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르는 강물을 거꾸로 거슬러

생각의 Flip : 인문학 산책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고

by 클래식임팩트


조르바는 말한다.



"내 영혼에는 들어오지 못해. 문을 열어 주지 않을 거니까. 내 불을 끌 수도 없어. 나를 뒤엎는다니. 어림없는 수작!"



나를 갉아먹으려는 것들 앞에서 이처럼 당당할 수 있는가? 여기 한 남자가 있다.

<그리스인 조르바>의 저자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20세기 그리스를 대표하는 작가다. 그리스는 동서양을 잇는 지점에 위치하고 있어 2000년간 문화 교류의 다리였다. 반대로 생각해 보자면, 그리스의 정체성은 동서양의 문화가 번갈아 유입되고, 또 소멸되는 과정을 거쳐서 형성된 것이다. 그렇게 그리스인들은 그리스의 특이성이 야기한 혼란을 마주하고, 끝없는 변화를 강요당하며 살아왔는데 카잔차키스가 태어난 19세기 말의 그리스도 다르지 않았다. 당시 그리스는 터키의 식민지였고, 그는 조국의 독립 전쟁을 보며 자랐다. 더군다나 그리스뿐만이 아니라 전 세계가 전쟁과 죽음으로 물드는 중이었다. 그동안 많은 사람들의 삶의 지향점이었던 종교는 권위를 잃게 되고, 사람들은 추운 겨울날 비에 흠뻑 젖은 고양이처럼 두려움에 떨 수밖에 없었다. 나를 나로서 올곧게 살 수 없는 세상. 이렇듯 허무주의가 팽배한 세상에서 그는 <그리스인 조르바>를 집필했다.


이 소설은 '나'로 표현되는 주인공이 그리스의 어느 항구 도시에서 우연히 방랑객 조르바를 만나 크레타 섬으로 건너가게 되는 것으로 시작한다. '나'는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사람, 카잔차키스 본인과 유사한 인물이다. 크레타 섬에서 탄광 사업을 번창시켜 돈을 벌어보자는 것을 목표로 '나'는 조르바와 동행하게 되는데 그곳에서 그들은 과부를 만나 사랑을 나누기도 하고, 마을 사람들과 여러 해프닝을 겪기도 한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여러 시행착오 끝에 사업은 실패로 끝난다. 이후 조르바는 다른 나라로 건너가고, '나'는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가운데 어느 날 조르바의 죽음을 알리는 편지를 받으면서 끝난다.


BRWJ2XuBRXQxQtwjkpK59RMNMgNesC35aF9b724vWVcD5iDk.png 크레타 섬에서의 '나'와 조르바



'나'는 흐릿한 자아를 가진 전형적인 글쟁이다. 그는 교육을 통해 민중을 계몽하고자 하며 그것을 자기 사명이라 여긴다. 때문에 늘 영혼의 성장에 관해 고뇌한다. 그러나 이렇게 고민하면서도 그는 그것이 전부다. 진정한 자유는 무엇일까, 어떻게 온전한 자아를 지킬 수 있을까에 관해 무수히 생각하지만 더 나아가지 못한다. 오히려 그동안 옳다고 믿어왔던 진리에 대한 회의감만 깊어질 뿐이다. 역설적이게도 그가 책 속에 빠져 시대의 과제를 고민하는 동안, 소중한 친구는 독립전쟁에서 죽어나간다. 이렇듯이 그의 사상은 삶 속에 녹아들지 못하고, 겉돌기만 한다.


반면, 조르바는 '나'와 달라도 너무 다르다. 조르바는 생각이 길지 않다. 그는 육체가 만족하지 못하면 영혼의 만족은 이루어질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에게 있어서 사상이란 본능에 지배를 받는 부속품에 불과하다. 그래서 그는 육체의 감각이 아주 예민하다. 작은 꽃을 보고서도 가슴이 뛰고, 넓은 바닷가에서 춤을 추지 않고는 못 배기고, 아름다운 여자의 향기를 맡으면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 그는 마치 사진을 찍는 것처럼 순간을 담아내고, 남들이 보지 못하는 행복을 포착할 수 있는 안경을 끼고 세상을 마주한다.


"두목, 저기 저 건너 가슴을 뭉클거리게 하는 파란 색깔, 저 기적이 무엇이오? 당신은 저 기적을 뭐라고 부르지요? 바다? 바다? 꽃으로 된 초록빛 앞치마를 입고 있는 저것은? 대지라고 그러오? 이걸 만든 예술가는 누구지요?" 그의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또한 그는 하고자 하는 일은 피땀을 쏟아내어 기어코 끝내고 마는 사람이다. 여자와 사랑을 나눌 때 무슨 생각이 필요하랴. 그저 본능에 충실하면 된다. 탄광에서 작업할 때 필요한 것은 일에 대한 열정뿐이다. 그것이 누구에게도 양보할 수 없는 그만의 방식이다.




