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의 엄마 관찰기
2019년 초, 우리 가족은 나의 고향을 떠나 엄마의 고향에 자리 잡았다. 소도시와 시골의 경계에 위치한 새 집의 곳곳에는 엄마의 취향이 반영되었는데, 특히 부엌이 그랬다. 부드러운 푸른빛의 목조 싱크대 문, 진한 나무색의 식탁 위에서 달랑이는 하늘색 삿갓등, 이사할 때마다 신문지로 겹겹이 싸서 고이 모셔온 찻잔들. 언뜻 보기에는 번드르르하지만 설계 및 시공 과정의 허점 탓에 자세히 볼수록 기묘한 구석―성인 남성의 머리 꼭대기 높이에 달려서 의자를 딛고 올라서야 열 수 있는 창문이라든가―이 많은 집에서, 부엌은 가장 완벽한 공간이었다.
새로운 부엌에 영감이라도 받았는지 엄마는 작업에 돌입했다. 엄마는 장을 보러 가서 레몬, 자몽 등 생으로 먹기 힘든 과일을 잔뜩 사들고 왔다. 외출했다 돌아오면 현관에서부터 시트러스 향기가 가득했다. 향기의 출처를 따라가면 푸른 주방 가운데 엄마가 서 있었고, 시선을 옮기니 수북이 쌓인 노랗고 붉은 껍질, 알알이 반들거리는 과육이 보였다. 엄마는 이마를 훔치며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향기 좋지?
엄마의 질문에 나는, '이게 다 뭐야?'라는 물음을 속으로 삼키고 얼떨떨한 말투로 "응."이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서른 개의 자몽이 내뿜는 향기는 정말 싱그러웠기 때문이다.
벽 틈에 배어 있던 향의 마지막 입자도 날아가 사라졌을 무렵, 우리 가족의 저녁 루틴에 티 타임이 추가되었다.
주최: 엄마
차 제작: 엄마
차 끓이기: 엄마
당신을 수제 레몬차/자몽차/생강차 시음회에 초대합니다.
따위가 적힌 초대장을 상상하고 있으면, 세 손가락으로 쥔 찻잔에서 김이 피어올라 코끝이 따뜻해졌다.
엄마는 계속해서 과일과 설탕의 조합을 탐색해나갔다. 청귤, 천혜향, 한라봉, 백향과 등 향긋한 과일은 모두 엄마의 표적이었다. 아직 봄이던 어느 날, 나는 제비꽃 사탕 절임의 존재를 알게 되어 엄마에게 귀띔했고 다음 순간 우리는 집 주변을 돌면서 풀밭에서 제비꽃을 찾고 있었다. 꽃잎이 상하지 않도록 손바닥에 조심스레 얹어 두며 작은 꽃송이를 모았다. 흰 꽃과 보라색 꽃을 설탕에 재워 잼 병에 넣으면서 예쁜 소꿉놀이를 하듯 즐거워했다. 제비꽃은 사탕으로 변하지 않았고, 정체불명의 혼합물을 따뜻한 물에 타서 차로 마셔 보려는 시도마저 실패로 판명되었지만 마냥 재미있었다. 소꿉놀이를 할 때 성공과 실패는 중요하지 않으니 말이다.
여름이 되자 소꿉놀이는 더 이상 소꿉놀이가 아니게 되었다.
엄마가 카페를 열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차를 건네며 맛이 괜찮은지 물어보던 엄마의 미소 뒤에 숨어있던 포부를 뒤늦게 알아차렸고, 무작정 환영할 수만은 없었다.
