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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정란 Aug 24. 2022

2평짜리 고시원을 보고 첫눈에 반한 이유

내 인생의 첫 실패

엄마와 동생은 울면서 고속버스를 타고 창원 집으로 내려갔고, 나는 홍대 앞 2 평 남짓 고시원에서 웃으며 잠들었다. 나도 내가 실패를 이렇게나 빠르게 받아들일지 몰랐다. 20년 살면서 겪은 사건 중 가장 큰 실패이자 첫 실패였다.


공부보다 그림이 더 좋았던 나에게도 고3의 시간은 왔다. 내 그림 실력이면 어느 대학이든 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미술학원에서 그림은 늘 1등이었으니까. 나의 자만은 학원의 선생님과 주변 친구들의 칭찬에서 비롯되었을까? 칭찬도 너무 많이 들으면 독이 될 수 있다는 걸 그때 알게 됐다.


실기 시험날 석고상 정면 나오면
무조건 떨어진다.


당시 미대를 준비하는 학생이라면 한 번쯤 들어본 소문.. 내가 그 무서운 소문의 주인공이 되었다. 미대를 지원하면 수능을 본 한 달 후부터 실기시험이 가/나/다군 차례로 진행된다. 어떤 석고상이 출제될지는 당일에 알 수 있다. 교실마다 석고상 하나를 둘러싸고 8명 정도가 앉아서 그림을 그린다. 자리도 현장 추첨이다.


나의 운명은? 가군 아그리파 정면 당첨, 나군 줄리앙 정면 당첨, 다군 아리아스 정면 당첨! 이게 무슨 운명의 장난이란 말인가. 내가 이렇게나 운이 없는 사람이었나. 석고상의 정면 얼굴은 원근감 내기가 힘들다. 아무리 잘 그려도 잘 그려 보이기가 쉽지 않은 자리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측면이나 반측면 자리에서 보고 그린 사람보다 합격할 확률이 낮다. 그때는 운을 탓했지만 지금은 알고 있다. 내가 그만큼 실력이 안되니 떨어진 것이다. 석고상 정면을 그리고도 합격한 사람이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무조건 떨어질 자리라면 추첨에서 그 자리 자체를 빼지 않았을까.


나는 그렇게 3개 대학에 모두 떨어졌다.

믿을 수 없었다. 한 번도 상상한 적 없는 시련이었다. 아니 사실 3개 대학에 다 붙을 거라 생각했다. 석고상의 정면과 마주하기 전까지만 해도..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주변의 칭찬을 받거나 작은 성공을 이뤘을 때 '공포의 재수 시절'을 떠올리며 '자만은 금물'을 마음속에 되뇐다. 자만은 정말이지 해롭다.


엄마 나  당장 서울 갈래

마지막 다군의 불합격 결과가 나오자마자 엄마에게 한 말이다. 여기저기 친구들의 합격 소식이 들리니 마음을 다잡기가 쉽지 않았다. 소식을 차단할 수 있는 곳으로 가서 하루라도 빨리 다시 시작하고 싶었다. 졸업식도 하지 않고 서울로 올라왔다.


미술학원은 이미 홍대 앞 학원들 중 하나로 정했고, 그 거리 중심에 '서정학원'이라는 재수생을 위한 입시 학원이 있었다. 아침에는 그 학원에서 수업을 듣고, 오후에는 미술학원을 가는 스케줄로 정했다. 그리고 딱히 큰 고민 없이 학원에서 제일 가까운 고시원에 방을 보러 갔다.


2평 남짓한 사이즈의 창문 없는 방이었는데 첫눈에 여기다 싶었다.


살면서 그렇게 생긴 방은 처음 봤다. 옆으로 돌아 눕기도 힘든 아주 좁은 1인용 침대. 그리고 그 침대 위를 지나가는 책상. 와 공간을 이렇게도 활용하는구나 싶었다. 창문도 없었다. 자물쇠만 없지 흡사 감옥인데 나는 왜 거기가 그렇게 안락해 보였던 걸까. 함께 왔던 엄마와 여동생은 많이 놀랬던 것 같다. 물론 나도 충격이긴 했지만 내게는 그 공간이 혼자만 있을 수 있는 도피처였다. 그리고 스스로를 극한으로 내몰아서 하나에만 집중할 수 있게 해주는 원동력이 되는 공간이기도 했다.


