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심있는 알바생
40대 직장인이 찾는 십대 알바생의 소명감
무엇이든 처음이 제일 어렵다. 취미도 그렇고 일도 그렇다. 익숙해져야 요령도 생기고 꾀도 부릴 수 있다. 나의 첫 아르바이트 경험은 요령도 없고 꾀도 없어 너무 어려웠다. 생애 첫 알바는 캐쥬얼 브랜드 의류 매장 관리직이었다. 손님들에게 다가가 도움이 필요하냐며 묻고 대응해준다. 고객을 피팅룸까지 안내도 해주고, 그들이 헤집어 놓고 떠난 상품을 정리하기도 하는 등의 다양한 업무다. 학교 때문에 주말에 하루 10시간 정도 근무했었다. 페이도 나쁘지 않았고 슬렁슬렁 만만해 보였다. 하지만, 세상 모든 일이 그렇듯 보이는 만큼 쉽지는 않았다.
감사한 부모님 덕분에 어린 시절부터 노력없이 받던 돈. 이제 내 노동에 대한 대가로 돈을 버는게 신기했으나 거대한 책임감이라는 대가가 있었다. 10시간 내내 큰 매장을 계속 배회하며 헝클어진 티셔츠 한 장이라도 놓치진 않았는지, 바닥에 딩굴러다니는 먼지는 없는지, 도움이 필요한 고객은 없는지, 피팅룸에 기다리는 고객이 없는지, 재고주문이 필요한지 등등 내가 아니면 매장이 돌아가지 못하는 것처럼 최선을 다했다. 앉고 싶은 마음이 올라오면 매장에서의 내 시간은 내 것이 아니라는 생각에 참았다. 감히 편히 앉는다는 것이 죄스러웠다.
역시나 이런 과도한 의무감은 오래가지 못했다. 틈틈히 쉬는 것 또한 업무를 충실히 하기 위한 과정이고, 할 일 없이 안절부절 매장을 돌아다닌다고 알아주는 사람이 있지도 않을 뿐더러 회사 매출에 도움을 주는 것도 아니라는 걸 몰랐다. 오로지 내 시간은 온전히 알바비 지불자의 것이라는 중압감에 자신을 매몰시켰다. 결국 나는 두 달을 못채우고 나의 첫 매장일을 그만뒀다.
두 번째 알바는 네일숍에서 손발톱을 다듬어주는 일이었다. 지금은 한국에서도 흔히 볼 수 있으나 네일아트가 한국에 보편적으로 인기를 얻은 것은 20년이 채 되지 않는다. 1990년대 후반 미국 네일숍은 대부분 손재주 좋은 한인들이 운영했다. 무작정 동네에 있는 네일숍에 들어가 나도 한국인인데 알바생 구하시지 않냐고 물어봤고 마침 사장님이 손이 부족했던 터라 나는 그곳에서 바로 일을 시작할 수 있었다.
난생 처음 보는 네일숍은 신세계였다. 메니큐어 색상만 수십가지. 같은 빨강 파랑이어도 아주 미묘한 색감 또는 질감 차이로 여러 종류가 있었다. 그야말로 아트다. 더 놀라운 것은 수십 명의 단골손님들이 네일관리를 받으러 조그만 동네숍에 매주 온다는 것이다. 그들에게 네일 관리를 받는 것은 단순히 치장하기 위함이 아닌 힐링을 위한 놀이와 같았다. 네일숍 사장님과 고객들과의 관계는 업주와 손님의 비즈니스 관계가 아닌 명절마다 선물을 주고받고 가끔씩 간식도 챙겨주며 정기적으로 만나는 친구 사이 같았다.
기본 네일관리는 손마사지부터 손톱 주변정리, 손톱 모양잡기, 베이스코팅-본 메니큐어-탑코팅 바르기, 건조까지를 포함한다. 가짜 손톱을 붙이는 아크릴 작업도 있는데, 그건 난이도가 높아 네일아트 초보인 나는 기본 관리만 했다. 약 일주일 정도는 잡일을 하면서 전문가 언니들에게 네일아트 트레이닝을 받았다. 메니큐어를 바르는 게 보기에는 쉬워보여도 걸죽한 액체가 떡지지 않고 손톱에 얇고 빠르게 발라져야 본연의 색과 발광이 예쁘게 구현되므로 상당히 긴장되는 일이었다. 고객으로부터 콤플레인이 들어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사실 제일 힘든 것은 페디큐어(발) 부분이었다. 내 발을 닦는 것도 그리 유쾌한 일은 아닌데, 태어나 처음으로 냄새 나는 남의 발을 닦이고 마사지를 하고 발톱을 자르는 것이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깎다보면 발톱이 눈에 들어가기도 하고 가루가 얼굴로 튀는 경우도 있었다. 힘들 때마다 네일숍에서의 내 시간은 내 것이 아니라고 대뇌였다. 모든 고객들의 발은 그냥 발이 아니라 숍에서의 내 시간과 내 존재의 이유인 것이었다. 네일숍 알바는 적어도 앉아서 일했으며, 페이도 높았고 무엇보다 사장님이 너무 잘 대해 주셔서 총 6개월 정도 일했던 것 같다. 네일숍 경험은 이제 고2 시절의 유쾌하고 잼있는 추억이 됐다.
나는 네일숍 이후에도 도서관, 복권가게, 문방구, 세탁소, 파티출장 스시셰프 보조, 요구르트 가게, 샌드위치 가게 등에서 다양한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러는 사이 하루 10시간을 한번도 앉지 않고 매장을 배회했던 알바생에서 조금씩 여유도 부리고 요령도 피우는 알바생으로 성장했다. 40대가 된 지금 돌이켜보면 내 시급은 내 시간이라는 순수한 마음으로 업무 하나하나에 최선을 다했던 10대의 내가 자랑스럽다. 고객의 발톱의 때를 닦을 때도, 복권가게에서 1달러 짜리 복권 한 장을 판매할 때도 나는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에 대한 막중한 사명감을 가졌고, 그 과정에서 고객들과 나누는 농담 한마디가 즐거웠고, 내가 깨끗하게 정리한 매장을 보며 뿌듯함을 느꼈다.
직장인 16년차인 현재의 나는 아마 더 노련하고 더 요령을 피울 줄 아는 사람일 것이다. 지금은 단순히 내 시간이 내 시급이라는 일차원적 개념을 넘어 나와 함께 일하는 소중한 동료들, 내가 하는 일에 연관된 많은 사람들을 훨씬 중요하게 생각한다. 40대의 직장인으로서 커리어, 재정상태 등 생각할 것도 많다. 그러나 직장생활에 슬럼프가 오려고 할 때 나는 십대 시절의 단순 명료한 마음가짐을 조용히 꺼내 본다. 그때 내 자신이 가지고 있던 직무에 대한 명확한 확신과 순수한 양심을 상기하고 에너지를 얻는다.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듯 사람은 본능적으로 너무나 쉽게 남과 비교하게 되고 내 행복의 기준도 다른 사람의 것에 맞추게 된다. 나는 자기검토만이 그 본능을 거슬러 나의 일상을 나만의 기준에 재조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 믿는다. 자기검토의 기준은 나만의 경험에서 나오는 것이고 나의 알바 경험이 그 잣대에서 크게 기여하고 있는 점은 참 다행이다. 지금의 내 경험 역시 미래의 자기검토의 기준이 될 것이므로 오늘도 나는 내 양심을 챙겨 경쾌하게 출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