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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과거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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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iiii Jul 30. 2018

놀이터 흙무덤에서 호박을 주웠다.


  지하철 입구에서 아파트 단지로 가는 길, 나무 그늘에는 보자기 천이나 신문지를 자리 삼아 앉아있는 할머니들이 보인다. 부채질을 하거나 고구마 줄기를 다듬는 손길 앞에 몇 개의 채소가 제각각 놓인다. 그 날의 수확을 천 원, 이천 원의 삯으로 주고받는다. 교환의 대가는 마트나 슈퍼에서 보는 채소들과 사뭇 다르다. 몸에 꼭 맞는 비닐옷을 입은 적당한 크기의 애호박이 아니라 명칭도 제대로 알 수 없는 커다란 공 모양의 호박과 커다랗고 흠있는 무가 덩그러니 두 덩이. 버선형의 유려한 곡선을 뽐내는 가지가 아닌 좀 더 투박하고 고꾸라진 모양의 가지, 그리고 조그만 감자들로 이루어진 감자 탑.  


  고모가 최근에 감자 한 상자를 가져오셨다. 직접 키워 수확한 작물은 굉장히 작거나 굉장히 컸다. 구슬만 한 크기부터 손도끼만 한 크기까지. 햇감자는 포슬포슬하게 쪄먹어야 제 맛이라는데 너무 작고 크니 다른 요리법을 알아보기로 한다. 간장 양념으로 조려 만든 감자조림이나 감자채에 밀가루 반죽을 살짝 묻혀 부친 감자전이라든가. 마트의 진열대에서 탈락한 채소들은 곧 다른 요리로 둔갑할 준비를 한다. 


  동생은 호텔에서 하우스일을 하다 가끔 손님들이 쓰다 남은 휴지를 한 가득 가방에 담아온다. 체크아웃 후의 객실에는 어정쩡한 양의 휴지가 걸려있고, 새 손님을 위해서 새 휴지가 그 자리를 차지한다. 그래서 호텔 탕비실에는 쓰다만 휴지가 가득하다고 말했다. 남을 대우한다고 하기에는 모자란 물건들, 가격이 매겨지기에 부족한 물건들은 유통의 궤도를 벗어나 일상을 채운다.



  집주인 할머니와 폐지 줍는 할머니는 친하다. 집 앞 골목에 상자나 플라스틱 등을 내놓으면 할머니는 수레에 상자를 곱게 펴 쌓는다. 집주인 할머니는 지나가는 나에게 폐지처럼 내놓을 것이 있으면 마당 창고에 넣어달라고 말한다. 폐지를 가득 담은 수레는 집주인 할머니 마당 한 켠에 정차한다. 여러 명의 택배를 담당하는 작은 창고 앞이 수레의 자리이다. 수레의 무게는 할머니가 오늘 벗어놓은 수고의 무게처럼 무거워서 나의 힘으로 밀어내기에 역부족이다. 그냥 창고를 지나친다. 택배를 받는 즐거움을 내일로 미룬다 해서 즐거움이 줄어들지는 않는다. 마당에서 할머니들이 떠드는 소리가 창문을 타고 넘어온다. 시원한 보리차 한 잔을 주고 마시며 오늘의 수고를 말한다. 비가 온다. 수레는 창고 안으로 비를 피한다.


  어려서 놀이터에서 하루 종일 놀 적, 아빠는 종종 나와 동생을 따라 나왔다. 아파트 바로 앞에는 놀이터가 하나 있었고, 지금과 달리 그때만 해도 흙이 놀이터의 토대였다. 비가 오는 날이면 놀이터 한가운데 생긴 커다란 물웅덩이에 하나같이 모여 흙을 깊게 파 수로를 만들었다. 흙은 두꺼비의 집이 되기도, 쌀이나 각종 반찬이 되기도 했고, 그 거대한 포장지를 풀어내면 조개나 총알 따위를 선물해주기도 했다. 나와 동생이 흙과 여러 가지 역할을 주고받는 동안, 아빠는 흙 사이사이에 숨겨져 있는 유리조각들을 주웠다. 한 손에는 검정 비닐봉지를 들고 한 손으로는 유리조각을 주웠다. 때때로 베란다 창틀에 팔을 괴고 유리조각을 줍는 아빠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던 것이 기억난다. 아빠에게 왜 유리조각을 줍는지에 대해 물어보지 않았다. 방에는 오십여 권의 그림 위인전집이 있었다. 보랏빛의 책에는 형형색색 알록달록하게 묘사된 유리조각을 줍는 페스탈로치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나는 아빠가 페스탈로치처럼 훌륭한 사람이구나 라고 답했다.