주류의 힘은 강하다.



그 거센 물결은 강한 설득력으로 작은 지류들을 흡수하여, 의심의 여지없이 바다로 흘러간다. 그렇기에 대세를 거스르는 일은 상식을 벗어나는 일이라 여겨질 수 있다. 그러나 눈여겨보아야 하는 사실이 있다. 강물 속을 들여다보면 매년 매서운 물줄기를 거슬러 올라가 알을 낳는 연어가 있다는 것이다. 연어는 곧이곧대로 주류에 순응하지 않는다. 하류는 알을 지키기에 안전하지 않다. 때문에 연어는 그 길이 남들과 다를지언정, 힘들지언정, 그저 거슬러 올라간다. 일말의 망설임 없이 헤엄치는 연어를 떠올리면 인생에 후회를 남기지 않겠다는 담담함이 가득 찬 태도가 그 짧은 삶을 얼마나 아름답게 하는지 알 수 있다. 게다가 연어와 같이 스스로 풍요로운 사람은 혼자서만 빛나지 않는다. 의도적이던, 그렇지 않든 간에 그 사람은 다른 이들로 하여금 몽매한 자신을 되돌아보고, 또 다른 연어로 거듭날 수 있는 영감을 준다. 조르바와 '나'의 관계가 그렇다. 조르바는 한 마리의 연어와 같고, '나'는 조르바와 함께 있으면서 그에게 조금씩 동화되어 간다. '나'는 이제 따뜻한 화덕, 정성스레 차린 음식, 그리고 향기가 가득한 집에서 느끼는 육신의 행복이 영혼에 안정을 가져다준다는 것을 안다. 동시에, 이제 책들이 그에게 하나의 지적인 광대놀이에 불과하다는 것을 안다. 드넓은 바다가 있고, 별들이 온몸으로 빛나는 세상 앞에서는 어떤 거창한 사상도 쓸모가 없는 것이다. 인간의 수명은 유한하고, 죽고 나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그러나 삶에 대한 의지는 무한하다. 지금의 삶을 다시 한번 똑같이 살아도 좋다는 마음으로 인생을 대하는 이에게는 모든 순간들이 영원하다. 절망조차도 없는 절망적인 세상에서 조르바는 살아있음을 감사해하고 매 순간 최선을 다한다. 몸을 내던져라. 주체적으로 행동하라. 그러면 삶의 의미는 저절로 또렷이 새겨지게 될 것이다. 조르바의 의지는 이것이었다.


change-3256330_1920.jpg 변화의 순간은 바로 지금이다


카잔차키스는 '조르바'라는 인간상을 그려냈지만 그가 진정으로 하고 싶었던 말은 누구나 새로운 조르바가 되길 바란다는 거라 생각한다. 앞서 말했듯이 조르바는 한 마리의 연어다. 그리고 한 마리의 연어를 동경하는 사람들 역시 수많은 또 다른 연어가 될 수 있다. 그는 100여 년 전에 이 책을 썼지만 그 속에 담긴 메시지는 현재의 우리들에게도 울림을 선사한다. 기술이 발달함에 다라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정보의 양은 방대해졌다. 그러나 다들 어떤 정보를 어떻게 내 것으로 만드느냐에 관해서는 무지하다. 나 스스로의 분명한 생각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내가 왜 공부를 하는지, 일을 하는지, 분명한 인식이 없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은 외적으로 보이는 가치를 포장하는 데에만 몰두하는데 특히나 SNS상에서는 자신이 얼마나 좋은 것을 소유하고, 소비하는가,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글과 사진 속에 잘 담아내느냐의 문제가 중요하게 다루어진다. 카잔차키스는 말한다. 자, 진정한 가치는 소유와 소비가 아니라 직접 어떤 것을 생산하고 창출해낼 때 만들어진다. 그리고 이 차이는 정말 단순한 관점의 변형(tweak)에서 비롯된다. 사소한 변형은 삶 전체에 적용되는 변화를 유인한다. 이 세상을 당연하다는 듯이 수동적인 자세로 받아들이는 우리, 충분히 고개를 숙이고 부끄러워하는 것부터 시작하자. 이미 그것만으로도 큰 발걸음이다. 벼가 익을수록 고개를 숙이듯이, 스스로를 되돌아보는 만큼 우리는 성숙해진다. 그렇게 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만의 답을 찾지 못했다면 일단 조르바의 흔적을 따라가 보자. 작은 것에도 감동할 줄 알고, 감사해 하자. 내가 하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온 힘을 다해 이루어 내고, 그런 나를 사랑하자.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열렬히 사랑하자. 차가운 기운이 맴도는 겨울을 지나 우리 마음이 의지로 충만해 뜨거워질 때가 되면, 어느새 누렇게 물든 벼를 거둘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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