옷, 신발, 가방, 패션 아이템은 가릴 것 없이 좋아했고 나를 꾸미는 일에 정말로 부지런한 아이였다. 그런 나에게 다가온 첫 실패는 내 안의 독함 지수를 테스트해보는 계기가 됐다. 일단 옷을 신경 쓰는 시간을 없애야 할 것 같아서 트레이닝 상하의 세트를 컬러별로 5벌 샀다. 그리고 요일별로 돌아가며 입었다. 매일 똑같은 옷을 입을 수는 없다는 나름의 철칙은 있었나 보다.


상콤하게 잘랐던 앞머리가 자꾸 눈을 찌르기 시작해서 헤어밴드도 컬러별로 몇 개를 샀다. 그렇게 1년을 앞머리 신경을 쓰지 않고 살았더니 한 번도 탈출하지 못했던 앞머리 거지존을 재수 때 탈출했다. 앞머리가 있어 본 여자라면 공감할 것이다. 자를 땐 마음대로 잘랐지만 인내하며 기를 수 없다는 것을... 광대와 볼 사이 그 어디쯤 되는 거지존 탈출로 나의 독함 지수 레벨은 증명되었다.


점심시간에는 고시원에 가서 밥을 먹고 다시 학원으로 갔다. 고시원 공용 주방 밥통엔 늘 무료 쌀밥이 있어서 한 그릇 떠서 내 방으로 갔다. 엄마가 보내주신 장조림과 일미 반찬을 꺼내서 먹었다. 용돈을 아끼기 위함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빨리 먹고 빨리 공부하기 위해서였다.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가혹하리만큼 한정적이었다. 1년 안에 내가 실패자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야 했고, 믿어주는 가족들에게도 보답하고 싶었다.  


저녁에는 미술학원에서 그림을 그렸고, 고시원에서 밤 12시까지 인터넷 강의를 보다 잠들었다. 새벽 4시에 일어나서 아침 학원 문 열 때까지 고시원 방에서 공부했다. 혼자서 그렇게 지내다 보니 우울한 감정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다행히 그때쯤 창문이 있는 고시원으로 옮겼다. 그 또한 정말 작은 방인데도 감사했다.


요령은 사치였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한정된 시간 안에 죽어라 노력하는 것 밖에 없었다. 결국 합격했다. 1년 전 나는 운이 없어 3개 대학에서 다 떨어졌다고 스스로를 위로했었다. 그렇다면 이번 합격 또한 운도 따라줬을 거라 인정했다.


믿고 기다려 준 가족들에게 소식을 전했다. 죽어도 여한이 없을 정도로 행복했다. 우리 딸, 우리 언니, 우리 큰누나 서울 간다고, 서울에서 공부하는 대학생이라고 늘 그렇게 나를 자랑스럽게 생각해 주었던 우리 가족. 가족은 내게 인생의 버팀목이다. 그때 내가 첫눈에 반한 그 고시원에 나만 남겨두고 등 떠밀려 내려간 엄마와 동생은 창원 가는 버스 안에서 내도록 울었다고 한다.


지낼 곳만 우선 알아보자며 올라왔던 건데, 고시원을 보는 순간 '엄마 나 그냥 오늘부터 여기서 지낼게'라는 딸. 당시 엄마는 '내 딸이지만 참 독하다'라고 생각하셨다며 나중에 얘기해주셨다. 그렇게 아무 짐도 없이 몸만 올라와서는 무슨 배짱으로 그런 말을 했는지 모르겠다. 엄마는 그때도 나를 믿는다고 알아서 잘할 거라고 하시고 내려가셨다. 그리고 그렇게 내가 없는 곳에서 눈물을 흘리셨다고 한다.


금수저가 아니었기에, 더 성공하고 싶었다. 무엇이 나를 그렇게 간절하게 만들었을까? 그땐 단순히 성공해서 돈을 많이 벌고 싶다는 생각이었던 것 같다. 성공이란 게 뭔지 궁금했다. 도전하고 부딪히고 노력하는 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요령도 전략도 없었다. 당시의 나는 그랬다.


서른아홉. 벌써 19년이다. 창원 촌년은 서울에서 많은 도전을 했다. 도전을 즐기는 나를 보고 지인들은 두렵지 않은지 물었다. 그럴 때마다 항상 의연하게 대답했던 것 같다. 고백하자면 사실은 두렵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런 척했을 뿐이다. 그 연출이 반복되니 진짜 두렵지 않은 것처럼 도전할 수 있는 힘이 생겼다.


첫 실패 후 19년 동안 또 많은 실패가 있었다. 앞으로 브런치에 도전-실패 경험의 무한 반복 스토리를 하나씩 기록해 보겠다. 이렇게 글 쓰기를 시작하는 것도 큰 도전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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