  대학생 때, 틈만 나면 예술대 주변을 서성였다. 버려진 왁구 틀이나 쓸만한 재료들을 줍기 위해서였다. 가끔 뜻밖의 재료를 만나기도 했고, 예쁜 솔방울이나 기다란 나뭇가지를 주워오기도 했다. 내 작업 공간은 여기저기에서 가져온 잡동사니들로 채워져 나를 기쁘게 했다. 졸업 후, 영화 작업을 하면서도 길거리의 물건을 줍는 일은 내 몸의 한 부분이었다. 버려진 물건들에 눈을 거두지 못하는 것은 그것이 나에게는 쓸만한 물건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매일 아파트 분리수거장을 돌아보는 것이 습관이 되어선 빈병이니 커튼이니 낡은 가구를 가지고 들어왔다. 술을 마시고 친구의 집으로 향하던 골목에서 장난감 피아노를 발견했던 것이 기억난다. 동그랗고 낡은 분홍빛을 띄었다. 그렇게 버려진 사물에 애착이 생겨 소품실에 진열된 물건들을 보면 이상한 기운에 휩싸인다. 대여되는 물건들. 어떤 장면을 위해 가져와지고 다시 보내지는 사물들. 그들을 책임지지 못하는 것에 대한 알 수 없는 부채감. 사람의 일상적인 손길에서 벗어난 사물들이 지닌 공기는 다르다. 사물에 혼이 깃들여 있다고 가정한다면 그들은 역사가 순식간에 단절되어 버린 채 다른 시대로 느닷없이 표류하게 된 이와 같아 보였다. 


  초등학교 수학여행을 가서 돌멩이를 주워왔다. 기념의 증거로 삼는다며 '5학년 수학여행'이라고 적는다. 아마도 경주에서 집어온 돌멩이일 것이다. 집에 조그만 수석이 몇 개 있다. 니스로 잘 마감된 커다란 소라 조형물이 있다. 해변에서 주운 소라와 조개껍데기가 있다. 바닷소리가 커다랗게 들린다. 촬영장에서의 필수품이었다. 보조가방에 소라를 넣어놓곤 이 곳을 벗어나고 싶을 때마다 꺼내어 바닷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특히 섬에서 밤 촬영을 할 때 자주 꺼내곤 했다. 온통 바다로 둘러싸여 있던 작은 섬마을이었는데 소라의 바닷소리는 나를 다른 곳으로 데려다주었다. 소라껍데기가 도로시의 마법구두이길 바랐다. 



   티비에서 도토리를 줍는 할머니들을 보았다. 할머니의 파싹 사그라든 살갗과 여러 번 삶아 말린 검고 건조한 도토리는 솥 안의 따끈한 밥을 지어냈다. 생전 듣지도, 보지도 못한 도토리 밥은 검다란 수증기로 뽀얀 쌀알을 대신했다. 주운 것으로 삶을 이어갔다. 주운 것으로 만든 밥은 이제 별미가 되었다고 한다. 없어서 대체한 것은 특색이 되었다. 내가 지금까지 주워온 것이 무엇일지 생각한다. 내게 없기에 길가에서 주워온 우연들이 내 삶을 만들었다. 내게 주어진 것보다 더 큰 작용으로, 앞으로는 더욱 더.


  어둑하니 바람이 선선히 부는 무렵, 분리수거를 하러 나갔다. 익숙하게 폐지와 플라스틱, 캔 등을 차례로 버렸다. 문득 고양이가 보고 싶어 아파트 단지를 서성였다. 어디로 숨었는지 도통 보이지 않았다. 그들이 자주 출몰하는 구역에 고양이 통조림을 놓았다. 고양이가 뽈뽈 지나갔다. 고양이를 주워올 자신이 없어 이튿날 빈 통조림 캔을 주웠다.





<이삭 줍는 사람들과 나(The Gleaners and I)>, 야네스 바르다,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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