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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iiii May 15. 2018

권력의 지층에서 바라는 순전한 동경


  안경을 쓴 Y는 미국 유학을 다녀온 대학원생이었다. 깊은 교류는 아니었지만 짧은 시간 이야기를 나누어본 바로 그녀는 페미니스트였고, 때때로 격한 말을 서슴지 않아서 놀라곤 했다. 잠시 작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시간을 보냈다. 나는 그림을 그리며 한 때를 보내고 있던 그녀의 드로잉북을 뒤적였다. 서로의 다음 행보에 대해 묻다, 그녀가 어느 한 배우에게 매우 빠져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름은 모르겠고, 국적은 북유럽 어딘가였던 걸로 기억한다. Y는 그 배우에 대해 열띠게 말을 이어가다 그를 보러 북유럽에 갈 것이라 했다. 이미 비행기표는 사놓은 상태였고, 어느 식당에 그가 자주 출몰한다는 소리를 들었다며 반색하며 웃었다. 그녀에게 여행의 목적은 온통, 온전히 그였다. 어느 한 배우가 보고 싶다고 무작정 북유럽으로 달려가는 사람, 나는 Y에게 끌렸다.


  연남동의 게스트 하우스에 며칠 머문 적이 있다. 주로 관광 온 외국인을 상대하는 곳이었기 때문인지 한 외국인 여성이 거주하며 관리를 하고 있었다. 낯가림이 심한 그녀는 내가 찾을 때마다 좁은 문틈으로 얼굴을 빼꼼히 내밀었다. 그러다 언제였을까, 부득이한 이유로 그녀의 방에 들어가게 된 것이. 아마도 두 개의 일을 병행하고 있던 그녀는 저녁시간에 다른 일을 하러 나갔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사이 나는 그녀의 공간에 발을 디디게 되었다. 썰렁한 느낌의 공간에 가구라고는 철제로 된 이층 침대 두 개, 단출한 옷걸이 행거 정도였다. 미닫이 문을 벽으로 삼아 꾸민 방은 도로변과 맞닿아있었다. 하지만 정작 놀란 것은 한쪽 벽면에 커다랗게 붙어있는 지드래곤 포스터를 보고 나서다. 나는 문득 지드래곤이 미워졌고, 그녀에게 안쓰러움을 느꼈다.



 '그럴 때면 침대 맡에 걸린 커다란 유노윤호의 사진을 가만히 노려보기도 했다.'


   두 사람에 관한 기억이 떠오른 것은 박민정의 단편 <세실, 주희>를 읽고 난 직후였다. "그래도 윤호 때문만은 아니죠?" "아니, 유노 때문이에요."라고 세실은 답했다. '좋아하는 연예인 하나 때문에 타국에서 외국인 노동자로 살아가는 삶을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주희는 연남동에서의 나를 떠올리게 했다. 주희에게 '대단한 공부 이런 게 아니고 나와 대화해주는 거'를 바라는 세실은 주희에게 돈을 정성껏 쥐어준다. 그녀는 첫 과외시간에 일어난 다툼에도 먼저 화해의 손을 내민다.


  세실에게 유노윤호와 유노윤호가 태어난 한국, 한국어를 모국어로 말하고 쓰는 한국 여자 주희는 나란한 동경의 대상이다. 하지만 그것을 모르는 주희는 세실의 '침대 맡에 걸린 커다란 유노윤호의 사진을 가만히 노려'본다. 문득 지드래곤이 미워진 나도 그렇다. 느닷없이 유노윤호와 지드래곤이 눈총 받이가 된 것은 내가 게스트하우스의 관리인에게 느낀 안쓰러움과 주희가 세실에게 느낀 감정이 같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나와 주희가 동경의 대상이 갖는 권력을 차마 눈치채지 못했기 때문에 가능한 감정일지 모른다. 나는 지드래곤을 좋아하지만 그 벽면에 붙어있는 지드래곤이 미웠다. 어째서? 지드래곤이 속해있는 케이팝이라는 문화, 그들을 동경하게 만드는 문화가 사람의 생계 또한 바꾸어 놓는다는 것에, 그만한 영향력에 자신의 인생을 결정해버리는 행위가, 그렇게 동경을 기반으로 하는 권력이 참 미웠다. 이런 생각 따위가 지드래곤과 유노윤호로 상징된 일련의 시스템을 꿰어낸다. 하지만 이것은 죄다 하찮은 변명일 뿐이라는 것을 곧, Y와 J에게서 깨닫는다.



'나도 너처럼, 주희가 여행 내내 가장 많이 했던 생각이었다.'


