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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과거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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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iiii Jul 12. 2020

Barefoot


  철썩이는 파도소리가 들렸다. 푸른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발에 나지막이 채이는 바닷물이 즐겁게 간지러웠다. 아빠는 내 손을 잡고 턱에 바다가 넘실넘실할 때까지 멀리 걸어 나갔다. 무릎길이의 원피스 끝자락이 물에 닿을 쯤부터 초조해졌다. 서서히 바다가 내 몸 덩이를 먹어갔다. 안간힘을 써 까치발을 들었다. 얼굴이 잠기는 것이, 발이 땅에 닿지 않는 것이 두려웠다. 사라질 것만 같아 아빠의 손을 꽉 잡았다. 바다에서 올려다본 아빠는 하늘과 나란히 존재했다. 하늘색 티셔츠를 입은 아빠는 꼭 파랗게 즐거워 보였다. 나를 물에 빠뜨렸다 뺐다를 반복했다. 하늘하늘한 하얀 원피스와 빨간 리본의 밀짚모자로 바캉스 패션을 완성한 나는 곧 울상이 되었다.   

   

  젖은 맨발로 바닥을 밟으며 바닷가를 나왔다. 곧장 노란 샌들을 챙겨 신고 칸쵸를 한 입 베어 물었다. 바삭하고 달다. 아빠는 카메라를 들고 샌들을 벗으라고 말했다. 조약돌 모양의 초코 과자는 달디달아서 의문을 품을 것도 없는데, 아빠의 말에 고개가 갸웃하다. 옛 앨범을 뒤적일 때면 아빠가 당시 찍은 사진이 그렇게 의아할 수 없었다. 나는 맨발의 정자세로 가만히 서서 어딜 쳐다보는지도 알 수 없고, 옆에는 내가 벗어놓은 샌들이 가지런히 놓여있다. 둘을 병렬로 찍은 구도가 희한하다고 느꼈다. 아빠가 찍은 사진은 못 찍었지만 인장을 새겨놓은 것처럼 특이했다.



  물의 허공에서 갈피를 잃은 발이 매달릴 수 있는 대상은 아빠의 손밖에 없었다. 안간힘을 다해 팔을 뻗었다. 그 날부터였는지 모르겠다. 아빠의 손이 버팀목이 된 것은. 구부러진 골목길에서 아빠가 나타나길 쭈그려 앉아 기다렸다. 커다란 안경을 쓴 젊은 아빠는 한 손을 번쩍 들며 반가움을 표했다. 달려가서 맞잡은 손은 항상 덥도록 따뜻했다. 차가운 맨발을 손으로 꾸욱 데워주곤 했다. 얼음장 같던 작은 두 발은 금세 온기를 얻는다. 그에 반해 두텁고, 굳은살이 잔뜩 배긴 납작한 맨발. 아빠는 그 발로 땅을 지탱했다.    

  

  언젠가부터 발뒤꿈치가 나무껍질처럼 갈라져있다. 뒤꿈치를 보들보들하게 만들고 싶었지만 신경 쓸 재간이 없어 실패했다. 수많은 각질들이 단단하게 굳어갔고, 꼭 그만큼의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이제 점점 두터워지는 맨발의 굳은살은 나의 몫이 되었다. 갈 곳 잃은 발이 땅에 붙들리는 중력의 감각에서, 바닥에 붙어있는 안정감에서 평온함을 느꼈던 나는 불현듯 두렵다. 발을 디딜 공간은 사라졌다. 이제 누구의 손을 의지해 발을 뗄 수 있는 거지?       



  이런 불안함과 어떻게 할 수 없는 감정들이 섞여 올 때마다 강물에 잠기는 버지니아 울프가 떠오른다. 재킷에 돌을 묵직이 넣고 물아래로 가라앉는 그녀가. 부력을 거스르기 위해 가득 담은 돌들이. 그 순간 그녀에게 유일한 버팀목은 그 무겁고 무거운 돌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자신을 가라앉게 해 줄 유일한 것. 항상 아빠의 손이 그리웠는데 오늘은 아빠의 납작하고 두꺼운 발이 보고 싶다. 착륙하고 싶다.     





* 표지 이미지: <디 아워스(The Hours)>, 스티븐 달드리,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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