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뒤뜰뒤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원사 Jul 13. 2020

이상이여 (잠시) 안녕

남미를 그리워하며

국경에서 맞는 아침이었다. 페루 쿠스코 출발한 버스는  시간을 내리 달려 남미의 밤을 통과했다. 햇빛이 아른거리자, 뒤로 젖혀진 버스 좌석 위에 고요히 누워 있던 승객들이 수직으로 몸을 세우기 시작했다. -모스, -가도, -에르따  받침 없는 말끝들의 속삭임이 여기저기서 버석거렸다. 수면에서 미처  벗어나지 못한 의식으로  티티카카 호수는 차라리 바다 같았다. 멈추어  버스의  층과  층에서 승객들이 줄줄이 내렸다가 줄줄이 올라탔다. 도장이 하나 늘어난 여권을 손에  채였다. 볼리비아에 처음으로 발을 디딘 순간이었다.


볼리비아를 떠올리면 만감이 교차한다. 낮과 밤의 일교차가 큰 곳, 지평선에 바싹 붙은 별이 뜨는 곳. 검은 머리를 길게 내려 땋은 할머니가 손녀의 손을 잡고 걷는 곳, 지금 내가 있어야 했던 곳. 코로나바이러스가 아니었다면 이 글은 쓰이지 않았을 것이며 나는 여행객이 아닌 봉사단원으로서 볼리비아에서의 일상을 기록했을 것이다.


볼리비아의 국경도시 코파카바나


2년 전, 캐나다 워킹홀리데이를 마치고 귀국하는 길에 들른 남미의 사람들과 문화에 깊이 매료되었다. 남미는 인상 깊은 여행지였을 뿐만 아니라, 하고 싶은 일을 찾아 헤매던 대학 부적응자에게 새로운 열망을 심어주었다. 개발도상국의 발전을 도와 소외 없이 어울려 살아가는 지구촌에 보탬이 되어야겠다는 목표가 생긴 것이다. 그렇게 세계 빈곤 퇴치의 꿈에 부풀어 한국에 돌아왔더니 제 코가 석 자라고, 바닥난 잔고가 나를 맞이했다. 귀국 다음 주부터 당장 서빙 아르바이트와 과외를 병행했다.


그렇게 마지막 학기를 마친 후 대학이 남긴 유일한 유품인 자격증 한 장을 들고 첫 직장 생활을 시작했다. 좀 적응했다 싶으니 어느새 계절이 세 번 바뀌어 있었다. 북쪽에서 부는 바람이 볼을 날카로이 스쳤고 계약 만료일이 코앞이었다. 그해 겨울은 선택의 계절이었다. 마음속에서 현실과 이상이 치열한 다툼을 벌였는데, 다툼의 승패는 결국 스스로의 결정에 달려 있다고 생각하여 이상의 손을 마주 잡고 들어 올렸다.


한 글자 한 글자 정성 들여 코이카 해외봉사단 자기소개서를 작성했다. 하루 일찍 서울에 올라가 숙소에서 같은 문장을 반복해 읊어보던 면접 전날 밤과, 면접실에 앉아 컵에 물을 따를 때 떨리던 손이 기억난다. 조바심을 내며 기다린 끝에 합격 통지를 확인하던 순간이 생생하고, 파견 국가 란에 쓰인 '볼리비아' 네 글자의 색과 모양이 기억에 또렷하다. 엄마 아빠를 설득하기 위해 울고 화내고 빌기도 했던 힘겨운 시간들이 헛되지 않았다는 생각이 스치면 눈시울이 시큰거렸다. 오는 5월이면 새로운 삶이 시작된다는 설렘으로 가슴이 부풀었다.


누군가가 볼리비아의 국경을 다시 밟으려 노력했고 한 도시에서 시작한 전염병은 세계의 국경을 타고 넘었다.


우유니의 해질녘은 평화롭다


합격자 교육이 미뤄졌다가, 재개 통지되었고, 다시 미뤄졌다. 두 번째 교육 연기 메일이 날아든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각국에 파견 중이었던 단원들이 급히 귀국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기약 없는 기다림이 시작됨에 따라, 작년에 쓰고 남은 약간의 월급과 실업 급여를 들고 현실을 만나러 갔다. 인터넷 강의 수강권과 교재, 오래 앉아 있어도 꼬리뼈가 아프지 않은 의자, 그리고 마스크를 구매했다. 진로를 바꿔보려던 항명 행위는 다소 허무하게 막을 내렸다.


어쩌면 이상과 현실 사이의 승패를 판정할 권한은 현실 그 자체가 쥐고 있는지도 모른다. 스스로의 의지로 이상을 선택한다고 생각하는 경우에도 사실은, 현실 부장이 이상 씨의 기획서를 검토하여 결재하는 장면에 가깝다는 생각을 해본다.


뒤늦게 시작한 수험생활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되리라는 확신도, 코로나가 머지않아 종식될 가능성도 희미하지만 세계지도에 여전히 볼리비아가 존재하고, 나는 아스따 루에고, 하고 은밀히 재회의 주술을 속삭인다. 현실을 걷고 이상을 꿈꾸며 일상을 살다 보면, 또 어느 계절엔가 현실이 이상에게 너그러움을 베풀어줄지도 모르는 일이다.


볼리비아에서의 마지막 밤, 수도 라파스의 야경


*간발의 차로 나도 작가다 공모전 태그를 놓쳤지만 쓴 김에 올린다. 실패가 주제인 공모전에 참가 실패한 것도 나름 재미있는 경험이라고 합리화하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