터 안경을 끼고 뽀글머리를 한 누군가의 얼굴이 자꾸 끼어들었다.
그렇다면 질문을 다시 해보자. 나는 왜 남편이랑 못 헤어지는 걸까. 내 머릿속에서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대답했다. 이건 오빠 잘못이 아니니까.
나는 위에서 개호구라고 나 스스로를 기술한 바 있다. 나는 이 구역의 미친년 같은 성격이지만 가끔 뜬금없이 호구를 잡힐 때가 있다. 왜냐고 물으신다면 부끄러워서 할 말이 없다. 호구 방지를 위해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설명해 보자면, 내가 스스로 미친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스스로에 대한 검열을 좀 빡세게 하는 편이다. 조금 덜 미친자가 되고 싶어서. 여기서 자칫 삐끗하면, 내가 이상하다고 나를 과하게 몰아가서 호구를 잡히는 것이다. 친구들이 너 도대체 왜 엄한데서 뻘짓하냐고 하면 정말 할 말이 없다.
암튼, 노 모어 호구 라이프를 위해 내가 세운 기준은 다음과 같다.
(1) 상대방이 나를 이용하는가?
(1-1) 상대방이 원하는 바(속내)와 나에게 요청하는 내용이 다른가?
(1-2) 상대방이 원하는 바를 열심히 생각해내서 무언가를 해주고 있는가?
(1-3) 그 경우, 보상이 충분한가? 보상에서 진심이 느껴지는가?
(2) 주변 사람들이 상대방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3) 내가 상대방을 위해 억지로, 비상식적인 무언가를 하고 있는가?
이 질문의 핵심은 3번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무의식에 대한 존경과 충성충성이 있는 종류의 사람이라, 내가 맺고 있는 관계가 비정상적이라면 언젠가 한 번은 마음 속에서 사이렌이 울린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돌아보면 그런 관계일 때, 사이렌은 끊임없이 울렸다. 내가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그랬지….
돌이켜보면 아버님 때문에 내가 억지로 했던 일은 설과 추석에 차례를 지낸 것, 매달 용돈을 드린 것, 그리고 우리 집 근처로 모셔온 것. 내 입장에서 보자면 불공평했지만, 비상식적인 일이라고 하기에는 약간 애매한 일들이었다. 차례는 아버님이 60대만 되셨어도 어떻게 비벼보겠지만 90대 노인과 이걸로 논쟁해서 무엇하랴는 생각이 있었고, 용돈과 집 근처로 모셔온 문제는 언젠가 나에게도 닥칠 수 있는 일이니까.
아버님 문제가 아니라면 우리는 괜찮았다. 그래서 사이렌이 울리지 않았다. 오빠가 바람을 핀 것도 아니고, 도박을 한 것도 아니고, 성매매를 하다 걸린 것도 아니고, 사기를 치거나 성추행을 하거나 누군가를 때린 것도 아니고,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일들을 강요한 것도 아니니까.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헤어질 일까지는 아니지. 싶었다. 오빠는 나에게 행정적인 일들을 부탁했지만 아버님을 직접 케어하는 일은 모두 자기가 했다. 설득하고, 모시고 가서 목욕을 하고, 함께 밥을 먹고, 여행을 가고. 우스갯소리로 나는 사무직, 오빠는 서비스직이라고 하곤 했으니까. 그러면서 조금씩 나아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아버님이 어디 가자는 말만 해도 버럭버럭 화를 내던 오빠가, 능글맞게 웃으면서 다음에 가요, 라고 말하던 사람으로. 이런 날들이 또 지나가고 지나가면 또 좋은 날이 오겠지 생각한다. 좋은 날이라는 단어 안에 숨겨진 말뜻을 생각하면 무섭지만.
어쩌면 지금의 나도 사이렌이 미친듯이 울리는데 모른 척하고 있는 타이밍일 수 있어서 말하기 조심스럽지만, 아무튼 다년간의 호구 경력과 주변 호구 친구들을 보면서 내가 내린 결론은 다음과 같다. 찜찜하다면 일단 의심해 보라는 것.
일단, 마음 속 깊숙한 곳 어딘가에서 이 관계가 근본적으로 이상하다는 음습하고 찜찜한 마음이 든다면 친구들에게 물어보자. 우리의 친구들은 이미 답을 알고 있다. 무릇 친구라면, 이 싹퉁바가지를 데리고 가는 친구의 애인이 그저 가엾고 감사한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의를 제기한다면 80% 정도의 확률로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다는 소리다. 나의 호구사를 돌아보면, 친한 2~3명 이상의 친구들이 지속적으로 힌트를 줬다.
- 걔 좀 이상한데?
- 걔 너한테 왜 그래?
-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무슨 말인가를 하고 싶지만 애써 참는 표정)
- 너…. 괜찮음?
이런 질문을 받을 때 뭔지는 모르겠지만 마음 한 구석에서 짜증이 밀려오면서 반박해야 한다는 기분이 든다면! 그래서 이런 말이 나온다면! 관계를 다시 생각해보는 것을 권장한다.
- 아냐, 그런 거 아니야.
- 니가 몰라서 그렇지, 걔가 얼마나 착한데!
- 니가 오해한 거야, 걔 그런 애 아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