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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체실 비치에서(On Chesil Beach)>는 브런치 무비 패스를 통해 관람하였습니다.
시얼샤 로넌을 좋아한다. 그녀의 말간 얼굴이 스크린에 떠오르면 언뜻 메릴 스트립이 떠오르기도, 혹은 케이트 윈슬렛이 지나가기도 한다. 하지만 메릴 스트립과 케이트 윈슬렛이 고전적이면서도 진보적인 여성의 얼굴이라면 시얼샤 로넌은 그 궤를 이어가면서도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옆자리에 위치한다.
그녀가 연기하는 인물들은 한 시기를 거쳐낸다. 그럼으로 우리가 어떤 시기를 거치면서 겪었던 일련의 경험과 감정을 상기시킨다. 강단 있어 보이는 그녀의 얼굴은 세상을 온몸으로 맞서는 이와 같아 보인다. 설사 그것이 한 시기의 치기 어림이었을지라도. 그 인물이 설득력을 얻는 이유의 팔 할은 로넌의 얼굴 덕이었으리라.
부모님의 집을 나와 서울에 방을 구했다. 혼자 살기로 한지 얼마 안 되어 <브루클린>을 집 근처 영화관에서 보았다. 처음으로 내 방을 가진 나는 심야영화를 보러 종종 영화관에 틀어박혔다. 같이 사는 가족의 눈치, 일종의 예의에 구애받지 않고. <브루클린>의 에일리스는 그녀의 고향인 아일랜드를 떠나 이제 막 브루클린에서 자신의 삶을 경작하기 시작한다. 나와 너무나 흡사했던 그녀의 상황은 나를 먹먹하게 만들었다. 난생처음 혼자 살면서 느낀 외로움, 이곳에서 진짜로 나 혼자 살아남아야 한다는 절박함과 그에 걸맞은 전투태세. 그리고 약간의 우울감까지.
에일리스가 이탈리아에서 온 토니를 만나 사랑에 빠지면서 브루클린이 그녀의 '홈'이 되어갈 무렵, 홀어머니 곁을 지키던 언니 로즈가 떠난다. 그리고 그 죽음은 에일리스에게 로즈의 자리를 대체하라고 압박한다. 아일랜드로 돌아온 그녀는 그토록 원하던 번듯한 직장과 괜찮은 집안의 남자, 그리고 죄책감으로 작용했을 홀로 남은 어머니까지 곁에 두게 된다. 그녀는 적당히 만족스럽게 살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안정감과 어느 정도의 균형감을 이루어가면서. 하지만 아일랜드를 떠나기 전 로즈가 에일리스에게 '내가 너의 인생을 사줄 수는 없잖아.'라고 말한 것처럼, 빈자리는 그 누가 앉아도 빈자리임을 영화는 잊지 않는다. 부재를 채우는 역할을 그만두고, 비로소 브루클린을 '홈'이라고 말하는 에일리스는 내내 응시했던 눈을 살며시 감는다. '나의 홈'으로 돌아왔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며.
내 이름은 특별했다. 사람들에게 이름을 소개할 때면, 언제나 '이름이 예쁘시네요.'라는 말을 들었다. 하지만 모두가 특별하다고 생각했던 그 이름이 나에게는 이가 하나 빠진 사물의 이름 같았다. 이름을 쓸 때면 항상 나의 이름 같아 보이지 않을 때가 더 많았다. 쓸 때마다 친숙해지지 않는, 밀접해지지 않는 평생 동안 불렸던 이름. <레이디 버드>의 크리스틴은 이제 갓 성인이 되는 고등학생이다. 그녀는 자신이 특별하다고 말한다. 아니, 특별해지고 싶다. 주어진 이름(given name)을 사용하지 않고 자신의 이름을 만든다. 크리스틴 '레이디 버드' 맥퍼슨.
내가 택할 수 없던 이름과 마찬가지로 태어나보니 가족으로 엮인 엄마와 아빠, 오빠를 그녀는 사랑하지만 탐탁지 않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이 자신을 좋아해 줬으면 좋겠다. 사랑한다는 엄마의 말에 '근데 날 좋아하냐고.' 반문하는 것처럼. 지루한 새크라맨토를 떠나 그토록 원하던 뉴욕으로 날아간 레이디버드는 이제 자신의 이름이 크리스틴이라고 소개한다. 특별해지고 싶었던 그녀가 지극히 평범해지는 순간, 그녀는 '크리스틴'이라는 특별함을 획득한다. 딱 각자의 스무 살을 떠올리게 하면서.
<체실 비치에서>의 플로렌스는 갓 결혼을 한 새 신부. 서로를 사랑한 그들은 신혼여행 첫날 파경에 이르게 된다. 영화는 서로의 서투름과 미묘한 어긋남을 그들의 황홀했던 시절과 교차로 편집해 보여주며 보는 이를 더 안타깝게 만든다. 그리고 노년의 그들이 젊은 시절의 약속을 지켜냈을 때의 눈물은 그들이 떨어져 살아온 세월을 각각 돌아보게 한다. 우리가 그때 이별을 고한 것은 육체의 장애물이 아니었음을, 그저 다르게 살아온 서로를 대하는 방법이 서툴렀던 것이었음을 인정하면서. 영화의 마지막은 흡사 <라라 랜드>를 떠오르게 하지만 감정의 뉘앙스를 풀어놓는 섬세한 감각은 플로렌스가 연주하는 바이올린의 선율로 설득력을 얻는다. 첼로로 시작하는 묵직한 물음과 그에 답하는 바이올린의 협주는 플로렌스와 에드워드의 균열과 대비되며 안녕을 고한다. 그때, 그렇게 하지 못했음에 눈물지으면서.
영화 속 시얼샤 로넌은 급격하게 표정을 바꾸지 않는다. 항상 입을 다문 상태 그대로를 유지한 채,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예측하게 만드는 미묘함으로 감정을 표현한다. 그녀의 시그니쳐는 눈을 커다랗게 뜨고 말갛게 무언가를 응시하는 표정이다. 그리고 그 무언가는 다른 대상이 아니라 그녀 자신을 투과한다. 투명한 청록색의 눈동자는 자신을 응시한 채, 서서히 침투해간다. 어떤 시기가, 인생의 한 시점이 지나는 것을 가만히 바라본다. 자신이 어디에, 어떤 처지에 위치하는지 명확히 아는 자의 눈빛은 신뢰를 자아내기 마련이다. 감정에 솔직하지만 그 감정을 폭발해내거나 휩쓸리지 않는 태도, 그녀의 표정은 그렇게 담담하게 자신의 시간을 빚어낸다. 나의 한 시절을 꺼내놓은 것처럼.
<브루클린(Brooklyn)>, 존 크로울리, 2005
<레이디 버드(Lady Bird)>, 그레타 거윅, 2018
<체실 비치에서(On Chesil Beach)>, 도미닉 쿡,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