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아빠가 돌아가신 지 일 년이 되는 날이었다. 추모예배를 드린다기에 떡을 맞춰 오전에 집으로 향했다. 집을 찾아온 이들의 손에 떡을 들리고, 아빠 사진 앞에 떡 두 개와 감 하나를 올려두었다. 방 한 켠에 자리한 아빠의 사진 앞을 아무도 다녀가지 않았다. 단지 고모가 올린 꽃다발의 향만이 방 안을 커다랗게 메웠다. 예배를 드리는 풍경을 가만히 바라보자니 문득, 오늘 모인 이들이 하나같이 남아있는 엄마를 위해 자리했다는 생각에 아빠에게 미안해졌다. 그래서 아빠와 아빠 사진 앞에서 떨리던 고모의 어깨를 번갈아 바라보며 울었다. 아무도 아빠의 생과 죽음에 대해 기억하고 있는 것 같지 않아서.
“너, 내가 죽어도 제사 안 지낼 거지?” 아마 밖이었을 것이다. 나란히 산책을 하던 중, 아빠는 갑자기 그런 소리를 했다. 고등학생 혹은 대학에 갓 들어갔을 무렵이었다. “응, 무슨 제사야. 안 지내.” 어렸을 적 교회를 다녀서 제사와 안 친했던 탓인가, 아니 그보다 내가 정이 없어서, 생각이 짧아서였겠지. ‘죽으면 죽은 거지, 무슨 제사? 뭐 벌써 제사를 지내 달래?’라는 생각에 퉁명스럽게 답했다. 아빠는 철없는 딸의 말을 듣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 당신이 없어도 나를 기억해달라고 말했던 것일 텐데. 왜 그것을 알아채지 못했을까. 섭섭했을 것이다. 나는 왜 빈말이라도 살갑지 못했을까.
엄마와 나의 관계도 살갑지는 않았다. 다정한 말로 애정을 표하는 것이 어색해 “그럼, 나 죽고 하루 뒤에 죽어.”라고 뒤틀린 말을 가끔 했다. 어느 정도의 진담이 섞인 말이긴 했지만, 엄마는 항상 못 들을 말을 들었다는 표정으로 소스라치게 놀라곤 했다. “엄마한테 할 말, 안 할 말이 따로 있지.”라고 큰 소리를 치면서. 엄마 없이 살아가는 나날을 상상할 수 없었고, 상상하고 싶지도 않았으므로. 그래서 할 수 있었던 말이었다.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죽음과도 살갑지 못했다.
이번 해 가을에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죽음과 겨우 거리를 둘 수 있을 쯤, 일 년이 조금 못 되는 시간이 흐른 후였다. 그동안 약 여덟 달을 나는 엄마 옆에 있었다. 반쯤 도망치듯 집을 나온 후에는 홀로 남은 엄마가 어떻게 되지 않을까 싶어 매일 아침저녁으로 전화를 했다. 휴대폰으로 연결이 안 될 때면, 집으로 회사로 전화를 해야 했다. 뒤늦게 듣게 된 목소리는 바빴다고 말했다. 설거지를 하고 있거나, 일을 하고 있다고, 가끔은 티비를 보는데 무음으로 해놓아서 못 들었다고 했다. 엄마가 진짜를 말하고 있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저 일상적인 일들이 곧이곧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뒤통수를 맞은 것처럼 얼떨결에 당한 아빠의 죽음은 상상 가지 않던 엄마의 죽음도 곧 눈에 선하게 만들었다. 그 후의 고통은 참을 수 없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했다.
할머니의 장례는 큰 일 없이 무탈하게 지나갔다. 예감하고 있던 죽음이었다. 나는 그저 그 자리에 없는 아빠를 보았고, 그래서 슬펐다. 먼저 가 있는 아빠 앞을 스쳐 지나가는 할머니를 보았다. 크게 정 붙이지 않은 할머니의 죽음이었지만 진이 빠졌다. 앞으로 나는 또 누구의 장례를 치르게 될까 생각했다. 생각의 종착역은 엄마의 죽음이었다. 제일 힘들어하게 될 죽음, 그래서 피하고 싶었던 것. 그리고 문득 ‘엄마의 장례는 내가 치르고 죽어야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죽음 앞에 시간도, 순서도 존재하지 않음을 실감한 후, 죽음에 대한 소망이 생겼다면 엄마가 죽고 난 후, 내가 죽는 것이다. 내가 끝내 해야 할 일은 엄마의 장례를 치르는 일이 아닐까 생각했다. 엄마에게 더 이상 부재로 인한 슬픔을 만들어주고 싶지 않았다. 이미 그녀에게 그 슬픔은 충분하지 않나. 다른 이로 인한 슬픔은 어찌할 수 없지만, 나로 인한 슬픔은 주지 않을 수 있다면 주고 싶지 않았다.
예배가 끝나고 아빠를 보러 갔다. 작년에도 칼처럼 불었던 바람은 일 년이 지나도 그대로였다. 아빠가 계신 곳에 들어서니 입김을 내뿜던 한기가 예전보다 더 짙은 꽃향기로 대체되었다. 웬일인지 사람이 많았다. 명절도 아니고, 딱히 의미가 있는 날도 아니었다. 발 디딜 틈이 없어 복도에 멍청이 서 있다가 엄마와 눈이 마주쳤다. 그렇다. 이 시기에 돌아가신 분들이 순서대로 안치되기 때문이다. 비슷한 날에 일 주년이 된 사람들과 일 년 동안 남겨진 사람들이었다. 모두 일 년 전의 이맘때를 생각하고 있을까. 오고 가는 사람들의 발길 사이에서 우리는 모두 뭉덩이로, 하나의 기류가 되었다.
하룻밤을 머물고 집을 떠나기 전에 아빠의 사진을 다시 보았다. 쑥스러운 듯 희미한 웃음을 띤 아빠의 모습은 여전했다. 그 앞에 놓인 꽃다발은 향긋한 향을 내뿜고 있었지만, 하루가 지난 떡은 그새 딱딱하게 굳어 빚은 손길 그대로의 모양을 띠었다. 죽음을 우습게 여겼다. ‘사람이 죽으면 끝이지.’라고 너무 얕잡아 봤던 것이다. 남은 사람으로 죽음을 챙기는 일을 생각하지 못했다. 나는 바라보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각기 다른 것들이 각자의 속도대로 머물러 있는 그 공간을 가만히.
* 표지 이미지 : <세 가지 색 : 블루(Three Colors: Blue)>, 크쥐시토프 키에슬로프스키, 19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