모두가 엄마를 만류했다. 보다 정확한 표현은 ‘엄마가 카페를 시작했다가 일이 잘 풀리지 않을 경우 금전적인 피해를 입을 가능성이 있는 모든 사람들이 반대했다.’일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엄마는 태어나서 한 번도 요식업에 종사해 본 적이 없었을뿐더러 자영업과도 거리가 멀었다. 책 판매 사원, 독서 논술 지도사, 공부방 운영, 역사 강사 등 여러 이름의 직업을 거치는 동안 식당이나 카페에서 일한 경험은 전무했다. 그나마 관련 있는 경력을 억지로 찾자면, 대학교 1학년 여름방학에 가정부를 구하는 신문 공고를 보고 일하러 갔다가 종일 청소만 하고서는 하루 만에 그만둔 것이라고 하겠다. 그렇다고 해서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살아온 류의 사람도 아니다. 엄마의 왼손에는 여섯 살 때 복숭아를 깎다 칼에 베인 흉터가 있다. 열세 살부터 부모님과 떨어져 살며 아침마다 두 남동생의 도시락을 꾸리기 시작한 이래로 온갖 가정일을 도맡아 해왔고, 오랜 세월 동안 편중된 가사 노동은 오십견과 음식 솜씨를 남겼다.
엄마의 요리 솜씨를 아는 삼촌은 낙지볶음, 쌈밥 등의 메뉴를 권유하는 메시지를 매일같이 보냈지만 엄마가 북카페를 포기하도록 만드는 데에는 역부족이었다. 엄마의 주장은 확실했고 근거는 간결했다. 커피를 좋아해서 바리스타 자격증을 취득한 바 있으며, 카페를 좋아해서 많은 카페를 다녔고, 문학과 책을 좋아해서 책을 모았으니 북카페를 열겠다는 자연스러운 생각의 흐름이었다. 엄마와 경제 공동체로 얽히지 않은 많은 지인들은 엄마의 계획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다 못해 "어머! 너무 잘 어울린다! 너한테 딱이다!" 식으로 호들갑을 떨었다. 우리 집의 형편이 아주 넉넉하였더라면 한 번의 실패쯤이야 인생에 교훈을 주는 디딤돌로 여길 수 있을 테니 가족들도 엄마의 매끈한 논리를 전폭적으로 응원했을 테지만, 단 한 번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 것이 우리 가족의 현실이었다.
일 년 중 카페에 손님이 가장 많이 몰려드는 계절, 여름이 찾아왔지만 우리 집 1층은 여전히 텅 비어 시멘트 벽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내 방에 누워 있어도 안방에서 새어 나오는 엄마의 한숨이 귓가를 타고 들어와 몸속 구석구석을 찔렀다. 엄마는, 침대 위에 홀로 앉아 흐느껴 울기도 했다. 내 방에서 안방까지는 고작 열 걸음이지만 나는 엄마에게 가서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지도, 엄마가 내게 했듯 따뜻하게 위로하지도 못했다. 엄마의 한숨과 울음은 소리만으로도 너무나 슬프고 무서운 것이어서 눈으로 확인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카페를 열든지 열지 않든지 간에, 이 과도기의 여름이 어서 지나가기를 바랐다.
그로부터 일 년이 지난 지금, 나는 카페의 창가 자리에 앉아 힘들고 즐거웠던 사건들과 시간을 떠올려 본다. 개업한 지 반년이 지난 카페는 큰 수익을 가져다주지는 않더라도 어찌어찌 굴러가는 중이고, 가족의 일상적 생활공간이 되었다. 그 과정이 기억에서 더 희미해지기 전에 기록해 둘 필요성을 느낀다.
창가 자리에 새로 놓인 아카시아 나무 책상과 그 가로길이에 맞는 선반 위에, 엄마가 언젠가 전시회에서 산 고흐의 그림엽서, 20년 전부터 보관해온 앤틱 액자, 릴케와 윤동주, 김소월의 시집이 자리하고 있다. 오늘같이 비가 세차게 내린 날이면 사람들의 발길이 뜸해도, 엄마의 취향이 담긴 물건들은 변함없이 엄마의 카페를, 카페로 표상된 엄마의 세계―의지, 욕망, 희망, 꿈, 이상, 혹은 이들과 바꾸어 쓸 수 있는 모든 단어들―를 지키고 있다.
사랑하는 엄마의 여정을 응원하며,
6월의 끝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