   주희는 J와 함께 뉴올리언스를 여행한다. 아니 함께라기보다 따라서. 어린 시절을 뉴올리언스에서 보낸 J를 주희는 '따라다니기만 하면 되었다.' 아무런 거리낌 없이 처음 본 이들에게 '친구'라고 부르고 웃고 떠드는 J 옆을 주희는 엄마를 따라온 아이처럼 앉아있을 뿐이다. 주희는 뉴올리언스의 마르디 그라에 대해서, 허리케인에 대해서도 알지 못한다. 그녀의 무지는 '문법에 맞지 않게 말할까 봐 매번 신경을 곤두세'우게 하고, 눈치를 보게 만든다. '쳐다봐주지 않는 J만 애타게 바라보면서.'


  주희는 '그녀가 아니었다면 미국 여행은 꿈꿔볼 수 없었으므로 불만을 털어놓을 수 없'다. 펍의 뒷골목에서 마르디 그라가 정확히 무엇인지도 모른 채 남자들에게 둘러싸인다. 'yeslut'이라는 포르노 사이트에 자신이 박제되어있는 것을 보고 나서야 어떤 일을 당했는지 어렴풋이 알 뿐이다. '동경'이라는 단어는 그 자체로 위계를 함의한다. 누군가 혹은 무엇을 동경한다는 것은 동경의 대상을 내 머리보다 훨씬 높은 곳에 올려두는 행위다. 그래서 주희는 J에게 왜 자신을 뒷골목 한가운데 놓고 없어져버렸는지에 대해 묻지 못한다. '주희는 평소처럼 고개를 끄덕였던 그때의 자신을 깊이 저주'하고 J에게 아무 말도 묻지 못한 채 곧 소원해진다.


  '주희가 'yeslut' 운영자의 이메일 주소를 알아내 메일을 쓰기로 마음먹었을 때, 세실에게 네 번째 작문 숙제가 주어'진 것은 J와 주희, 그리고 세실로 이어지는 동경의 연결고리를 구축한다. '코리아 뷰티의 상징 중에서도 상징인 명동 쥬쥬 하우스의 매니저라는 자부심 끝에 그 여행의 기억이 불쑥 떠올라 괴로'운 주희는 동경이라는 권력을 지님에 대해 자랑스러워하는 주체인 동시에 동경이라는 권력에 다친 객체이다. 세실과 길을 걷다 만나는 남자들이 주희의 눈에는 '하나같이 가난하고 초라해' 보인다. 하지만 '주희는 이런 생각이 자신을 더욱 초라한 사람으로 만든다는 것'을 깨닫고, 곧 '불쾌'함을 느낀다. 주체와 객체의 사이에서 모순된 감정을 느끼는 주희는 세실의 감정이 자신이 J에게 느꼈던 감정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자각한다. 

  


  내가 Y에 대해 멋지다고 느낀 것은 과연 순전한 동경 때문이었을까. 그녀가 만약 제 3세계의 배우를 보러 가겠다고 했다면? 그전에 그녀가 국내 유명 아이돌의 팬이었다는 사실을 말했을 때 나는 그녀가 멋지다고 생각했었나. 제 3세계에 봉사를 하러 가는 것이 아닌, 누군가를 동경해 그곳에 가겠다 했다면? 혹은 그녀가 소위 외국물이 묻은 사람이 아니었다면? 아니 이런 말도 안 되는 가정을 제쳐두고 Y가 멋있어 보였던 행위가 왜 게스트하우스의 관리인에게는 안쓰러운 감정으로 바뀌는 것인가. 이 모순에 대해, 권력의 구도들은 어디서나 도처에 빈번하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그렇다면 오랜 시간 축적된 이 권력의 지층에서 순전한 동경이라는 게 가능할까.


  나는 게스트하우스 관리인의 이름이 기억나지 않으며 국적도 알지 못한다. Y와 이름조차 잊은 스태프에 대한 정보량의 차이는 순전히 관심의 정도에서 기인한다. 흥미를 가질 수 있는 대상, 나는 어쩌면 동경할 수 있는 것에만 흥미를 가져왔는지도 모르겠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녀에게 갖는 감정이 무엇인지 더 빨리 알아차릴 수 있었을 텐데. 마냥 그녀의 삶을 안타깝다고 빠르게 재단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삶을 다른 시야로 바라볼 수 있었을 텐데. 하지만 그렇다면 내가 어떤 감정을 느껴야 하는지에 대해선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나는 내가 그동안 동경해왔던 것들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세실, 주희>, 박민정, 2018

*표지 이미지 : <The sun is longing for the sea>, Hiroshi Yamazaki, 1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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