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3월 4일,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세 시간 만에 전세 계약을 했다. 잠깐 공백이 있었고, 3월 31일에 드디어 입주하여 첫날을 맞이했다.
기다리는 동안 시골 생활에 필요한 물건들을 준비했다. 20여 년 살림 덕에 여유 있는 물건들이 많아, 서울집에 있는 것들을 나눴다. 수저, 머그컵, 조리도구, 도마, 쟁반, 커피포트, 냄비 두 개, 이불, 요, 커튼, 쿠션 등을 몇 차례 나눠 택배로 보냈다. 다이소에서 밥공기 3개, 국그릇 3개, 접시 3개, 프라이팬, 소소한 주방 소품들을 장만했다. 이로써 자고 먹고 지내는 데에 충분한 준비가 완료되었다.
이 과정에서 문득, 신혼 초 일본에서 첫 살림살이를 장만하던 시절이 떠올랐다. 자그마한 원룸에서, 근처 마트에서 장 보듯 구입한 수저 두 벌과 밥공기, 대접, 냄비로 시작했던 신혼살림.
다이소와 도쿄 외곽의 동네 마트가 오버랩되었다. 초라하고 부족하다는 생각보다, 셀렘과 기대, 흐뭇함으로 충만했던 행복한 시기였다. 그때와 지금이 참 많이 닮아있었다.
입주를 기다리며 가장 먼저 장만했던 소품은 풍경이었다. 정호승 시인의 시 '풍경 달다'를 읽고
시골에 집을 장만하면 풍경부터 달아놓으리라 다짐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운주사 와불님을 뵙고
돌아오는 길에
그대 가슴의 처마 끝에
풍경을 달고 돌아왔다
먼 데서 바람 불어와
풍경소리 들리면
보고 싶은 내 마음이
찾아간 줄 알아라
시골집에서 첫날 저녁, 어스름이 내리고, 서쪽으로 넘어가는 노을과 고요한 가운데 울려 퍼지는 맑고 청량한 풍경소리가 어찌나 아름답던지,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양귀자님의 소설 '모순'에 이런 문장이 있다.
"해질 녘에는 절대 낯선 길에서 헤매면 안 돼. 그러다 하늘이 저쪽부터 푸른색으로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면 말로 설명할 수 없을 만큼 가슴이 아프거든. 가슴만 아픈 게 아냐. 왜 그렇게 눈물이 쏟아지는지 몰라.
안진진, 환한 낮이 가고 어두운 밤이 오는 그 중간 시간에 하늘을 떠도는 쌉싸름한 냄새를 혹시 맡아본 적 있니? 낮도 아니고 밤도 아닌 그 시간, 주위는 푸른 어둠에 물들고, 쌉싸름한 집 냄새는 어디선가
풍겨오고."
노을을 바라보고 있으면, 하늘을 떠도는 쌉싸름한 냄새에 휩싸여 마음이 아려오며 설명할 수 없는 감정에 사로잡힌다. 어스름 속 한줄기 바람이 불어오면, 내가 바람인지 바람이 나인지 모를 때가 있다.
이 집에서 가장 사랑하는 공간과 시간이다.
처음에는 짐을 늘리지 않기로 결심했었다. 하지만 3년이 지난 지금,
어느새 3톤 트럭 분량의 짐이 쌓여있다. 짐을 들이는 것과 마음속에 정을 쌓는 것은 어쩌면 비슷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텅 빈 집에
필요한 물건을 하나 둘 장만하여 짐이 쌓여가듯, 처음엔 의도하지 않았던 정들이 마음속에 켜켜이 쌓여
묵직한 인연으로 남는 것처럼 말이다. 반대로, 물건들이 가득 찬 화려한 집이 버거워 불필요한 짐을
정리하듯, 내가 만든 허상의 상대를 천천히 마음속에서 내려놓거나 정을 거두어야 할 때도 있는 법이다.
이제는 꼭 필요한 짐 외에는 늘리지 않기로 다짐한다. 흘러가는 인연 속에서, 내가 만든 가면을 상대에게 씌우지 않고 억지로 소유하려 고집부리지 않기로 한다.
이로써 전원주택에서 지낼 세간살이 준비를 십여만 원으로 마쳤다.
첫날을 보내고 둘째 날 아침 일찍 양평 시내 철물점으로 달려가 밭을 갈 호미와 괭이를 샀다. 텃밭에 심을 채소 모종도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